◈125화 떠날 수 있다면 (7)
【손님, 손님!】
아크메이지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사람들로 인해 강제로 기상했다. 악마기사는? 하며 반사적으로 돌아본 방에는 악마기사가 과연 존재하긴 했다.
【상처가!】
단지 반죽음 상태로, 다른 이들에게 업혀 왔을 뿐이지.
“어, 어쩌다가…….”
적포도줏빛 베스트 사이로 흰 셔츠가 붉게 물든 것이 보인다. 그것도 심장 부근이었다.
일순, 그녀의 가슴이 철렁였다.
【고정할 사람만 남고 다들 떨어지게!】
그러나 정말 심장이 찔린 것이라면 한시가 급하다. 아크메이지는 다급히 옷을 찢어 벌리고, 붕대를 세로로 잘라 상처를 확인했다.
빗장뼈 근처에 하나, 심장 부근에 두 개가 있었다. 단면이 매끄럽지 못한 것에 찔린 듯, 우툴두툴하게 파인 부상이 피를 울컥울컥 토해 냈다.
“이 무슨─.”
상처의 정도를 확인하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출혈량으로 보아 어깨 쪽 피해는 쇄골하동맥은 간신히 피한 듯하지만, 심장 쪽은 여지없이 치명상인 까닭이다. 그나마 직격을 피했기에 목숨이 붙어 있는 거다.
【출혈을 막을 천을!】
일단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야 한다. 그녀는 팔다리를 고정할 사람들만 남긴 채 마법을 펼쳤다.
악마기사같이 강한 이가 어쩌다 이런 일을 당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어쩌다, 어쩌다 이 사람이…….”
그녀는 하얀 털이 피에 젖도록 상처 부위를 압박한 채 마법을 유지했다. 다치는 걸 본 적이 드물어, 얇다고 여겨 본 적 없던 악마기사의 무장이 오늘따라 야속했다.
인퀴지터처럼 중갑옷을 입진 못해도, 경갑옷만큼은 챙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다못해 급소 보호구라도─.
“……!”
사고가 급속도로 이어지던 도중, 아크메이지의 숨이 덜컥 멈췄다.
있었다. 보호구.
그것도 심장을 보호하던 기능의 것이.
…그녀가 악마기사 몰래 빼돌린 것이.
꽈악.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급속도로 차오르는 후회는 그녀가 미처 택할 수 없던 가능성의 한 갈래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아.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지금처럼 급소를 공격당할 줄 알았다면. 심장 부근을 찔려 생사를 오갈 줄 알았더라면.
그녀는 그것을, 그것을…….
아니. 그래도 회수했겠지.
피습당할 걸 안다면 새로운 가슴보호대를 만들어 주거나, 애초에 피습당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을 테니.
하므로 지금 솟구치는 후회는 무가치한 것이다. 사건이 터지는 것과 그가 보호대란 이름의 폭탄을 계속 매달고 있는 것은 정말 별개의 일이므로, 그녀의 후회는 아무 의미 없단 말이다.
암, 그녀가 이리 될 줄 어찌 알고 심장보호구를 가져갔겠는가?
단지, 단지 그녀는 이 사내가 폭탄을 심장에 매달고 있지 않기를 바랐을 따름이다. 이 남자가 남에게 심장을 내주는 것보다, 그 스스로 폭탄을 터트리는 것이 우선일 거라 생각하여 빼돌린 것이란 말이다.
지금처럼 부상이 더 커지길 바라서가 아니라.
하니 이것은 오롯이 불운이다. 호의가 매번 좋은 결과를 불러오지 못하듯, 이번 또한 불행이 선의를 이겼을 뿐이다.
그랬을 뿐이다…….
“신이시여.”
그랬을 뿐이지만.
“마를 품은 것은 이 사람의 잘못이 아니니, 부디 선처를.”
역시 그녀가 모르고 지나쳐, 악마기사가 명목상의 기능으로 활약한 보호대로 부상이 덜해진 미래를 차마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자비를 내려 주소서.”
노회한 현자의 눈에 슬픔이 흘러내렸다.
빠각.
“……?”
그러던 찰나,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크메이지의 젖은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셔츠를 걷어 보게.】
설마 고정하다가 뼈라도 부러트린 걸까? 하나 그렇다기엔 너무 선명한 소리였다.
그녀는 오른쪽 팔을 고정하던 이가 건틀릿과 코트 자락, 셔츠를 마저 걷어 내는 걸 지켜보았다.
마법으로 회복되는 체력이 줄어드는 체력을 상회할지가 관건이지, 발동한 상태에서 관심을 돌리는 것 자체엔 아무 문제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그러나 옷을 제거한 팔은 멀쩡했다. 단지 셔츠를 벗기던 차례에, 셔츠의 팔 부분에서 검은 조각들이 떨어진 게 문제지.
봉인구의 조각이다. 그녀는 침음을 삼켰다.
【붕대도 벗겨야 합니까?】
【아니. 그건 내버려 두게.】
봉인구가 왜 부서졌는지는 의문이나, 악마가 날뛸 징조가 없다면 우선순위는 치료가 먼저다.
더불어 붕대는… 일단 지혈 효과도 있고, 붕대를 벗기지만 않으면 악마기사가 숨기고자 하는 비밀도 어느 정도 지켜진다. 그녀는 심장의 상처에 집중했다.
“허억!”
한데 살이 메워지기도 전, 그리고 봉인구가 깨어진 지 10초도 채 흐르지 않은 시점에서 악마기사가 호흡과 함께 깨어났다.
흘린 피의 양이 양인지라 얼굴이 파리했는데, 그 때문에 꼭 시체가 깨어난 것처럼 보였다. 또는 시체에 막 영혼이 깃든 것처럼.
“아, 이.”
“……! 말하지, 아니. 계속 말하게. 잠드는 것보단 나아!”
“아이는.”
제 말을 듣기는 한 것인지, 혹은 몽혼한 상태로 본인이 중요하다 여기는 것만 말하는지.
어쨌거나 악마기사는 쿨럭거리며 말과 피를 함께 쏟았다.
“나랑, 같이. 온.”
“같이 온 아이?”
이 말만으로는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녀는 악마기사를 데려온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악마기사와 같이 있던 아이가 있나?】
그들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 탈출한 아이여서…….】
【아이는…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탈출?】
“그 애도, 다쳤…….”
탈출한 아이라고? 그런데 아이도 다쳤어?
【그 애도 데려오게.】
더 들어도 파악하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다.
다만 다친 아이가 감옥으로 보내졌다는 걸 악마기사가 좋아할 것 같진 않으니.
더구나 악마기사의 부상엔 어쩐지 그 아이가 얽혀 있을 듯 보인다. 그녀는 차라리 그 애에게 진실을 듣기로 했다.
손은 여전히 악마기사의 상처에 마력을 쏟고 있다.
【네, 네.】
주변인들은 달가워하지 못할지언정 거부하진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아크메이지는 강경하게 외치고 나서야 아이를 데리러 가는 이들을 힐끗 보곤, 다시 치료에 집중했다.
한시가 바쁜 와중에 미적미적대는 이들을 두고 있자니 속에서 열이라도 오르는 양했다.
“……?”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는 골칫거리는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부상 부위로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야에 기이한 장면이 담겼다.
상처 사이로 검은 기운이, 검은 마력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건……?”
저것이 대체 무슨 작용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으나, 당장 알 방도가 없다. 그녀는 그 장면을 기억하며 일단 치료에 전념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악마기사는 기이할 정도로 질기게 목숨을 이어 나가, 끝내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 * *
─자넨 이게 무슨 현상이라고 보는가?
상대의 물음에 맹렬한 흰바람은 손가락을 도르륵 움직였다.
아크메이지의 증언에 따르면 평상시 회복력이 특출나게 빠른 건 아니다.
일반인에 비하면야 훨씬 빠른 게 맞으나 마력 사용자 평균을 고려하면 얼마든지 납득 가능한 회복 속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 죽지 않는 건 별개다. 마력으로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도 정도껏이지.
마력 사용자가 무슨 괴물인가? 심장 근처를 찔린 채, 제대로 처치도 없이 몇 시간을 걸었는데도 멀쩡하게.
심지어 그만한 양의 피를 흘려 놓고도 삼십 분이 채 안 된 시간 만에 깨어나 무어라 말을 지껄였댄다.
이건, 분명 비정상적이었다.
“원인 없이 결과만 나오는 일 없고, 시작 없이는 끝도 없지.”
─…그래.
“결국 악마기사의 질긴 목숨에도 무언가 이유가 있을 텐데… 혹시 악마가 신체에 관여하고 있는 건가? 악마기사가 죽으면 본인도 죽으니까?”
─나도 일단 그렇지 않을까 싶네.
“흐음.”
그런 것치곤… 너무 평탄하게 끝나지 않았나. 그 틈을 타 몸을 장악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치료만 해 주고 끝내는 건 좀 악마답지 않잖아?
“아까 봉인구가 박살 났다고 했지?”
─그래.
정말 악마가 치료에 관여했다면 이렇게 간단히 끝냈을 리 없다. 흰바람은 다른 각도로 사유해 보았다.
“…마력은 몸이 사용하는 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지.”
악마기사의 봉인구가 깨진 상황은 대부분 출력 문제였다. 물론 여러 번의 실험 끝에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깨진 전적이 있는 걸 보면 여전히 정도 이상의 출력은 못 버티는 게 분명하다.
하면 이번 사건도 그 때문이 아닐까?
─마력 사용자가 일반인보다 생명력이 질긴 편이긴 하네만, 이 정도까지는 어렵지 않나?
“그거야 보통의 마력 사용자들 이야기고. 악마기사의 마력량은 아무래도 규격 외잖아?”
─마력이 한계를 넘으면… 죽음마저 지연시킬 수 있다는 건가?
“마력의 양이 많을수록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건 이미 증명된 사례야. 단지 악마기사처럼 강대한 마력의 소유자가 지금까지 존재한 적 없었을 뿐.”
─…가능성은 있군.
“악마가 그릇을 치료하고 얌전히 물러났다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설득력 있지.”
목숨이 아슬아슬했던 만큼, 악마가 관여했대도 남은 힘이 부족해서 몸을 장악하지 못하고 끝낸 것일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악마는 여전히 억압되어 있되, 악마기사의 무의식이 생존을 위해 봉인구를 박살 내고 힘을 끌어왔다는 가설 또한 세울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가능성은 타당했다.
“이건 어지간하면 자세히 물어봐야겠는데.”
다만 그래. 후자라면 다행이나, 전자라면 위험하다.
흰바람은 악마기사가 이에 대해 답을 해 줄지 아닐지 고민해 보며, 악마기사의 현 상태를 물어보았다.
─아직 잠들어 있네.
“하긴. 벌써 깨어나는 게 신기한 일이지.”
중간에 잠깐 깨어나 할 말 하고 다시 잠든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흰바람은 시큰둥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마탑에서 가져온 의자는 푹신하니 부족 특유의 좌식 생활이 가져오는 아쉬움을 채워 주었다.
“아, 근데 악마기사는 대체 왜 다친 거야? 용이라도 나왔어? 아니면 산군이랑 싸웠니? 한판 했어?”
─…그건 아니고, 아이를 구하다가 다쳤다는군.
“다른 곳도 아닌 심장을?”
─그건… 아. 깨어난 모양이네. 잠시 자리를 비우지.
“그래.”
어차피 할 것도 없다. 흰바람은 끊어진 걸 알면서도 구태여 일어서는 대신 연락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책이 다시 울렸다.
“그래서어.”
─봉인구, 남는 거 있나?
“응?”
여분이 있을 텐데, 봉인구는 왜 찾는 걸까. 흰바람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있지.”
할 일도 없으니 심심할 때 개량이라도 할까 하고 몇 개 더 가져왔다. 재료도 아공간 가방에 있으니 뭣하면 급조하는 것도 가능했다.
“근데 왜? 여분 있지 않아?”
─…얼마 전에 여분을 하나 썼다더군.
“언제?”
─그가 독에 당해 반나절 자고 일어난 날. 그때도 박살 났던 모양이네.
“그래? 근데 왜 그걸 지금 말해?”
─…나도 지금 들었네. 아마 뱀에게 부서진겠거니 여긴 게 아닌가 싶지만.
그런가? 그렇다기엔 미묘하게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흰바람은 그 미묘한 비틀림을 인지하면서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알았어. 그럼 바로 보내야겠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흰바람은 이런 것에 크게 관심 없었다.
“자타브가 아직 포기를 안 했는데, 대체 누굴 보내야 하려나…….”
그때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댁네 마법사들이 또 사고 쳤는데…….”
“베르세르크는 사고 안 쳤다.”
“투사 나리는 입 좀 다물어요. 사고 안 친 게 아니라 치는 걸 제가 막은 거니까. 어쨌든 그래서… 뭐예요, 그 표정?”
참으로 우연스럽게도, 딱 보내기 좋은 이들이 알아서 찾아왔다.
흰바람은 방긋 웃었다.
“쟤네 보낼게.”
─그러게.
“예?”
심부름꾼이 정해졌다.
* * *
완전히 잊고 있었네…….
나는 2천대를 훌쩍 넘긴 마력량을 보며 미묘한 감상에 빠졌다.
진짜 말 안 하고 흰바람에게만 예비분을 받아 움직이려던 건 물론 아니었다. 그냥 그때만 욱해서 그렇게 생각했던 거지.
근데… 그 뒤로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나는 괜히 아크메이지의 눈치를 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아크메이지가 치료하느라 절개했던 붕대는 다시 수복되었고, 풀어헤쳐진 셔츠도 다시 입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날 공격했던 애도… 뭐. 치료는 잘 받은 것 같다. 다친 곳에 붕대랑 부목이랑 잘 감싸고 있네. 어쩐지 기억보다 더 다친 것 같지만, 설마 마을에 와서 부상을 더 입었겠나. 주변도 어두웠고 상황도 개판이었으니까 내가 착각한 거겠지.
오히려 내가 신경 쓰게 되는 부분은 다른 쪽이다.
그, 마을에 돌아왔고 상처도 입었으니만큼 보호자가 있다면 자리에 같이 있어 줄 법도 한데… 그, 아무도 없는 걸 보면 역시 안 계시는 것 같지? 쓰으읍.
나는 내 앞에 엎어져서 우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캐붕이 위험 수위라는 걸 자각했다.
급해서 본 성격 나온 걸 그나마 저 애만 봤다는 게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저 애가 그때 상황을 설명하던 도중 내가 했던 말까지 고스란히─ 따라 하진 못하겠군. 언어가 다르니까.
나는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게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쟤네는 캐붕인지도 모를 거다.
그래도 우는 모습 자체는 만국 공통이니까. 그 부분이 목격된 이상 조심해야 하긴 한다. 머리 쓰다듬기가 캐붕인 것도 맞고.
해서 나는 오른팔을 쥔 채 멍하니 벽에 기댔다.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아서 그런가. 묘하게 피곤했다.
아니면 안 자고 폭포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서 그런 걸지도? 혹은 부상 때문에 기절했는데도 몇 시간 안 자고 깨어나서 피로도가 덜 풀렸다든가?
“이야기 좀 하세.”
그러나 피로도를 빼기 위해 자자니, 내겐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봉인구 이야길 미뤄 두었던 업보가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제기랄.
“……. 아픈 곳은… 아니, 다친 덴 괜찮은가?”
그건 치료해 준 본인이 더 잘 알지 않나. 나는 뚱하니 HP창을 보았다.
오랜 경험 끝에 신뢰도가 다소 떨어진다 사료되는 것이 바로 HP였지만, 그래도 숫자로 표기되는 만큼 직관적이긴 하다. 최소한 가득 찼을 때 내가 죽을 일은 없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난 괜찮다.
어깨에 뚫린 구멍은 비록 약초와 연고만 발라 붕대로 감은 상태지만, 심장께의 상처는 새살이 티가 나게 돋은 상태지만, HP가 미묘하게 하락했다가 올라가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어쨌든 하향세는 아니지 않은가? 그거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을 상처들이었다.
정신과 마음에 새겨지는 흉터와 다르게,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거란 이야기다.
“…아이가, 자네를 공격했다 들었네.”
“그래서.”
그보다 애한테 벌 주자는 이야기로 바로 넘어가는 거야?
물론 내가 용서한 것과 별개로 사람을 죽일 뻔한 건 분명 잘못된 일이니까. 그에 맞는 제재를 가하는 게 맞긴 하지. 이럴 때 그냥 넘어가면 애한테 나쁜 버릇 들기 딱 좋고.
근데 여기 처벌은 썩…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 아닐 것 같단 말이지? 이 세계는 워낙 자비가 없고 처벌의 강도가 강해서.
살인 미수죄인 만큼 벌은 분명 줘야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사형 같은 건 피하고 싶은데.
아, 진짜 아이 보호자 없나? 이런 건 원래 보호자랑 상담해야 하는 문젠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내가 고민하는 사이, 말을 한참 고르던 아크메이지가 물었다. 의외였다. 왜 구해 줬냐거나 뭐 그런 걸 묻지 않을까 했는데.
“이 아이를 부족에게 넘기면 아마 알아서 처벌을 내릴 걸세. 죽음일 확률이 제일 높긴 하지만.”
별개로, 아크메이지도 역시 애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난 자네의 의견을 따르겠네. 다친 건 자네니까.”
하긴. 모를 수도 없다. 중간중간 이것저것 물건을 가져다주던 이들이 하나같이 아이를 끌고 가려 했는데, 그곳에 어린 악의를 그녀가 못 읽어 낼 리가.
내가 깨어나기도 전에 우리 셋만 남기고 나머진 다 밖으로 내보낸 것도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상황이 정확해지기 전까진 아이를 보호하고자 한 조치였겠지.
“그 애는 미안하다고 하고 있네.”
한데 내가 이딴 생각이나 하며 아이를 봤더니, 아크메이지는 궁금해서 본 것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말은 몰라도 언어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란 게 있어서 이미 와닿는 바가 있었거든.
“…아니면 저 아이가 자네를 공격한 이유가 궁금한가?”
“내 알 바 아니다.”
“하면…….”
“전해라.”
무엇보다 나는…….
“미안하단 말은 무가치하며.”
이유야 당연히 궁금하지만 컨셉상 물어보기 힘들고, 사과 쪽은 처음부터 받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이렇게 어린애가 이유 없이 내게 칼을 든 건 아닐 거 아냐.
그러니 그냥, 내가 뭘 잘못했거나 누군가가 시킨 거겠지.
심지어 둘 다 예상 가는 바가 있다. 아무렴, 보호자가 없는 아이임을 고려하거든 전자로서 나로 인해 처형된 이의 자식일 수도 있고, 후자라면 내가 자존심 박살 내 준 아타르트가 있지 않나.
그러므로 나는 그냥, 그냥…….
“두 번의 기회는 없다는 것을.”
이 애가 다신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마땅한 벌을 받되, 그걸 통해서 더 나아진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란다.
이미 어른이 된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저 아이를 용서하는 건가?”
“다시 덤비면 죽인다. 그뿐이다.”
“…하면, 부족에게 넘기면 되겠나?”
“다시 덤비면, 죽인다 했을 터다.”
“그런가.”
나는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아크메이지가 되길 바라며, 블루투스식 소통을 시도했다.
그, 알죠? 알 거야. 부족에 넘기면 애가 죽는 상황에서 당신이 내려야 할 판단이 뭔지, 당신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을 거라고.
【…그가 미안해하기보다 잘못을 반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말하는군.】
【그, 그렇지만…….】
【그래그래. 어찌 용서할 수 있는가가 궁금하겠지. 하나 우리라고 자네의 심정을 모르겠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네의 원망은 타당해. 타당하기에…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고.】
【…당신들이, 당신들이 어떻게 나를 이해해요. 나는, 나는 모든 걸 잃었는데……!】
【그래. 우리로 인해 잃었지.】
【그걸 알면서……!】
【그러나 자네 부모님은 다른 이들의 자식을 죽이려 들었네.】
【……!!】
【그것이 저이가 칼을 들었던 이유이며, 저이가 구하기로 정한 약자일세. 당시에 잡혀 있던 그 어린아이들이야말로, 그가 자네들 사정에 끼어든 이유란 말일세.】
【…그, 건.】
그런데 아크메이지는 또 뭘 하느라 애를 더 울리는지 모르겠다. 뭔 말을 하길래 대화가 저렇게 길어져.
【우리를 원망하지 말란 이야기가 아니야. 자네의 부모가 어떤 짓을 저질렀건, 우리에겐 자네에게서 부모를 앗아 갈 자격이 없으니. 우릴 원망해도 좋아. 미워해도 그것이 순리일세. 다시 복수의 칼을 들어도… 이해하겠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자네도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군.】
【…알아요. 아는데, 알고는 있는데… 아빠랑, 엄마가 밤새 무언갈 떠들고 있는 건 알았는데……!】
【그래. 그래.】
【그래도, 그래도 화가 나서……!】
【자네 잘못이 아닐세. 자네의 분노는 합당해.】
【아빠가아……!】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모르겠다. 안 그래도 훌쩍거리던 아이가 더 오열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
【미안하네. 우리가 미안해.】
그래도 아이가 위안받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어째서 어른들의 욕심에 아이들만 고통받아야 하는지.】
나는 슬쩍 눈을 감았다.
“으음. 잠들었나.”
아크메이지는 통곡하던 아이가 기절하듯 잠든 것을 확인한 후 한쪽에 눕혔다.
그러나 그 뒤에도 특별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악마기사도 잠든 까닭이다.
“피곤했나 보군.”
어지간하면 타인이 있는 공간에서 눈을 붙이는 이가 아닌데.
그녀는 한쪽에 어질러져 있던 담요를 가져와 그에게 덮어 주었다.
곤히 잠든 이의 얼굴은 심장을 찔린 이 같지도, 찌른 이를 용서한 사람의 것 같지도 않다.
그래. 그저 평범했다. 목가의 청년들이 그러하듯.
“…죽을 뻔했음에도 한 번의 기회는 주는 것인가.”
하면 그는, 그 외견을 따라 목동의 외관으로 세상을 떠돌았다던 성자라도 될 셈인 걸까? 혹 이미 성인이 돼 버린 후는 아닌가?
아이가 일을 벌인 이유조차 묻지 않고도 용서해 버리는 것은, 그런 관용은, 도저히 성인이 아니고서야…….
“허.”
물론, 당연하게도 아닐 것이다.
냉혹한 신께서는 자의든 타의든 마를 품은 모든 것들을 죽이시니. 자그마치 대악마를 품은 악마기사가 성인으로 발탁될 리가 없지 않은가.
하나 성인이 아니라면 그의 행적은 어찌 설명해야 하는 걸까.
그녀는 사정을 듣고 애잔한 마음에 벌을 철회하거나, 벌을 내리되 그것에 괜한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자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건만.
아예 듣지도 않고 용서해 버린 사람은 대체 어떤 이로 분류해야 하는 것이야.
어리석을 정도로 착하다기엔 글쎄. 그는 아둔한 사람이 아니다. 분명 어느 정도 짐작을 했음에도 용서를 택한 것일 테다.
그래. 그는 알면서도 넘겼을 거란 말이다.
“자네가 악마의 그릇이 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린 신전에서 얼굴을 보았을지도 모르겠어.”
그러다 보니 의문도 들었다. 이런 처지에도 아이에게 기회를 내주는 사람이 악마기사인데, 그런 그가 좀 더 평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왔다면 얼마나 더 고운 사람이 되었을까?
“아니지. 자네의 과거를 모르니 속단하긴 어렵겠군. 검술을 수련한 흔적이 보인다 했으니, 어쩌면 기사 가문에 속해 있었을까?”
상념은 더 이어져, 악마기사의 과거에 다다랐다.
그는 악마의 그릇이 되기 전에도 이렇게 무정한 듯 상냥한 사람이었을까? 혹 밝고 활기찬 성격은 아니었을까.
악마기사를 한 명의 사람으로서 이해하고 싶어지니 드는 생각들이다. 악마기사에게는 영원히 들을 일 없는, 아마도 평생 궁금증으로 남을 호기심.
우웅.
그때 연락책이 울었다.
“아, 마침 잘됐네. 혹시 그쪽 부족에게 아이 하나 받아 줄 수 있는지─.”
─응응. 물어봐 줄게. 그보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아크메이지는 흰바람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일 있나?”
설마 보낸다던 도적청년이나 투사에게 일이 생긴 것인가. 그녀는 살짝 긴장했다.
─세르항 족장이 말하길, 카티나 기간엔 산군을, 정확히는 그를 모시는 늪의 제사장들을 절대 못 만난다는데? 자칫 잘못하면 대족장 자리를 부정 취득 한 걸로 여겨질 수 있어서, 애초에 어떤 끈을 마련해 두었든 카티나 기간만큼은 저어얼대로 그쪽에 접근할 수 없다고.
“…그게 참말인가?”
그게 정말이라면, 비가볼의 족장이 약속했던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야 모르지. 그쪽이 그걸 알고도 할 수 있다 자신한 건지, 아니면 뻥을 친 건지. 그렇지만 세르항의 족장이랑 제사장은 확실히 이렇게 말했어. 암묵적 허용이고 자시고 늪의 제사장들은 이 기간에만큼은 절대 접촉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이제 어쩔래?
세르항의 세력이 약해,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걸 수도 있다.
그러나 비가볼의 족장이 거짓을 토로하는 것일 가능성 또한 있다.
“…내가 보기엔 후자 같군.”
─네가 생각하기에도 뻥 같지?
“쯧. 시간만 낭비했어.”
이렇게 되면 그들이 이곳에서 보냈던, 그리고 비가볼 족장을 도와줬던 모든 순간이 무가치하게 변한다.
아크메이지는 산군이라는 기회에 정신 팔려, 의심 한번 안 했던 자신을 탓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떠날 수 있다면 바로 떠나는 게 낫겠군.”
─으응. 그래. 그러면 우리도 굳이 거기 갈 필요 없겠다. 근데 이미 출발한 애들은 어떡하지? 마법사도 없어서 연락도 안 되는데.
“…어차피 우리도 좀 쉬고 떠나야할 참이니 이쪽에서 알아서 합류하겠네.”
─알았어.
벌써 출발했나. 행동력이 너무 빨라도 가끔은 곤란하다.
아크메이지는 그런 생각과 함께 출발했을 이들과 어디쯤에서 마주칠 지를 계산해 보았다.
그러나 잠을 방해받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녀는 피로함을 이기지 못하고, 가벼운 결계만 친 뒤 눈꺼풀을 내렸다.
일단 자고 난 후에 생각할 요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