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화. 유비무환
그 사이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 성건우는 주위가 가볍고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꼭 수면 위로 떠오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구조팀 일행은 노부인이 아비아를 보호 중인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일 수 있겠다고 의심했다.
곧 큰 전투가 발발하리라는 생각으로 지프 밖에서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 중이던 용여홍은 이 광경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리는 이미 거울 교파 안에 진입해 있었던 건가요? 저 가상 세계의 주인은 회사 사람일까요?”
‘그래서 칸나와 저렇게 즐겁게 얘기하며 가상 세계 능력도 거둬버렸나?’
장목화는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저 사람 좀 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로 친구를 사귀었어.”
그녀는 칸나가 전에 했던 말에 근거해, 지금의 상황이 모종의 능력에 의한 결과임을 직감했다.
곧 성건우는 부럽다는 얼굴로 답했다.
“이해는 잘 안 되지만 아주 강력한 것 같긴 하네요.”
같은 시각, 앉은 자세를 바꾼 칸나는 그 틈을 타 몰래 엄지를 들었다.
구조팀은 순간 긴장감에 휩싸였다. 이제 이들이 나설 차례였다.
지체할 시간 따위 없다는 듯 곧장 차에서 내린 장목화는 맞은편에서 외부 공간을 이용해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용여홍과 백새벽을 돌아봤다.
“너희는 여기 남아 지원해줘. 전투 준비 단단히 하고 있어.”
그러나 백새벽은 자원하려는 듯 바로 입을 열었다.
“전⋯⋯.”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아비아를 만나고 호감을 쌓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충돌은 안 돼. 너희는 군용 외골격 장치를 입었잖아, 압박이 너무 세니까 호감을 사지 못할 게 분명해. 무엇보다 뜻밖의 상황에도 대비하고 있어야지. 너희가 밖에 남아 있어줘.”
장목화가 차분히 백새벽을 설득했다.
아비아와의 접촉 시도는 반고 바이오의 지시일 뿐만 아니라 구조팀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커스 모친이 남긴 말에 따르면 아비아에겐 상당히 위험한 물건이 있는 듯했다.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없으니 오레이의 유산에 대해 평화롭게 얘기하며, 그런 쪽으로 합작할 수 있을지 살피는 게 훨씬 나았다.
게다가 새장에 갇힌 카나리아 같은 아비아의 처지로 볼 때, 장목화는 그녀가 자신들의 합작 제안에 응할 가능성도 낮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럼 군용 외골격 장치를 벗겠다고 말하려던 백새벽은 잠깐의 고민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실랑이를 이어가서는 칸나가 겨우 벌어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밖에 안 될 것 같았다.
“알겠어요.”
백새벽과 용여홍이 아직 채우지 못한 금속 버클을 계속해서 채우는 사이, 성건우와 장목화는 라운드힐 스트리트 14호로 향했다.
두 사람의 허리에 무장 벨트가 채워져 있었지만 권총을 뽑아 들진 않았다. 텅 빈 두 손으로 호의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 * *
아비아의 고풍스러운 저택 대문엔 완전 무장 한 경호원 여럿이 자리해 있었다. 그들은 즉각 장목화와 성건우를 응시하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용여홍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조금 전 칸나가 라운드힐 스트리트 14호에 접근했을 땐 경호원들은 아무 반응도 없었었다.
아니, 아무 반응이 없던 게 아니라 오히려 성심껏 길을 내주며 문까지 열어주었다. 마치 진정한 주인을 맞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시 한번 칸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이내 각성자 성건우도 경호원들이 따로 묻기 전에 먼저 나섰다.
“좋은 아침! 나부터 간단히 소개할게. 우린 방금 들어간 그 사람의 동료야. 우린 중무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잖아. 그러니까⋯⋯.”
성건우는 일부러 칸나가 만들어낸 우호적인 환경에 기반해 추리 광대 능력을 발휘했다.
여지없이 경호원들은 크게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아! 아비아 부인을 만나러 오셨습니까? 부인은 목욕탕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장목화는 순간 웃고 싶어졌다.
‘목욕탕이라. 과연 목욕을 너무나 사랑해 저택 절반을 목욕탕으로 개조한 귀족답네.’
마침내 장목화, 성건우는 대문을 통과해 돌기둥들로 떠받쳐진 고전적인 저택 안에 들어섰다.
장목화는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진짜로 우호적인 방문객인 것처럼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그녀가 성건우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이런 돌기둥은 총 세 가지 스타일로 나뉜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인 구세계 고대에서 기인하는⋯⋯.”
“이런 건물은 모기를 더 끌어들이지 않을까요?”
성건우가 기둥과 벽을 타고 오르는 푸른 담쟁이덩굴을 보다 말했다.
“…….”
장목화는 그냥 설명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비아의 집사를 만나 적당한 한담을 나눈 장목화, 성건우는 상대의 안내에 따라 목욕탕 응접실 밖에 이르렀다.
똑똑똑-
중년의 신사로 보이는 집사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누구?”
약간 서늘한 아비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인⋯⋯.”
성건우는 집사보다 먼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추리 광대의 조건을 읊었다.
아비아의 목욕탕 응접실은 일반적인 응접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펫이 깔려 있고, 티테이블이 있고, 소파가 있고, 다기가 있고, 장식품이 있는, 귀족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공간이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방의 옆문이 각종 욕조와 사우나가 딸린 목욕탕으로 통한다는 것이었다.
아비아는 지금 평범한 옷이 아닌 하얀 목욕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약간 구불거리는 긴 금색 머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으며, 방금 막 욕조에서 나온 듯한 모습에서는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이 느껴졌다.
약간 코가 큰 편인 이 고전적인 미인은 장목화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일단 목욕부터 할까? 뭐든 목욕할 때 얘기하는 게 효과적이잖아.”
“그건 좀 불편할 것 같은데요⋯⋯.”
성건우가 부끄러워했다.
그 사이 장목화는 전에 들었던 소문 하나를 떠올렸다.
마커스보다 몇 살이 더 많은 아비아는 이른 결혼과 출산을 숭상하는 애쉬랜드에서 여태까지도 확실한 반려자를 두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아비아는 미소를 지으며 성건우에게 대꾸했다.
“그럼 넌 다른 욕조에 있어. 정말 무슨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때 가까이 오고. 우리도 미리 수영복 입고 있을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난 골드코스트 사람들이 그렇게 부럽더라? 모래사장에서 햇볕을 쬐며 삶을 즐길 수 있잖아.”
현재 애쉬랜드는 기본적인 질서를 어느 정도 회복한 상태긴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굶주림과 건강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야외에서의 생활도 여전히 매우 위험해서 관광업을 재개할 만한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
장목화는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뭔지 기억해?”
고개를 끄덕이던 성건우는 목욕가운 차림의 아비아 앞으로 다가갔다.
상대의 옅은 파란색 눈동자를 응시하던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화장실이 어디인가요? 똥이 마려워서요.”
입술을 살짝 벌린 건 아비아뿐만이 아니었다. 장목화도 그랬다. 장목화로서도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성건우는 아비아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덧붙였다.
“없다면 여기서 싸는 수밖에 없겠네요. 최근에 한동안 막혀 있어서 피가 날지도 모릅니다.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순간 장목화는 손을 들어 자신의 코를 막았다.
성건우가 뭘 하려는지 대충은 이해할 수는 있었다. 이 역시 그들이 전에 상의한 방안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하지만 왜 굳이 이렇게 더러운 방법을 써야 하는 건데!’
성건우는 이미 허리춤의 무장 벨트를 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눈앞에 있던 아비아와 목욕탕 응접실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마치 비누 거품이 터지듯 단숨에 자취를 감췄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아직 지프 안에 있었다.
아직 버클을 다 채우지 못한 용여홍, 백새벽은 밖에서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채로 차에 기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실제적인 꿈!
구조팀이 또 한 번 실제적인 꿈을 맞닥뜨린 것이었다.
현재 퍼스트 시티 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중 특수한 임무를 맡은 몇몇을 제하곤 나머지는 원로원을 향해 달려간 상황이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전에 구조팀을 저격하며 완전히 다 처치할 뻔했으나 수종이 능력에 놀라 도망쳤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의 배후 비밀 조직은 구세계 파괴 원인에 관한 단서 제거를 주 임무로 삼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퍼스트 시티 정세에 간섭하는 것보다 아비아라는 주요한 비밀을 장악하고 있는 존재를 제거하는 게 더 우선이었다.
그러나 구조팀도 이 점을 미리 생각해뒀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에 대처할 방안도 세워둔 상태였다.
상대가 피비린내를 두려워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착안한 방법이었다.
바로 아비아를 만나거나 아비아를 보고 있는 동안 일부러 상처를 내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꿈을 꾸던 중이라도 상대는 피비린내에 대한 두려움에 능력을 거둘 가능성이 컸다.
여러 차례 가위바위보를 거친 끝에 이 임무를 맡은 건 성건우였다.
‘근데 상처 내려고 그런 더러운 말들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장목화는 아까 전 하마터면 구역질까지 할 뻔했었다.
지금 상황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실제적인 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확실히 피비린내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듯했다. 또한 그가 싫어하는 냄새가 꼭 이것뿐이란 보장도 없었다.
피비린내에 대한 혐오는 뭇별 홀이나 기원의 바다 급 수준의 대가에 가까워 보였다. 각성자가 심령의 복도에 진입했다면 상응하는 대가 역시 더 심해졌을 테니, 싫어하는 냄새의 종류도 더 많아졌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막 잠에서 깨어난 장목화, 성건우는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또 한 번 눈을 감았다.
강제 입면!
이번에 그들은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
몇 차례 교전 끝에 이미 구조팀의 모든 수단을 파악한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카오는 여러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
이제 그가 두려워할 건 부근에 있을지 모르는 꼬마 수종이뿐이었다.
* * *
레드울프 구역, 원로원.
아류인 호위대는 갑자기 저격 능력을 잃었지만 공황에 빠지진 않았다. 그들이 받은 훈련 중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를 직면하는 과정도 있었다.
중요한 순간, 푸른빛 피부의 몇몇 개구리인들이 입을 쩍 벌렸다.
벌어진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전방의 도시 방위군은 물론 집회에 참석한 주민들도 마치 바람에 휩쓸린 풀처럼 분분히 쓰러졌다.
저주파 공격!
이것은 개구리인의 변이 능력이었다.
동시에 다른 아류인들도 사격을 포기하고 천부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독을 분사하는 이, 졸음을 유발하는 소리를 내는 이, 또 상의를 벗어 목격자의 현기증을 일으키는 피부 문양을 드러낸 이도 있었다.
그들이 원로원에 들어오려는 주민들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이때, 안쪽의 귀족들은 갑자기 무심병에 걸린 집정관 베울리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혼탁해진 파란 눈동자의 주시 아래 감찰관 알렉산더를 포함한 이들의 생각은 자연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잠시도 집중하기가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