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15화 (415/649)

415화. 의식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에, 길 양옆 가로등 불빛이 부옇게 흐려졌다.

거의 11시가 다 됐을 때, 모퉁이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한 손에는 검은 우산이, 반대편 손에는 크라프트지로 만든 가방이 쥐어져 있었다.

비쩍 마른 편인 남자는 용여홍보다 4, 5센티미터는 더 작았다. 옷은 린넨색 셔츠에 품이 낙낙한 황토색 긴 바지 차림이었다.

눈자위는 깊고, 짙은 갈색 피부에 깨끗이 면도한 상태였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외형에 별 특색이 없는 사내였다. 저기 저 레드리버, 레드코스트 혼혈인은 패링턴이 묘사한 스미스와 꼭 맞아떨어졌다.

그가 아파트로 들어간 후, 구조팀 네 사람은 순간 정신을 바짝 차렸다.

게네바 역시 절전모드에서 원상태를 회복했다.

그로부터 1, 2분 후,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방에 사람이 있네.”

“근데 왜 불을 안 켜?”

용여홍이 503호실 창문을 보며 물었다. 아직 어둑한 상태였다.

“전기를 아끼는 거겠지.”

백새벽이 나름대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럼 스미스를 만나러 가보자.”

장목화는 게네바도 함께 데려갔다. 상대는 한 종교 조직에 연루된 사람이니만큼 뜻밖의 상황이 발생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또한 스마트 로봇인 게네바와 함께한다면 구조팀은 행여 실수하더라도 다시 또 만회할 가능성이 넉넉했다.

* * *

다시 아파트 5층으로 올라간 성건우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문을 두드렸다.

아까 전 503호 초인종은 망가졌거나 배터리가 없는지 작동이 안 됐었다.

쿵쿵쿵-

노크는 세 번이나 반복됐지만 안에선 아무 기척이 없었다.

“분명히 생물 전기 신호는 잡혀. 근데 제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네.”

장목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성건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도 느껴져요.”

“이렇게나 빨리 잠들었을 리는 없잖아. 설마 무슨 일이 난 건 아니겠죠?”

순간 용여홍이 본인의 추측에 화들짝 놀랐다. 그건 너무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또 이 구조팀은 여태까지 수많은 우연을 맞닥뜨린 팀이었다.

성건우가 한 번 더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선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백새벽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백새벽은 곧장 갖고 다니던 철사를 꺼내 열쇠 구멍에 넣고 몇 번 돌렸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방 안은 온통 어둠이었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미약한 빛이 벽의 윤곽만 살짝 드러낼 뿐이었다.

비 내리는 밤에는 달도, 별도 없었다.

“침실에 있어.”

장목화가 잔뜩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침실 안쪽에서는 어스름한 노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구조팀 네 명은 모두 권총을 들고 허리를 살짝 굽힌 채 방으로 다가갔다.

구조팀은 자연스레 전투 대형을 갖춰 이동했고, 맨 뒤에 선 게네바는 불필요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침실의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살짝 닫혀있을 뿐이었다.

성건우는 각자 위치에 선 동료들을 한번 보고, 살짝 문을 밀었다.

이내 방의 상황이 온전히 드러났다.

커튼이 내려진 창문 쪽에 나무 침대 하나가 붙어 있고, 그 측면 전방엔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테이블엔 커다란 장방형 거울이 세워져 있었으며, 거울 앞엔 하얀 양초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저 양초가 바로 이 어두운 방을 밝히는 빛이었다.

양초는 거울 속에서 어스름한 노란 빛과 가벼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테이블 앞에 조금 전 린넨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가만히 앉아 거울과 촛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발치에는 크라프트지 백을 두고, 빨간 사과 하나를 쥔 남자는 조용히 사과 껍질을 깎는 중이었다. 그리고 귀엔 헤드폰을 낀 걸 보니 여태까지 아무것도 안 들렸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이 자정에 가까운 야심한 시각,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한 남자가 거울 앞에 앉아 촛불을 두고 사과를 깎고 있었다.

용여홍은 왠지 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알 수 없는 묘한 기이함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걸 느꼈는지 남자가 그제야 고개를 틀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누구야!”

벌떡 일어난 남자가 들고 있던 과도를 쳐들었다.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이로 인해 방을 가득 채웠던 기묘한 분위기도 단숨에 흩어졌다.

“우린 패링턴의 친구들이야. 널 만나러 왔어.”

장목화가 웃으며 자기소개부터 했다.

“……뭐라고?”

남자는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

장목화는 순간 청력이 나쁜 본인을 마주한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남자가 끼고 있던 헤드폰을 벗었다.

장목화는 다시 또 친절하게 방금 한 말을 반복한 뒤 덧붙였다.

“네가 스미스지?”

스미스도 겨우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맞아. 근데 남의 집엔 어떻게 마음대로 들어온 거야?”

“네가 돌아온 걸 보고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없더라고. 혹시 또 네가 몸이 아파서 쓰러지기라도 했나 걱정이 돼서. 멋대로 문을 따고 들어온 건 미안해.”

장목화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스미스는 상대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엔 이러지 마. 내가 지독한 변비 환자였으면 어쩔 뻔했어?”

“그래, 그 말도 맞네.”

성건우가 호응했다.

이내 과도를 내려놓은 스미스가 오른손을 조용히 움직여 허리춤에 찬 레드리버 권총에 얹고서 물었다.

“패링턴은? 아직 안 왔어?”

“패링턴은 세상을 떠났어. 그 흰 늑대 때문에.”

장목화는 100퍼센트 진실은 아닌 답을 내놓았다.

스미스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심상치 않은 일일 것 같다고, 가지 말라고 그랬는데. 나가서 얘기하자.”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리던 그가 바깥의 거실을 가리켰다. 분명 본인 침실인데 여러 사람이 자기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니 영 불편한 모양이었다.

거실의 등을 켠 스미스가 도망치기 좋은 자리에 앉아 물었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뭐야?”

“우린 남쪽에서 왔어. 신룡교 사람 한 무리랑 갈등이 있었지. 그들 환술이 엄청 대단해서 꽤 고생했었어. 듣자 하니 너희 교파도 환술에 능하다던데. 그래서 그들한테 어떻게 대적하면 좋을지 가르침을 좀 구하러 왔어.”

장목화는 생글생글 웃으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몇 차례 표정 변화를 보이던 스미스가 입을 열었다.

“그 이단 놈들⋯⋯.”

“뭐?”

놀란 용여홍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이어, 장목화가 물었다.

“너희들이 믿는 달지기도 깨진 거울이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스미스는 마치 거울에 비춰보듯 두 손을 얼굴 앞까지 들어 올렸다. 교파의 교도는 아주 장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에는 꿈에서 깨어나게 되리니. 신세계는 거울 너머에 있다.”

용여홍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근데 패링턴은 너희가 달지기를 숭배하는 대신 거울만 믿는다던데.”

스미스는 잠깐 멍한 표정을 드러냈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우리가 거울을 믿는다고 말했을 뿐이지. 거울은 곧 달지기, 그러니까 깨진 거울인 거고. 음, 아무래도 녀석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네. 어쩐지 우리 교파에 가입하려고 하지 않더라니.

하……. 그 이단 놈들, 신성한 거울을 무시하고 달지기를 거대한 용 한 마리라 여겨. 대체 뭘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스미스는 한숨과 함께 진지하게 분개했다.

그때, 성건우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끼어들었다.

“아아. 그럼 너희들 성찬은 뭐야?”

스미스는 침실을 가리켰다.

“사과. 아무도 없는 방에서 귀를 막고, 촛불을 켜고, 거울을 마주한 채 사과를 깎는 건 성찬을 즐기기 전의 의식이야. 만약 그 껍질이 끝까지 끊어지지 않으면 한동안 달지기의 비호를 받을 수 있지.”

‘그러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으스스하잖아…….’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하.”

성건우는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다시 장목화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행운을 빌어. 아, 너희 교파 이름은 뭐야?”

스미스는 자부심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울교. 우리는 멋대로 신도를 끌어들이지 않아. 몇 년 동안 관찰한 끝에 괜찮겠다 싶으면 그제야 초청해. 아……. 근데 난 환술에 대해서는 그렇다 할 연구를 못 했어. 그보다는 교리를 이해하는데 더 중점을 두고 있었지. 너희들한테 별 도움이 못 되겠네.”

난처해하는 스미스를 보며, 용여홍은 한참 머리를 굴린 후에야 그가 말한 진정한 뜻을 이해했다.

‘자기가 각성자가 아니란 말을 이렇게 참신하고 우아하게 얘기하나?’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스미스가 덧붙였다.

“내가 아는 건 약점을 노려야 한다는 거야. 전도사랑 연락할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있는데, 전도사가 너희들을 보려 할지는 잘 모르겠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돌연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너한테 너무 실례잖아. 괜찮아. 자칫 잘못했다가는 전도사가 네가 신도를 포섭하는 데 실패했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고.”

사실 전도에 실패했다는 것보다는 거울교의 상황을 외부에 유출했다는 게 더 문제였다. 장목화는 그것까지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스미스가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고 믿었다.

스미스는 상대가 정말로 선의를 베푸는 것인지, 아니면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 한발 물러서는 방식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그렇게 몇 초간 머뭇대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신룡교에 복수하지 않을 거야?”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용여홍 역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팀장님 의중이 뭐지?’

장목화가 웃었다.

“복수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해야겠지만, 못 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애쉬랜드에서 은혜와 원한에 집착하는 건 아주 바보 같은 짓이잖아. 거기에 몰두하다간 시간과 자원만 낭비하는 거지. 나와 내 동료들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고. 목숨만 붙어 있다면 그보다 더 크게 생각할 일은 없다는 거야.”

짝짝짝!

성건우가 때를 놓치지 않고 손뼉까지 치자 스미스가 흠칫했다.

그리고 그는 한참 뒤에야 한숨을 토하며 이야기했다.

“이해해. 복수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고, 끝내 본인의 남은 삶마저도 버린 사람들을 많이 봤어. 미안해, 별 도움이 못 돼서.”

그는 약간 감격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목화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럼 우린 이만 가볼게. 안녕.”

“결국에는 꿈에서 깨어나게 되리니.”

스미스 역시 일어나 거울을 보듯 양손을 얼굴 앞까지 들어 올렸다.

* * *

아파트를 나와 차에 탄 뒤, 용여홍이 이제 한계라는 듯 질문을 쏟았다.

“팀장님,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 정말 그 전도사 안 만나실 거예요?”

장목화는 룸미러를 통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거울교도 달지기를 믿는다잖아. 그쪽이랑은 교류 안 하려고.”

“왜요?”

용여홍은 이건 솔직히 성건우도 이해하지 못할 말이라 생각했다.

“음, 달지기를 믿고 신룡교를 이단으로 여기며 각성자에 대해서도 충분히 안다는 건, 거울교의 규모가 절대 작지 않다는 뜻이야. 그럼 강자도 적지 않겠지. 퍼스트 시티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테고.

다들 기억해? 퍼스트 시티와 합작해 오레이의 후손을 보호하던 게 환술에 능한 심령의 복도 급 강자였다는 거. 난 어쩌면 그자가 거울교 고위층 인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들은 퍼스트 시티와 아주 심층적인 관계가 있는 거야.”

장목화의 말을 천천히 곱씹던 용여홍이 흠칫 놀랐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만약 장목화의 추측이 맞다면, 구조팀이 거울교란 단서를 물고 늘어질 경우, 가상 세계를 이용하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에게 되레 가상 세계를 타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 그대로 끝장이었다.

이내 백새벽이 동조했다.

“저도 이 일은 정말 신중해야 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혹시 모르니까요.”

“사실 이건 기회이기도 해요. 위험할수록 위험을 무릅써야⋯⋯.”

성건우는 이 틈을 타 새로 배운 공염불을 외우려 했지만, 동료들의 매서운 눈초리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게네바 역시 장목화를 따라 그를 향해 붉은 눈빛을 번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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