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41화 (441/649)

441화. 믿음

장목화는 곧장 답하는 대신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환경을 관찰했다. 곧이어 그녀의 시선은 1번 부두 어느 가로등 앞에 멈췄다.

거기엔 방송 설비가 설치돼 있었다. 평소 상황을 통지하고 하역을 지휘할 때 쓰는 모양이었다. 사실 항구라면 어디든 이런 설비가 존재했다.

장목화가 입을 열기도 전, 성건우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

“노래를 들려주죠. 정 안 되겠으면 한 번 더 들려주고요.”

용여홍은 순간 눈썹을 꿈틀거렸다.

‘부두에 있는 사람들을 죄다 화장실로 보내자는 거야? 부두 밖은 레드리버야. 저 자리에서 바로 볼일을 볼 수도 있다고.’

그도 성건우가 진지하게 제안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제안이라 불러주기에도 허점이 너무 많았다. 그냥 성건우는 방송 시설로 노래를 트는 걸 워낙 좋아하니 한마디 해본 것일 터였다.

그때, 장목화가 바로 게네바를 돌아보았다.

“겐, 시스템에 침입해 저쪽에 있는 스피커 몇 개만 장악해 봐.”

“그래.”

게네바는 곧장 가장 가까운, 스피커가 달린 가로등으로 달려갔다.

한명호와 정도연은 혼란에 빠졌다. 구조팀이 대체 뭘 어쩌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노래를 틀다니, 방송을 하겠다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하지만 침착한 성격의 두 사람은 의문을 표하는 대신 상황만 관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네바가 1번 부두의 스피커 몇 개를 장악하자 성건우는 그 옆으로 다가가 휴대용 녹음기를 꺼낸 후 회로에 연결했다.

장목화는 서서히 시선을 돌려 한명호, 정도연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귀를 막아.”

* * *

1번 부두.

고든을 비롯한 모두가 오늘 밤 첫 번째 사업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지직-

그때 갑자기 부근의 가로등에 달린 몇몇 스피커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지휘를 맡은 고든은 가득한 경계심을 안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있는 일에 이게 점점 어떤 상황으로 발전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항구 방송 시스템에 고장이 난 것이길 빌었다. 지휘실에 몰래 숨어든 어떤 도둑이 관련 지식이 부족한 탓에 뭔가를 잘못 건드려 사고를 일으킨 것인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경계를 풀지 않은 고든은 곧장 부하들 몇몇을 시켜 사람들을 재촉시키는 한편, 부두의 물자를 옮긴 뒤 기습에 대비토록 했다.

다음 순간, 고요한 어둠 속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러니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잘 모르는 걸 마주했을 때는 겸허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청해야 합니다. 경험으로 형성된 견해를 내려놓아야 하고, 처음부터 거부감을 품는 대신 포용적인 자세로 학습하고, 이해하고, 파악하고, 받아들이려 해야 합니다.

매력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모든 밀수꾼의 귀를 파고들었다.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고든을 비롯한 모두가 각자 위치로 돌아가 적들의 출현에 대비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기습은 없었다. 방송으로 울려 퍼지던 남자의 목소리도 2번 정도만 반복된 뒤 사라졌다. 적막도 어느새 제자리를 찾았다.

고든을 포함한 이들은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돌아보기만 했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짐이 많지 않았다면 곧장 부두에서 철수해 이 기이한 일에서 멀어지려 했겠지만, 이 일을 끝내면 손에 들어올 돈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계속해! 얼른!”

몸을 숨긴 곳에서 나온 고든이 부하들을 재촉했다.

그의 지시가 떨어진 그때, 차 두 대가 앞뒤로 나란히 다가왔다.

녹회색 지프와 짙은 검은색 SUV였다.

SUV 안의 한명호, 정도연은 터질 듯한 심장을 다독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준비도 안 됐는데 1번 부두로 냅다 달려온 것이 매우 불안했다.

자신감이라곤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전체적인 상황이 전부 너무나 위태롭게 느껴질 뿐이었다.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고든은 기관단총을 쳐든 채 부하들에게 적습에 대응하라고 외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지프 안의 누군가가 확성기에 대고 그보다 앞서 크게 외쳤다.

“친구다!”

‘그래, 친구지.’

고든은 어떠한 거부감도 없이 그 말을 믿었다.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두 차량은 차례로 1번 부두에 진입했다. 구조팀은 매우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며 무기까지 거둬들였다.

성건우는 제일 먼저 차창 밖으로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오늘 거래는 순조롭게 잘 되고 있어?”

고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나름 괜찮아.”

친구라면 경계 따위 할 필요 없었다.

성건우는 부두의 배를 가리키며 물었다.

“우리도 같이 태워서 강을 건너게 해준다고 했지?”

“하하,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 들어가.”

고든이 문을 가리켰고, 부하들까지도 성건우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두 차량은 앞뒤로 서서 드디어 배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에는 이미 적잖은 나무상자가 쌓여있었지만, 차가 들어설 공간은 충분했다.

이러한 전개에 한명호와 정도연의 눈이 다 휘둥그레졌다.

둘 다 각성자 능력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말도 안 되고, 이렇게까지 과장되고, 이렇게까지 무시무시한 능력은 처음이었다.

한명호와 정도연이 구조팀과 처음부터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이곳 밀수꾼들과 아는 사이인 모양이라고, 심지어는 전에 합작한 적이 있어 협조를 구한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방송을 했을 뿐인데 그걸 들은 모두가 우리를 도우려 하다니!’

가까스로 안정을 찾은 한명호는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차를 몰아, 문 근처에 정차했다.

그가 보기엔 이건 초능력의 범주를 아예 벗어나 있었다. 구세계가 남긴 모종의 신화에 가까운 일이었다.

두 사람은 곧 구조팀을 한층 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한명호는 이들이 레드스톤 마켓에 있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잠시 후, 짐 운반이 끝나고 배 밖으로 뻗은 다리가 걷히고 문이 닫혔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1번 부두를 떠난 배는 레드리버 맞은편 기슭으로 향했다.

이동 중 순찰하던 퍼스트 시티 수상 경비대와 만나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저 배를 스치기만 하며 크게 외쳤다.

“당분간 미룰 수 있는 거래는 최대한 미뤄. 요즘 정세가 약간 긴장돼서 상부에서 수시로 사람을 보내 검사하고 감독 중이야!”

화물선 선주는 알겠다고 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상류 쪽으로 나아가던 배에서 비스듬히 떨어진 전방에 구릉과 작은 산으로 반쯤 둘러싸인 부두가 하나 나타났다.

부두는 횃불 여러 개와 몇몇 전등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그곳엔 차 여러 대와 수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는 그쪽으로 다가가 예정된 위치에 정박했다.

이내 배의 복부에 난 문이 재차 열리며 문밖으로 나무다리가 뻗어졌다.

갑판 선주와 부두의 밀수꾼은 별 탈 없이 끝나가는 거래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웅-

갑자기 거친 소리와 함께 녹회색 지프 한 대와 짙은 검은색 SUV 한 대가 나는 듯 빠르게 튀어나와 구릉을 향해 돌진했다.

멈추지도,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장애물들을 모조리 들이받은 두 차량은 구릉과 작은 산 사이에 난 길을 미친 듯이 내달렸다.

탕! 탕! 탕! 다다다-!

몇 초 후에야 정신을 차린 밀수꾼들은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지만, 두 차량은 이미 한참 멀어진 뒤였다.

총성이 채 가시기도 전, 차 두 대는 어둠 깊은 곳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쏴아아-

쏟아지는 빗방울이 땅을 때리며 하얗고 빽빽한 물안개를 일으켰다.

새카만 흙은 진창이 됐고, 움푹 팬 곳엔 이미 물이 가득 고였다.

얼마나 오래 버려져 있었는지 모를 집 사이론, 낡아빠진 미니밴 한 대가 비틀비틀 나아가고 있었다.

“제기랄, 곧 길도 안 보이게 생겼네!”

미니밴 운전대를 잡은 셀마는 전방을 응시하며 핸들을 가볍게 때렸다.

와이퍼는 온 힘을 다하고 있었지만, 유리창 밖의 광경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1초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자 조수석의 산드로가 제안했다.

“적당한 곳을 찾아 비를 피할까? 불모지의 날씨가 극단적이란 걸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은 아직 여름이야.”

이들은 불모지에서 삶을 일구는 유적 사냥꾼 네 명으로 이뤄진 팀이었다. 이들은 수시로 이곳을 드나들었던지라 사실 이런 상황이 꽤 익숙했다.

“그래. 오늘 밤에는 강변에 도착해 내일 아침까지 도시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셀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북안 불모지에선 아무리 거칠게 운전해도 차 사고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 인구수와 차량 밀도로 볼 때 아무리 큰 비가 퍼부어 시야를 가린다 해도 다른 차와 충돌할 가능성은 극히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급 사냥꾼인 셀마는 조심할 게 꼭 그것만은 아니란 걸 알았다. 이렇게 극단적인 날씨라면, 북안 불모지는 그 자체로 문제였다.

언제 갑자기 앞쪽 지면이 무너져 내릴지 몰랐고, 전방의 저 물웅덩이가 얼마나 깊은지도 알 수 없었다.

폭우가 퍼부을 땐 앞으로 가던 차가 갑자기 사라지고, 안에 탑승한 모두는 구세계 파이프 안, 혹은 묻혀있던 과거의 강에 빠져 익사할 수도 있었다.

거기다 산사태 같은 자연재해에도 주의해야 했다.

셀마는 전조등에 의지해 힘겹게 주위의 상황을 살폈다.

이곳은 구세계의 교외였지만, 당시 레드리버 구역에서 일정 부를 축적한 이들은 종종 이런 곳에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을 짓고 사는 것을 좋아했기에 건물이 적잖게 있었다.

건물 중 일부는 이미 무너져 있었으나 또 일부는 뱀 같은 녹색 덩굴로 뒤덮여만 있을 뿐, 나름 잘 보존된 상태였다.

어둑한 하늘 아래, 미친 듯한 비바람 속의 나무와 잡초, 집까지 모두 다 어딘가 으스스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도 셀마는 기억에 의지해 비교적 높은 지대로 차를 몰았다.

이동 중에도 계속해서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았다. 언제까지나 차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에너지만 소모될 테고, 현재 남은 휘발유는 한 통밖에 없었다.

경험이 풍부한 유적 사냥꾼인 셀마와 산드로 팀은 비를 피할 곳을 멋대로 택해선 안 된다는 걸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다.

구세계가 남긴 이런 건물들은 겉보기엔 멀쩡해 앞으로 몇 년은 더 꼿꼿할 것처럼 보여도 그중 일부는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이런 세찬 비바람 속에서는 몇 시간 만에 폭삭 주저앉을지도 몰랐다.

비바람을 피할 공간을 찾았다는 생각에 마음을 막 놓은 순간, 벽돌과 목재, 진흙 속에 산 채로 파묻혀 죽은 유적 사냥꾼도 셀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건물들을 훑으며 지나치던 그때, 산드로가 이 주위에서 가장 높은 지대를 가리켰다.

“저 집 괜찮을 것 같은데? 지대도 높고, 망가진 곳도 없잖아. 뭐, 큰 반점 모기가 숨어있기 좋아하는 덩굴이 잔뜩 뒤덮여 있긴 한데.”

“우리 모기 기피제 있어!”

뒷좌석의 데니스가 웃으며 대꾸했다.

이에 빠르게 의견을 통일한 팀은 먹먹한 하늘 아래 쏟아지는 비바람을 맞으며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한 집 뒤로 차를 몰았다.

진창이 된 길에 차는 크게 덜컹거렸다. 아직 깊은 웅덩이가 형성되지 않아 우회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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