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진보
한참이 지나도 용여홍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장목화가 웃었다.
“진정해, 그렇게 급할 건 없잖아. 천천히 생각해도 돼.”
용여홍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료 중 누구도 그를 채근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성건우조차 멍하게 길가의 광경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초조한 상태에서 벗어난 용여홍은 이미 파악하고 있는 정보들부터 떠올리기 시작했다.
‘명호는 심장에 생긴 문제 때문에 이식받을 적합한 장기를 찾고 있었어. 이전까지는 안타나 스트리트라는 암시장 근처에서 살았지.
그래, 암시장은 인체 장기를 얻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잖아.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쉬이 거처를 옮기려 하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레드울프 구역으로 이주를 하기에는 돈이 훨씬 더 많이 들어.’
어렴풋하게나마 추적 방향을 잡은 용여홍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명호는 분명 무슨 일을 하러 여기 왔을 거예요. 안타나 스트리트와 여기랑 그렇게 가까운 곳이 아니거든요. 걸어서 이동하면 30분은 걸려요. 그래요, 명호에겐 차가 있을 거예요. 분명 차로 이동했을 거예요. 차를 가지고 왔다면 분명 최대한 가까운 곳에 차를 세워뒀겠죠.”
갈수록 용여홍은 유창하게 말을 이어갔다. 심지어는 생각보다 말이 더 먼저 튀어나올 정도였다.
이때 장목화가 웃으며 작은 실수를 지적했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차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면 조금 먼 곳에라도 주차할 수 있을 테니까.”
“예, 근데 그렇게 먼 곳은 아닐 거예요. 즉, 우리가 걸어 다니는 명호를 봤다는 건 차를 세워둔 곳도, 목적지도 그 근처이리란 거죠.”
용여홍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목소리에 실린 확신은 점차 강해졌다. 추측으로 인해 조사 범위가 대폭 축소되고 있었다.
이내 용여홍은 한명호가 사라진 골목길을 응시하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라도 한 양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곳으로는 차를 몰고 들어갈 수 없어요!”
한명호가 목적지 바로 앞에 차를 대지 않은 이유를 찾은 것만 같았다. 목적지까지는 차를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추측 아래 한명호의 목적지는 더욱 또렷해졌다.
그 골목길에 자리한 단지 몇 개, 아파트 몇 채로 조사 범위가 한번 더 축소됐다. 이제 그렇게까지 부담스럽지 않은 범위였다.
장목화도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훌륭해. 가설은 담대하게, 실증은 조심스럽게 해야지. 앞으로의 행동은 여홍이 네가 주도해봐.”
“제가요?”
용여홍은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팀장에게 분석 능력을 인정받고 칭찬받았다는 건 기뻤지만 자신이 과연 팀원들을 잘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을 떨칠 순 없었다.
“그래, 용여홍 팀장님. 얘가 말 안 들으면, 뭐, 따귀라도 후려쳐버려.”
장목화가 웃으며 성건우를 가리켰다.
“그래!”
성건우는 바로 어디 해보려면 해보라는 듯 응했다.
용여홍도 농담은 무시하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뉘어서 여기 단지랑 아파트 출입구 보안요원, 경비원, 아니면 노점 상인에게 탐문해 보도록 하죠. 한명호를 본 적이 있는지 묻는 거예요.”
“좋아.”
백새벽이 가장 먼저 호응해주었다.
“예, 팀장님!”
성건우도 소리를 높였다. 만약 주위 환경만 이러지 않았더라면 목청을 더 높였을 수도 있었다.
* * *
조를 나눠 탐문을 시작한 지 15분도 안 되어 수확을 얻었다.
용여홍과 백새벽이 한 아파트 수위에게 1오레이를 주고 중요한 단서를 하나 파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명호로 의심되는 이가 왜소하고 마른 여자와 함께 맞은편 단지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했다.
용여홍이 전한 말을 듣고, 장목화가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 한명호가 아류인이라는 정체를 인정하고, 어느 여자랑 진지하게 만나기 시작한 건가?”
“옷만 벗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구조팀 내에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런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는 탄소 기반인은 백새벽 한 명밖에 없었다.
물론 게네바도 가능은 했다. 그는 표정이랄 게 없는 로봇이니까.
“단순한 합작자일까요?”
용여홍이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장기 제공자?”
성건우도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건 너무 무섭지 않냐?”
용여홍이 대꾸했다.
‘누가 장기 제공자와 진지한 만남을 가지려 하겠어? 나중에는 악몽 같은 일이 될 텐데.’
손뼉을 치며 직접 들어가 물어보자고 말하려던 장목화는 지금 팀장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곤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웃는 듯 아닌 듯 묘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용여홍도 그제야 자신의 위치와 임무를 깨달았다.
“그 단지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죠. 그들의 반응에 유의하세요. 혹시 그들이 한명호에게 우리 존재를 슬쩍 알려줄지도 모르니까요.”
‘꽤 그럴듯한데?’
장목화는 몰래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또 한 차례 바쁘게 움직인 구조팀은 몇몇 목격자를 찾아 한명호와 그 여자가 3동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용여홍은 이 시점에서 재차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장목화와 백새벽은 앞문을 지키고, 게네바는 뒤쪽 구역을 감시하며 기척을 눈치챈 한명호가 몰래 달아나지 못하게 막는 저지선이 되었다.
그리고 용여홍, 성건우는 3동의 집을 하나씩 탐문하러 들어갔다.
3동 4층에 이른 두 사람은 어느 집 앞의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건장한 장년 남자가 나왔다. 레드리버인이었다.
“무슨 일이지?”
남자가 경계심을 드러냈다.
“혹시 이 사람 본 적 있어?”
용여홍이 한명호의 초상화를 꺼내 들었다.
남자는 약간의 표정 변화를 보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성건우가 웃으며 그의 반응을 해석했다.
“본 적 있네.”
남자는 몇 초간 멍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래, 본 적 있어. 그건 왜 묻는데?”
“당신을 찾아온 이유가 뭐야?”
용여홍은 기쁨을 느꼈다. 그가 주도한 임무가 마침내 그 결실을 맺으려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간단하게!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한 가지 임무에 동참해주길 바란다던데. 조금 위험할 거라면서. 난 거절했지. 하하, 지금은 별로 모험하고 싶지 않아서. 확신 있는 일만 하고 싶어.”
“어떤 임무?”
용여홍이 계속 캐물었다.
“안 물어봤어. 물었다가 거절하지 못하게 될까 봐. 어디에 사는지는 나도 몰라. 우린 그냥 전에 몇 번 합작했던, 아는 사이일 뿐이니까.”
남자는 꽤 똑똑해 보였다.
그러던 그때, 목소리를 낮게 깐 성건우가 가십거리를 얘기하듯 물었다.
“혹시 여자 동행이 있지 않았어?”
남자는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듯 대꾸했다.
“맞아. 아픈 여자였지. 그런 여자가 동료일 리 있겠어? 아파서 그 임무를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한들 전투력을 보장할 수는 없을 텐데.”
아픈 여자?
용여홍은 어렴풋하게나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용여홍, 성건우는 단지를 나와 다시 차로 돌아갔다.
그리고 용여홍은 장목화, 백새벽, 게네바에게 방금의 수확을 전했다.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명호는 장기 이식을 위한 비용을 벌려고 모험하려는 건가? 그 여자도 그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나? 음, 더 이상의 단서는 없네. 사냥꾼 길드로 돌아가 보수가 높은 임무가 있는지 찾아보는 수밖에.”
“있잖아요, 우리를 잡는 거요.”
불쑥 끼어든 성건우의 말에, 장목화가 여느 때처럼 그를 팩 노려보았다.
“일단은 다른 일부터 해보자고.”
* * *
레드울프 구역, 스턴 스트리트 25호.
블랙셔츠파 세컨드 보스 테렌스가 전화를 받았다.
- 혹시 상르 드라세라는 남자를 알고⋯⋯.
전화의 상대는 각 대형 암흑가 조직과 관계가 깊은, 인맥이 넓은 유적 사냥꾼이었다.
테렌스가 웃었다.
“원한다면 너한테 그런 이름 열 개라도 지어줄 수는 있지.”
- 사진과 자료를 보내줄게. 단서만 잡아도 보수도 적잖게 얻을 수 있다고.
유적 사냥꾼은 능숙하게 대꾸했다.
저녁 무렵, 테렌스는 유적 사냥꾼이 약속했던 자료를 받았다.
봉투를 열어 자료를 살피는데, 그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사진 속 두 사람이 어딘가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을 확인했을 때 테렌스는 눈썹까지 꿈틀거렸다. 누군가를 도와 그 색의 염색약을 구해다 줬던 것이 생각난 탓이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그는 웃으며 전에 그 유적 사냥꾼에게 전화했다.
“못 봤어.”
테렌스의 답은 아주 간결했다.
형제 같은 사람을 팔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테렌스와 그들은 비밀리에 합작 중이기도 했다.
* * *
같은 시각, 건물 밖 길모퉁이에 구조팀이 새로 빌린 차가 세워져 있었다.
성건우는 아까 전 이미 테렌스를 방문해 둘 사이의 우애를 심화시켜놓은 상태였다.
사실 백새벽은 테렌스를 죽여 입을 아예 다물게 하자고 제안하고 싶었지만, 테렌스 배후에 존재하는 초월 영성 교단의 존재도 감안해야 했다. 테렌스를 죽인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없었다.
* * *
바쁘게 하루를 보낸 구조팀은 휴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간 성건우는 장목화가 씻는 틈을 타 왼손에 낀 맹목의 고리를 바라보았다. 상응하는 힘을 검은 머리카락으로 짜 만든 듯한 이 기이한 장신구로 다시 되돌려 놓은 상태였다.
뒤이어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성건우는 베개에 기대 눈을 감았다.
* * *
기원의 바다 안, 황금 엘리베이터가 자리한 섬.
성건우는 성건우 앞에 앉아 무시할 수 없는 허공의 흔적을 쳐다보았다.
허공에 난 상처 같은 그 흔적 안엔 대량의 붉은빛이 넘실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빛은 점차 금색으로 물들었다가 또 천천히 주황빛으로 바뀌었다. 꼭 햇빛을 따라 변하는 것 같았다.
“저걸 이용하면 너를 처리할 수 있어?”
성건우가 성건우에게 물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황금 엘리베이터 앞에 앉은 성건우가 덤덤하게 답했다.
“너희들을 처리할 수도 있어.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성건우는 여전히 출렁이는 붉은색 흔적을 보다가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디마르코의 남은 힘은 소용이 없네.”
“그건 그가 이미 죽어서야. 하지만 맹목의 고리 주인은 아직 살아있지.”
황금 엘리베이터 앞에 앉은 성건우도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는 원래 숙명주의 남은 힘과 맹목의 고리의 기운이 서로를 견제하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청록색 구슬은 곧장 옆으로 떠밀려 나가 그 힘을 헛되이 소모해버리고 말았다. 남은 사용 기회는 이제 한 번이 될까 말까 했다.
성건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더 흉악한 귀신이 될 줄 알았더니.”
이야기를 하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황금 엘리베이터를 맴돌며 산책했다. 이 섬의 다른 구역을 연구하려는 것 같았다.
“이 잠재된 위험을 제거할 방법은 고민하지 않을 작정이야?”
황금 엘리베이터 앞의 성건우가 웃으며 물었다.
성건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일단 내버려 두려고. 맞은편에 있는 그가 나와 친구가 되어 너를 처리하는 걸 도와줄지도 모르잖아.”
그러자 황금 엘리베이터 앞의 성건우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넌 네 마음속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절대 날 이길 수 없어. 기껏해야 함께 죽을 뿐이라고. 난 알아. 넌 분명 죽어도 어쩔 수 없지, 내 뒤를 이을 사람은 반드시 나타날 테니까, 라고 말할 거야. 하지만 그래서는 넌 끝까지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은 그 이유를 알 수 없게 돼.”
“그러네.”
성건우의 표정은 매우 침착하고 진지했다. 어차피 그가 마주하고 있는 건 또 다른 그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