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화. 혼란
같은 시각, 작은 탱크처럼 달려드는 국방색 지프를 보고 카오는 무의식적으로 장목화, 성건우에게 또 한 번 강제 입면 능력을 쓰려다 본능을 억눌렀다. 운전자가 잠든다 해도 지프의 속도는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카오의 물질 간섭 능력은 아직 이렇게 빠른 속도의 차를 막을 수 있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카오는 브레이크에 얹은 발을 떼고 액셀을 밟아 측 전방으로 핸들을 꺾었다. 이로 인해 더 이상 아비아를 특정할 순 없지만, 어쨌든 국방색 지프의 질주에선 벗어나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뒤이어 카오는 전의 강제 입면 능력을 거두고, 다시 이 구역을 수마에 빠트리려 했다. 지프를 모는 장목화를 재차 잠들게 해, 핸들을 꺾어 더 이상 자신을 못 쫓아오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 틈에 두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역시 강제 입면에서 깨어나게 되겠지만 카오는 크게 걱정이 없었다. 잠은 지속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카오가 계속 이 효과를 유지해오고 있던 건 혹여나 뜻밖의 상황이 벌어질까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지금 그 능력을 해제한 뒤 곧장 다시 발휘하면 1, 2초밖에 안 되는 틈에 누군가 깨어나 상황을 다 파악하고 반격할 순 없을 터였다.
바로 그때였다. 질주하는 지프의 한쪽 창문으로 성건우가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내밀었다.
다다다다다-!
그는 조준도 하지 않고 아비아의 고전적인 저택을 향해 마구 난사했다.
유리창들이 하나둘씩 깨지고, 그 소리에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애앵! 애앵!
고막을 찌를 듯 자극적인 소리가 이 근방에 잠든 대부분을 깨울 듯했다.
‘미쳤나?’
카오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러면 칸나뿐 아니라 가상 세계의 주인도 깨어날 터였다. 어쩌면 양측의 주요 목표인 아비아 역시 깨어날지 몰랐다.
그럼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심지어는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아비아는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목화에게도 성건우의 행동은 뜻밖이었다.
구조팀의 대비책이라면, 이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 성건우는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수종이의 쉬 소리를 재생해야 했다.
쉬 소리에 구조팀은 급한 요의의 힘으로 졸음에 저항할 수 있었다.
이 소리의 위력은 거리에 따라 줄어들고,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에는 딱히 효과가 없었다. 상대가 요의를 느끼기까진 1, 2분 정도는 필요했으며, 급한 요의로 잠에 저항하게 하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이 구역 안에 잠든 이들은 장목화가 바랐던 순서대로 잠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었다.
맨 처음으로는 구조팀 동료들, 수십 초 후엔 아비아의 저택 대문을 지키는 경호원들, 그로부터 2, 30초 후에는 방 안에서 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일반인들이 정신을 차릴 것이었다.
다음으론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진 기원의 바다 급 각성자들이 깨어날 것이고, 칸나와 가상 세계 주인은 몇 분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터였다.
구조팀은 이 시간 차를 이용해 실제적인 꿈 제작자를 놀라게 하거나 쫓아내고, 그 후엔 칸나의 도움을 받아 가상 세계의 주인에 맞설 계획이었다.
어떻게 쫓을지도 이미 다 계획했다. 특히 상대처럼 사정 범위에 들어온 적을 처리하는 난도는 훨씬 낮았다.
급한 요의를 이용해 깨어난 이후, 군용 외골격 장치의 정조준 시스템이나 자동 사격 모드로 목표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는 상대를 명중시키진 못하더라도 놀라 달아나게 만들 순 있었다.
그동안 성건우가 맹목의 고리까지 꺼내 상대의 시야를 막아버리면, 상대는 더더욱 긴장하고 당황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성건우는 그 어떤 계획에도 따르지 않았다. 뜬금없이 저택을 난사하며 경보를 울렸다.
성건우도 자신을 빤히 보는 장목화의 시선을 느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발작했어요.”
“⋯⋯.”
장목화는 성건우의 대가 역시 대가임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지금껏 그가 보인 인격 분열이나 발작은 꼭 네 번째 능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특정 각성자에 대항하기에 톡톡한 도움이 됐다.
그러나 아무리 유용한 대가라도 대가는 대가였다.
한편, 아비아의 별장 2층, 고막을 자극하는 경보음 속에 꼭 감긴 칸나와 노부인의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레드울프 구역, 원로원.
시각을 박탈당한 베울리스는 분노의 고함을 치며 뒤쪽으로 뛰었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그가 아직 착지하기 전, 감찰관 알렉산더가 묵직한 목소리로 외쳤다.
“청각 박탈!”
무심병에 걸린 베울리스는 이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상황에 처했다. 어둡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작은 방에 갇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하!”
베울리스는 비틀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주위의 원로들과 경호원들 역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심지어는 감찰관 알렉산더 역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흐흐흑⋯⋯.”
눈 깜짝할 사이 베울리스는 또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원래 웃고 있던 주위 사람들 역시 함께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 웃고 또 울었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고, 감정의 소용돌이로 인해 본인들 능력도, 무기도 사용하지 못했다.
그때, 도시 방위군을 막 돌파하려던 주민들은 근처 비탈길에서 날아온 시커먼 오토바이 한 대를 목격했다.
끽-
미끄러지듯 방향을 튼 오토바이는 주민과 아류인 호위대 사이를 막았다.
회색 가운을 입은 잔나가였다.
그는 곧 한 손을 가슴 앞에 세우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시주님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평화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화, 잔나가는 이 말로 집회에 참석한 주민들과 아류인 호위대에게 대대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육도윤회!
순간 광장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주민들과 치안관을 제외한 나머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혹은 불에 타는 듯한 고통에 다들 의식을 잃거나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자신이 하려던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라디오에서는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폭력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모두의 조건을 충족할 방법은 오직 협상뿐입니다. 원로들을 믿어주십시오. 우리는 기생충 같은 자들을 축출하고 주민들 생활 개선에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지직- 지직-
방송은 불량 전자 설비로 전달되는 듯 소음을 냈지만, 방송을 들은 수많은 주민은 안정을 찾고 잠잠해졌다.
그러던 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 톤이 갑자기 바뀌었다.
- 아니다⋯⋯.
그 소리엔 가만히 앉아 즐기는 듯한 만족감과 통쾌함이 어려 있었다.
- 아니다⋯⋯.
소리는 주민들 머릿속에 울려 퍼지며 전의 말을 부정했다.
이후 그들은 엷은 향기를 맡았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냄새를 맡은 주민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파괴 욕망과 방종에 대한 갈구가 온몸과 마음을 점령하고 있었다.
주민들과 아류인 호위대 사이에 자리한 잔나가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도처에 흐르는 피, 질서의 붕괴, 높은 곳으로 향하는 누군가의 인영.
결코 좋지 않아 보이는 결과였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잔나가가 낮게 염불을 외웠다.
자리에 꼿꼿하게 선 그는 아무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1분도 안 되어 원로원 구역에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여럿이 더 몰려들었다. 상황은 더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원로원 내부의 귀족과 경호원들은 베울리스를 따라 웃고 울기를 반복하며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로원 안팎이 마치 두 개의 세계로 분리된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들 중 딱 한 명만은 달랐다.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회색 드레스 차림의 여자, 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하고 있던 갈루란이었다.
갈루란은 그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 꼭 베울리스가 깜빡하고 그녀를 빼놓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현재 그녀는 그 무시무시한 고등 무심자에 저항하며 아버지 알렉산더가 능력의 효과에서 벗어나도록 돕기는커녕, 의식의 파동을 거두며 희망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름 온전한 편인 유리창 너머, 바깥 베란다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에 점철된 표정의 아류인 몇몇이 보였다.
그중엔 원래부터 튀어나온 눈이 당장 터질 듯 보이는 이도 있고, 뭔가에 저항 중인 듯 푸른 피부 위로 낟알 같은 혹들이 튀어나온 이도 있었다.
갈루란은 그보다 더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래쪽의 수많은 이들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더러는 입가로 흐르는 피와 함께 위태롭게 헐떡거리며 경련했고, 더러는 총알에 맞은 상황에도 아직 죽지 않고 극심한 고통 속에 신음 중이었다.
또 더러는 썩어 문드러진 피부 위에 거대하고 끔찍한 상처가 나 있기도 했고, 더러는 수많은 장침에 찔리고 있는 듯 힘겨워했으며, 이 한여름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동사할 듯 하얗게 질린 입술을 드러낸 이도 있었다.
하나같이 비참한 상태였다. 그런 이들이 수십, 수백이나 있는 광경은 정말이지 보통 사람은 잠시도 보고 있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이 순간 갈루란은 수많은 주민의 죽음을, 그 가족들의 슬픔을, 부모를 잃고 노예로 팔려 갈 아이들을 보았다.
그때 귀족들은 여전히 장원에서 휴가를 즐기고, 연회를 열고, 죽어간 주민들 대신 생산을 맡을 외부 유랑자들을 도시 안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를 기쁘게 토론할 것이었다.
갈루란은 눈을 감았다. 눈앞에 한 인영이 떠올랐다. 그녀와 똑같이 생긴, 그렇지만 조금 더 앳돼 보이는 소녀였다.
소녀는 갈루란이 심령의 복도에 진입하려 했을 때 황금 엘리베이터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최후의 장애물이었다.
과거의 그녀였다.
갈루란은 이미 성격을 뭇별에, 도에 대가로 바친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건, 과거의 그녀가 다 사라져 버린 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건 어머니가 남긴 그림자이기도 했다.
몇 해 전 죽음을 맞은 어머니는 지난 십수 년간 갈루란의 관점과 성격을 만들어낸 중요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하류층 주민을 진심으로 가련히 여길 줄 알았다. 갈루란의 외할아버지가 군공을 세워 바닥에서 귀족까지 오른 장군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골든애플에 들어온 건 성인이 된 후의 일이었다.
내내 발버둥 치고, 고통에 잠겼다가, 포기하고, 표류하던 갈루란은 꼭 대가를 치르고 능력을 얻어 집을 떠났을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 * *
애앵! 애앵!
고막을 찢을 듯 자극적인 경보음 속, 카오는 차 안에서 미간을 구겼다.
그래도 경험이 풍부한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인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와 수준이 같은 두 적에게 집중했다.
생명 천사 목걸이로는 한 번에 한 명의 심장만 마비시킬 수 있었다. 이걸론 잠재된 위험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으니 다른 도구가 나을 듯했다.
카오는 왼손에 총 여섯 알로 이뤄진 갈색 염주를 쥐었다.
이내 그가 한 구슬을 가볍게 굴리며 외쳤다.
“청각 박탈!”
구슬이 순간 청록색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구조팀을 비롯한 모두가 아무것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잠든 사람 모두를 놀라게 한 경보음은 그들 귓가에서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