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이 컨셉충이면 곤란한가요-38화 (38/389)

◈38화 보다 나은 다음을 (3)

“용케 다 죽이지 않았군.”

항복한 자들은 혹시 몰라 다리를 다 비틀어 두고, 나머지 장소도 샅샅이 훑었다.

그렇게 때려잡을 놈 다 때려잡은 채 공동으로 돌아오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이들도 이곳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늦은 합류였다.

“빨리 안 걸어?”

아니, 데브가 포승줄에 사람을 묶어 데려오는 걸 보면 그렇게 안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포로도 구했는지 인퀴지터의 뒤에는 서로를 얼싸안은 이들이 있다.

나는 바위에 걸터앉은 채 그것들에게 눈길만 힐끔힐끔 주었다.

참고로 내가 하고 있는 자세는 다리를 살짝 벌리고 양 허벅지 위에 팔뚝을 얹은 채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일명 분위기 잡는 자세다.

“한데 이건…….”

그보다 아크메이지. 벽화보다 내가 살려 둔 사람들을 먼저 본 거 실화냐. 사람들보단 벽화가 더 눈에 띄지 않아? 아닌가. 끙끙 대는 소리 때문에 사람들이 더 눈에 띄나.

“기묘한 벽화로군.”

아무튼 나보다 세계관 잘 알고 아는 것도 많은 이의 감상이다. 나는 그것에 귀를 기울이며 슬그머니 벽화를 같이 확인했다.

세월을 타며 많이 훼손된 그림이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알아볼 수 있었다.

“용에 대한 벽화인가.”

“용이라면…….”

“아마 포르젠 지방의 신수인 해룡이겠지요.”

“저 지렁이 같은 게요?”

“그래. 저 지렁이 같은 게 해룡이 맞네. 뿔과 기다란 몸체는 용의 특징이니까.”

참고로 원작에선 ‘태곳적 짐승들’이나 ‘신수’라 부르는, 용이나 요정, 정령 따위의 존재가 종종 등장한다.

악마와는 좀 다른 존재들인데…… 그냥 인간이 출현하기 전부터 대륙에 있었던 이들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인류의 적이라고 보기엔 좀 애매한, 그렇지만 아군이라기도 좀 모호한 초월자들.

실상은 레이드 보스 추가하려고 만든 자본주의의 산물에 불과하지만.

“바다 위에 떠서 비바람을 몰고 오는 그림은 해룡 그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니 여기서부터 시작할 터인데…….”

“그 옆은?”

“용에게 사람들이 무언갈 바치는 걸로 보아 아마 화를 달래던 것 같군요. 그리고 그 결과가 이 다음 그림일 테고 말입니다.”

나는 마법사가 가리키는 다음 그림에 집중했다. 잔잔한 바다와 그물에 물고기가 그득그득 잡혀 올리는 그림이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사람들의 제사가 효과적으로 통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다음은 지워져서 알 수 없고…… 그 다음은 용과 그 새끼인가……?”

지워진 장면 후의 그림엔 용이 두 마리였다. 다만 그 중 하나가 작아, 어린 놈이라 추측이 가능했다.

“이 다음도 지워져 있고, 마지막 그림은 다시 용이 한 마리로군요.”

어린 용이 어디 갔는지는 모른다. 가운데 그림이 지워진 이상 할 수 있는 건 가설 세우기뿐이다.

어른 용이 죽고 어린 용이 어른이 된 건지, 혹은 어린 용이 죽어 어른 용만 남았는지 따위의.

“마음 같아서는 이것들을 복원하고 조사해 보고 싶습니다만…… 그래선 안 되겠지요.”

저 유적이 괜히 만들어졌을 린 없으므로, 자세히 파보면 퀘스트가 나올 확률이 높다.

그러나 아크메이지의 말마따나, 메인 퀘스트가 좀더 중요하다. 내 컨셉이 막 호기심 넘치고 그랬다면 모를까 악마에 미친 컨셉이니만큼 더.

“마탑에 연락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나는 그쯤 되어서 바위에 붙히고 있던 엉덩이를 떼었다.

벽화에 집중한 두 사람과 산적들을 묶는 데 열중한 데브로 인해 덩그러니 방치된 사람들─산적에게 포로로 잡혔던─이 흠칫 몸들을 움츠렸다.

제대로 살펴보면 그중 일부는 타인을 부축하는 걸 넘어 누군갈 업고 있다. 축 늘어진 팔다리가 핏기 없는 게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보다 이것들은 어찌합니까?”

마침 산적들을 다 묶은 데브가 그것들을 툭툭 치며 물었다.

“설마 살려 줄 건…….”

“사람을 납치하고, 부려 먹고, 일부는 희롱하다 죽이기까지 했다. 당연히 사형이다.”

인퀴지터의 엄한 목소리에 산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제발 한 번만 살려 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퀴지터는 고집이 무척 센 이였고…….

“처음으로 봐줄 만한 말을 했습니다?”

데브도 이번엔 반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죽어라.”

피해자들이 보는 앞에서 가해자들의 목이 전부 떨어져 나갔다.

현대의 윤리관에는 이조차 피해자들에겐 폭력이지 않을까 싶었으나, 다행히 사람들 표정은 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들이 찢어 죽이고 싶어하는 표정마저 보였으니 원.

“여기 있는 놈들이 다가 아닙니다.”

심지어는 산적들이 전부 죽었을 때, 그런 말까지 했다.

“이놈들과 형제처럼 지내는 놈들이 저 너머 골짜기에 있습니다.”

안구의 실핏줄이 터졌는지 벌건 눈을 한 이였다. 죽은 남매─이목구비와 나이대가 비슷했다─의 시신을 껴안고 짓씹듯 단어를 토해 내는 게 보통 한이 아니었다. 혈육이 죽었다면 누군들 아니 그렇겠냐마는.

“처리하고 가지요.”

메이스로 사람 머리통을 죄다 으깬 인퀴지터가 튄 피를 닦으며 발언했다.

“저희가 이용한 가도는 여행객들이 종종 이용하는 길입니다.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아크메이지는 그 말에 찬성도 반대도 더하지 않았다. 이번 건에 대해선 뭘 하든 따라가겠단 표시일 테다.

“쓰레기 청소 좋지요. 길 안내는 제게 맡기십쇼.”

그나마 인퀴지터에게 시비 걸던 이마저 이번엔 완전한 긍정을 표하고 있으니 뭐. 나도 굳이 반대할 이유 없고.

대신 이번처럼 앞장은 서겠지만.

“이 산채는 더는 볼 일이 없으니 자네들이 쓰시게나. 식량이나 물건도 마찬가질세. 유적만 망가트리지 않으면 되네. 쉬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시게.”

“그, 그래도 될지…….”

“우리에겐 별 필요 없는 것들일세. 아니 그런가?”

가장 먼저 굴을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내 뒤로, 아크메이지가 사람들에게 제안을 던지고 우리에게 물음을 돌렸다. 당연히 상관 없었으므로 고개 하나 돌리지 않았다.

“저들끼리 남기고 가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까진 신경 써 줄 여유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요.”

“바닷사람이라도 산 하나 내려가는 걸 못 하겠습니까? 식량도 들려 줬는데.”

굴 밖으로 나가며 들은 대화는 다소 의외였다.

처음에 자비 없던 것치고 인퀴지터는 사람들의 안위를 제일 신경 썼고, 사람들을 살리고자 입을 털었던 주제에 데브는 의외로 냉정했다.

“자네 의외로 칼같군.”

“무고한 자의 누명을 벗겨 줄 순 있어도, 그들의 살길까지 책임질 순 없잖습니까요. 저들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명확히 나누어 돕는 게 가장 편합니다.”

엿들은 대화로부터 알 수 있는 건, 데브가 정말 명확한 선이 있는 사람이란 것이다. 저런 놈이 왜 이 여정에 따라왔는지는 아직도 미지수지만.

곧 유적의 끝이 보였다.

* * *

“드디어 산맥의 끝이군요.”

하루에 걸쳐 산에 있는 도적들을 죄다 털었을까. 우리는 드디어 산을 내려왔다.

멀리 해안가가 보였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니 마을도 있는가 보군.”

그뤼 텔츠가 바로 나오면 여한이 없겠으나, 그렇게 편안히 돌아가는 세계가 아니라서.

“거리를 보니 저 마을에서 하룻밤 신세 져야 할 것 같네.”

“후, 드디어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자겠군요.”

그뤼 텔츠까지 도착하려면 물자 보충을 위해서라도 다른 마을에 들를 필요가 있다. 식량이야 산적들에게 얻은 것이 있어 괜찮다치지만, 노숙으로 인한 피로는 별개였던 탓이다.

이제야 알았는데, 노숙만 연속으로 하면 피로도가 조금씩 누적됐다.

“어서 갑시다.”

우리는 서둘러 해안가에 발을 디뎠다.

“썩은 내…….”

“이 냄새는…….”

그러나 마을은커녕 해안가서부터 불길한 징조가 튀어나왔다. 드라우거와 비벼 볼 만한 악취가 올라왔다.

“문제가 있습니까?”

바다는 처음인지 인퀴지터만이 유일하게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냄새가 이상하다고 말을 할지언정, 이게 원래 바다 냄새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다 냄새를 아는 세 사람은 아니다. 나를 비롯해 데브와 아크메이지의 안색이 굳었다.

“고래라도 잡았다가 해변에 내장을 버렸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썩은 내가 진동하진 않을 텐데.”

“잘 모르겠군. 고래잡이는 동해에서 많이 이뤄질 터인데.”

“집단 폐사했다기엔 보이는 물고기들이 없고…….”

이거, 높은 확률로 퀘스트가 근처에 있을 것 같은데. 메인이든 사이드든, 조사해서 원인을 해결하는 류의 퀘스트가!

“아크메이지님?”

“아, 인퀴지터. 보통의 바다에선 이런 악취가 나지 않아서 의문이 들었을 뿐입니다.”

“아, 모든 바다가 이런 게 아닙니까?”

“예.”

“그럼 어째서……?”

“글쎄요. 저 마을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언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바닷사람들이 산까지 올라온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일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보다 인퀴지터, 혹 마기가 느껴지진 않습니까?”

아크메이지의 물음에 김치만두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제 감각엔 아직 걸리는 게 없습니다.”

“흐음.”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악마와 관련된 일은 아니려나. 그렇지만 소몬 때처럼 마기를 은폐하는 수도 있다. 모든 건 조사해 봐야 명확히 할 수 있다.

그리고, 악마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내 컨셉을 다소 환장하게 만들지.

“가보면 알겠지.”

“예?”

나는 말에게 신호를 주었다. 모래밭을 평보로 폭폭 걷던 말이 투레질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기사 나리는 정말 뒤가 없으십니까요!”

내가 뛰니 세 사람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대열이 순식간에 뒤바뀌며 두두두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우리를 발견한 듯, 마을 언저리에서 보이던 사람들이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겁먹겠네. 슬슬 내려서 다가가는게 어떤가?”

“겁먹는다고 말할 입이 사라지진 않겠지.”

“그렇지만 말할 생각은 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효율을 논하는 말이고, 거절할 이유 없는 제안이었다. 제 몸의 안위를 따지는 거라면 따를 필요 없으나, 이건 단서를 보다 쉽게 얻기 위한 과정이었으니까.

나는 혀를 차며 속도를 천천히 낮췄다.

“이미 겁은 먹을 대로 먹은 것 같습니다만.”

“마을 내까지 달려가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그건 그렇죠.”

마을 30m 밖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접근했다. 사람들 몇이 마을 한가운데 있는 게 보였다. 대부분의 이는 건물 안에 숨어 눈만 내놓고 있다.

“…….”

“이러다 칼 맞으면 다 나리 탓입니다.”

썩 좋지 않은 분위기에 인퀴지터가 굳은 얼굴을 하고, 데브가 그딴 농담이나 지껄였다. 그게 농담이냐며 인퀴지터가 흰눈을 하긴 했지만, 뭐.

그래도 반경 30m 안에 사람들이 몇 명이나 들어왔음에도 색적스킬이 반응하지 않는다. 대화 결과에 따라 또 달라지긴 하겠지만, 지금 상태론 딱히 적대할 것 같지 않다.

외려 다들 겁에 질린 얼굴인 게, 오히려 우리가 해끼칠 걸 걱정하는 듯 보이는데.

“잠깐, 저들은……?”

“앗.”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마을에 들어섰을까.

우리는 우연스럽게도─혹은 당연하게도 아는 면면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저, 저분들은……!”

“은인분들이시잖아……!”

어제 헤어졌던 그 양반들이다. 어떻게 산채를 벗어나 마을로 잘 돌아온 모양이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한데…… 이 마을엔 무슨 일로 오셨는지…….”

나는 그들이 꼬리처럼 달고 있는 이들을 보았다.

대부분 어린 자식, 형재자매였다. 고기잡이가 안 된다며 괜히 산까지 왔던 게 아니다. 저리 딸린 입이 많아서야 고기잡이가 안 되면 산까지 올 수밖에 없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때, 해변가에서 누군가가 탁탁 달려왔다.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는지 머리카락과 옷이 젖어 있었다.

“촌장님!”

“저흴 도와주신 분이 오셨어요.”

“저분들이 우릴 구해 준 그 사람들이오. 식량까지 넘겨주신 그분들.”

“치료도 해주셨어.”

그녀는 주민들의 말을 듣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을을 대표하는 이로서 감사드립니다.”

촌장은 바로 허리를 굽히며 이야기 많이 들었노라, 한데 이곳은 어찌 오셨느냐 따위를 이야기했다. 아직 젋어 보이는데 촌장 직위를 맡은 것이 저런 눈치 빠르고 적절한 처사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그녀의 말은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되 예의를 갖춰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이어졌다.

“도시로 향하는 길, 하루 머물 수 있나 하고 찾아온 것뿐일세.”

“그러셨습니까. 잘 찾아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은혜 갚을 길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차였습니다.”

뭐, 저런 이를 상대해야 할 건 내가 아니니까. 나는 아크메이지가 교섭하는 동안 주변을 보았다. 내가 두른 서늘한 분위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내 시선을 슬금슬금 피했다.

그중에는 상복을 연상시키는, 검은 옷의 사람들도 있었다.

“바다가 미쳤다더니, 보통 일은 아닌가 봅니다.”

내가 그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자니, 마을을 둘러본 데브가 뇌까렸다.

나는 사람들이 깡말랐다는 것과 생선 비린내가 심하다는 것밖에 모르겠는데, 그는 뭔가 더 알아낸 듯하다.

“이 지방에서 심상치 않은 소문이 돈다더만, 그와 관련된 걸까요?”

나도 몰라. 근데 게이머 직감은 거의 100%라고 외치긴 한다.

“이보게. 듣기론 바다가 이상해져서 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됐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오면서 바다 냄새가 내가 아는 것과 썩 다르던 말이지.”

마침 아크메이지와 촌장의 대화도 그부분으로 넘어갔다. 내게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조잘대던 데브도 입을 꾹 다물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는가?”

“들려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어찌 물으시는지…….”

“우리가 찾는 사건과 연관되어 있을까 싶어서네.”

“그거라면…… 예. 가능합니다. 하나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터인데, 제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나는 상관없네만.”

“저도 상관없습니다.”

“저 또한 괜찮습니다.”

데브와 인퀴지터가 동의하고, 마지막으로 일행의 눈길이 내게 닿았다.

이땐 어떤 반응이 좋을까. 나는 조금 생각한 끝에 미간을 종이 구기듯 구겼다.

“눈알 뽑히고 싶나?”

사나운 대답에 세 사람이 바로 시선을 치웠다.

“간다는군.”

“언제부터 눈알 뽑히고 싶냐는 협박이 긍정이 됐습니까……?”

“안 간다곤 안 했잖나.”

“간다고도 안 했습니다?”

데브와 인퀴지터가 내 반응을 두고 조금 술렁술렁했으나 아크메이지는 태연했다.

확실하다. 저 양반 이제 나 다루는 법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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