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만남
갈루란은 거의 끝까지 다 탄 선향을 보다가 웃으며 예를 갖췄다.
“지인은 무아하다. 신세계는 눈앞에 있느니라.”
그녀는 천천히 두 팀이 왔던 길을 따라 느릿하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미터 갔을 무렵, 갑자기 갈루란이 뒤를 돌았다.
“여긴 위험한 괴물이 아주 많습니다. 그렇게 강하지는 않아도 쉬이 해결할 수 없는 녀석들이에요. 그러니 멋대로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용여홍은 지난번만 해도 갈루란이 그렇게 강한 존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갖가지 사건을 겪은 후엔, 시선이 달라졌다.
늪 1호 유적, 불모지 13호 유적 등 그토록 위험한 곳을 편안하게 돌아다닌 사람이라면, 생각처럼 그렇게 만만하진 않을 터, 이두형만은 못하더라도 기원의 바다 안에서는 절대적으로 높은 급에 이르렀을 것이었다.
당시 갈루란은 심령의 복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도 그렇게 상당했는데, 지금은 과연 어느 정도 급에 이르렀을까?
“알겠습니다.”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금색 머리칼을 간단히 틀어 올린 여인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자, 성건우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을 마주하러 갔네요.”
“뭐?”
눈썹을 찌푸리던 장목화는 곧 성건우의 말뜻을 파악했다.
갈루란이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는 곳곳은 운명에 따른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의 잠재의식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녀는 어쩌면 이미 기원의 바다 끝에 이르러 가장 마주하기 싫은 자신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인지도 몰랐다.
갈루란이 가장 마주하기 싫은 자신은 분명 퍼스트 시티에 뿌리를 내린 그녀 자신일 터였다. 그래도 도망칠 수 없다면 마주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성건우가 한숨을 내뱉은 건, 본인은 아직 이러한 방면에서 어떠한 진전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다른 자신을 설득하지도, 자신을 이기지도, 자신을 포용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양범구와 그레이는 이 말을 듣고 살짝 표정이 변했으나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반면, 웨트와 파르스는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양범구는 문득 검은 진흙 한 덩이로 연못 울타리에 붙어 있던 선약이 재가 되어 날아가는 것을 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영원한 세월 교파인가?”
이는 갈루란의 행동과 형이상학적인 말로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식견이 꽤 넓네.”
성건우가 상대를 칭찬했다.
짝짝짝!
박수도 빠지지 않았다.
‘뭐야, 맞다는 말이야, 그냥 말 돌리려는 거야?’
양범구는 성건우의 순수한 칭찬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장목화가 성건우를 도와 설명했다.
“갈루란 본인은 그렇다는데, 실제로도 그런지는 우리도 잘 몰라.”
그 순간이었다.
“살려줘! 살려줘!”
폐허 도시 모처에서 겁에 질린 처절한 레드리버어가 들렸다.
“갈까요?”
성건우가 고개를 틀어 장목화를 바라보았다.
장목화는 그 소리 쪽 방향을 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야. 계속 가면 곧 2킬로미터 범위를 벗어나.”
2킬로미터는 두 팀이 사전에 약속한 탐색 범위였다. 그 범위를 넘어선 곳에서 위험을 맞닥뜨리게 되면, 체력상 동굴 출입구까지 달려가긴 어려웠다.
‘그래도 팀장님은 이성적이셔. 지금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는 게 사람인지 괴물인지도 알 수가 없잖아.’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용여홍도 정말 누군가 바로 앞에서 구조를 청했다면, 망설임 없이 나섰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릴 뿐이라, 선뜻 나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함정일 가능성도 있었다.
성건우는 숨을 작게 토해낼 뿐, 장목화의 말에 반박하진 않았다.
그때,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근데 우린 어쨌든 이쪽으로 계속 갈 생각이었잖아. 범위를 넘어서지 말고 딱 2킬로미터 반경 안에 멈추자. 저 사람이 운 좋게 이동하던 우리를 만나게 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지.”
성건우가 활짝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한텐 작은 빨강이가 있잖아요!”
“야이씨!”
용여홍이 발끈하는 도중, 백새벽도 곁에서 조용히 찬성을 표했다.
그레이, 웨트, 파르스는 서로 눈빛만 주고받을 뿐, 동의도, 거절도 하지 않았다. 그들로선 이동 중 물자만 수집할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도움을 청하고 있는 상대와 만날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말로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들은 절대 구조팀과 생사를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
그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양범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너희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착한 것 같네.”
양범구가 구조팀 네 명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애쉬랜드에서는 이 정도만 해도 굉장히 성격이 좋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거친 세상에서 성격이 좋다는 건…… 사실 약점에 더 가까웠다.
성건우가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의 진정한 목표가 뭔지 알아?”
“뭔데?”
양범구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성건우가 진지하게 답했다.
“인류를 구원하는 거!”
“⋯⋯.”
양범구, 그레이, 웨트, 파르스는 2초간 멍해졌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오랜만에 듣는 실없는 농담이었다.
* * *
두 팀은 살려달라는 외침이 들려오던 곳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도중에 차창을 깨거나 유해를 뒤져 가치 있으면서도 휴대하기 좋은 물건들을 챙겼다.
금, 기술 자료, 유용한 책, 포장을 뜯지 않은 완전한 부품, 사용된 적 있는 특수 합금 제품 등등이었다.
그렇게 3~400미터 나아갔을 무렵, 용여홍은 한 인영을 발견했다.
휘청대는 남자는 계속 뒤를 돌아보면서 이곳으로 달려왔다. 뭔가 무시무시한 존재에게 쫓기는 사람 같았다.
키는 용여홍과 비슷했고, 별도의 주머니를 덧대 만든 린넨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머리칼은 회색, 짙은 갈색 눈동자에, 산탄총 하나를 쥐고 있었다.
그 인상착의를 본 순간 용여홍의 눈빛이 흔들렸다.
패링턴!
남자는 구조팀이 찾던 유적 사냥꾼, 패링턴이었다.
“무슨 일이야?”
성건우가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쥐고 소리쳤다.
패링턴은 그제야 여덟 명을 확인하고 다급히 말했다.
“살려줘! 괴물이 있어!”
“네 뒤엔 아무것도 없어.”
장목화는 놀란 그를 위해, 행여 성건우가 장난치기 전에 먼저 답했다.
“곧 따라잡을 거야!”
거친 숨을 몰아쉬는 패링턴을 보며, 장목화가 다시 감지에 집중했다.
‘수십 미터 안에 중대형 생물 같은 건 없는데.’
“그럼 전의 그 광장으로 철수하자.”
장목화가 제안했다.
* * *
갈루란이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돌아가는 동안, 꾸준히 존재하지 않는 괴물에게 쫓기던 패링턴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내내 긴장하고 공황에 빠져 있던 상태에서 겨우 벗어난 듯 보였다.
“대체 뭘 봤던 거야?”
장목화가 물었다.
패링턴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난 흰 늑대의 꼭두각시를 피해서 여기로 들어왔어. 물자와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챙겨서 다른 길을 통해 빠져나갈 생각이었거든.
근데 지난 며칠간 수많은 시체를 봤어.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더라고. 몇몇은 유리 파편으로 자기 동맥을 끊었고, 몇몇은 자기 자신한테 총을 쐈고, 몇몇은 몸에 휘발유를 끼얹어 산 채로 불타 죽었더라고.”
‘다른 자살자들인가?’
용여홍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패링턴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 걸 봤는데 어떻게 여기 더 있고 싶겠어. 최대한 빨리 출구를 찾으려고 돌아다니다가 한 거리에서⋯⋯. 살아있는 한 사람을 봤어.”
그의 얼굴에 다시금 아까 전의 그 공포가 피어올랐다.
“살아있는 사람?”
웨트가 제일 먼저 내뱉듯 물었다.
이 폐허 도시 안에선 같은 일행도 아니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죽은 사람이나 무심자, 변이 생물을 만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용여홍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패링턴은 산탄총을 받쳐 든 채 기억을 반추했다.
“그 거리, 여기랑 거의 비슷했어. 더럽고, 어지럽고, 냄새도 나고. 오랫동안 청소를 안 했나 봐. 길가에 벤치도 여러 개 있었는데, 거기 앉아 있었어.
애쉬랜드인이고, 구세계에서 말하는 정장을 입고 있더라고.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회색 정장. 나이는 서른도 채 안 된 것 같았고, 머리는 뒤로 깔끔하게 빗어 넘겼어. 조그맣고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었고.”
“별로 특별하지는 않아 보이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용여홍이 중얼거렸다.
그런 사람을 맞닥뜨렸다면 이렇게 위험한 유적 안이라도 괴물로 여기진 않을 터였다. 보통은 가까이 다가가 말이라도 걸고 선한 사람인지, 합작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살피려 할 것이었다.
패링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분명 별로 특별할 건 없었지. 살아있다는 걸 빼면. 근데 그 사람 뒤쪽 가로수 위에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어. 크고 동그란 눈은 무슨 탐조등 같았고 색은 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빨갰지.
상체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의자 등받이에 걸쳐있는 게, 꼭 그 사람을 호위하고 있는 것 같았어. 근데 지금 그걸 무섭다고 하는 게 아니야, 그건 무서운 축에도 못 껴. 그 흰, 흰 늑대가 그 남자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고!”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딱 이름이 떠올랐다.
오하명!
흰 늑대가 곁에 있었다면, 그자는 분명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국의 주인 오하명일 터였다.
‘방송국에서 1킬로미터 반경 안에 들어가지 않고, 또 전자 제품을 휴대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했잖아. 오하명은 봉인돼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는 거지? 저쪽은 방송국이랑은 한참 떨어져 있어. 분명히 2킬로미터 이상은 될 거라고.’
용여홍은 패링턴이 당시 느꼈을 공포를, 심지어 상대보다 더 깊은 공포를 실감했다. 패링턴은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국에 관련한 일은, 오하명이 얼마나 기이하고 무시무시한 존재인지는 모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내 패링턴이 말을 이었다.
“그 사람, 그때 신문을 보고 있었어. 아주 집중하고 있었지. 근데 흰 늑대랑 구렁이는 다 날 봤어. 그래서 식겁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오하명이라면 자신들을 본 패링턴을 쉽게 통제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도망치도록 내버려 둔 거지?’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장목화는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첫째, 오하명이 패링턴을 의도적으로 놓아줬을 가능성.
사실 패링턴은 오하명이 암암리에 발휘한 능력에 이미 영향을 받아서, 중요한 순간에 여덟 명을 치명적으로 오도할지도 몰랐다.
둘째, 패링턴이 본 사람이 진짜 오하명이 아닌, 한 전자 제품을 통해 만들어낸 영상일 가능성.
회사에서 제공한 정보와 갈루란이 조금 전 남긴 말을 결합한 끝에 장목화는 후자에 더 무게를 실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만한 실력과 지위를 가진 오하명이 굳이 이렇게 복잡한 방안을 택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장목화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결코 방심하지는 않았다.
이내 그녀가 조금 더 신중하게 물었다.
“혹시 가지고 있는 전자 제품 있어?”
패링턴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였다.
“아니. 그건 왜?”
장목화가 설명했다.
“없다면 다행이네. 여기서 전자 제품은 엄청 위험해.”
“그래?”
패링턴은 장목화의 말을 이해는 못 했지만, 전에 흰 늑대에게 통제당한 유적 사냥꾼들을 봤던 만큼 그 말에 믿음이 갔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을지라도 확답받은 후에는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사실 패링턴이 관심을 둔 건 다른 문제였다.
“여긴 대체 어디야? 너희는 왜 여기 익숙해 보여? 다른 출구가 있나?”
“불모지 13호 유적이야.”
양범구가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뭐?”
패링턴의 눈이 커다래졌다.
퍼스트 시티를 거점으로 삼고 살아가는 유적 사냥꾼 중 불모지 13호 유적과 관련한 소문을 듣지 못한 이는 거의 없었다. 막 퍼스트 시티에 도착해 기틀을 잡아가는 사람이 아닌 이상에는 모두가 그 소문을 알았다.
장목화는 놀란 패링턴의 마음을 다독이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저 패링턴이 달려온 곳을 힐긋 보다가, 잠시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 살짝 우회하면서 계속해서 물자를 수집하는 거야.”
“좋아!”
웨트는 이번에도 제일 답이 빨랐다. 그는 오늘도 큰 수확을 거둬서, 더는 탐색할 이유도,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었다.
다른 이들도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패링턴 역시 한 차례 대화 끝에 모두에게 여유가 있는 것을 보고 전보다 훨씬 안정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