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목표
5~6분 정도 후, 한 여자가 밀주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엄준모는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어! 이쪽이야.”
한명호도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다가오는 단발머리 여자의 모습을 확인했다.
여자는 고작해야 20살 정도로 매우 어려 보였다. 키도 참 작아서 160센티미터도 채 안 될 것 같았다. 외모는 딱히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축에 들었으며, 애쉬랜드인 특유의 부드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한명호는 그녀를 보자마자 안색이 별로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몸도 너무 말라서 건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피부는 햇빛에 좀 그을렸고, 검은 반팔 티셔츠, 사선 무늬 남색 긴바지에 커다란 갈색 신발을 신고 있었다. 옷가지들은 분명 구세계 폐허 도시에서 주워 왔을 테지만, 기워입은 흔적이나 해진 부분은 없었다. 다만 매우 오래된 것만은 확실했다.
한명호의 맞은편으로 온 여자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한명호는 그녀가 걷는 자세만 봐선 죽을병에 걸린 사람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여자의 허리춤에서 시선이 멈췄다. 불룩 튀어나온 그곳엔 틀림없이 권총 한 자루가 숨겨져 있을 터였다.
엄준모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개부터 할게. 정도연, 장기 기증 지원자야. 하하, 나도 진짜 이름인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뭐 굳이 알 필요는 없지. 어쨌든 별칭일 뿐이니까.
이쪽은 한 씨, 이름 말고 성만 알려주더라고.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부르고 있어. 둘 다 애쉬랜드인이니 너무 어색해하지 마.”
“안녕.”
정도연이 한명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명호도 같은 동작으로 호응했다.
“안녕.”
“뭘 좀 마셔야겠지? 여기 밀주도 꽤 괜찮아. 사장이 어느 귀족 장원의 양조사였대. 하하, 당연하지만 내가 대접할 생각은 없어. 내가 그렇게 관대한 사람처럼 보여?”
엄준모는 진짜 소개팅 주선자처럼 분위기를 띄웠다.
잠시 뜸을 들이던 정도연이 운을 뗐다.
“그럼 됐어. 난 술 안 마셔.”
“내가 내지.”
한명호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여자에게 동병상련을 느낀 듯했다.
그는 애초에 온갖 밀수품이 모여드는 레드스톤 마켓에서 오랫동안 치안관으로 있었던 지라, 모아둔 물자도 상당했으며 주머니 사정도 꽤 넉넉했다.
하지만 정도연은 재차 고개를 저었다.
“내가 술을 안 마시는 건 그냥 싫어해서야. 그야말로 음식 낭비잖아. 애쉬랜드 곳곳에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엄준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뭐? 술 만드는 데 쓴 곡식을 뺏어서 그들한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차라리 우리 배나 채우는 게 낫지. 이런 자리에서도 술을 거부하는 건 한 씨 돈만 아껴주는 짓이라고.”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던 그가 한명호에게 말했다.
“정도연은 심장을 너한테 주고 싶어 하는데, 요구 조건이 꽤 커.”
옆자리 정도연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금 더 보충해 말했다.
“만약 내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몰래 달아나버릴 게 걱정된다면, 지금부터 내 곁을 쫓아다니면서 감시해도 좋아.”
한명호 입가의 지저분한 수염이 꿈틀대며 움직였다.
“내가 기회를 노려 널 기절시킨 다음, 진료소로 끌고 갈 건 걱정 안 되나 봐? 그렇게 한다면 값 따위는 지불할 필요도 없는데.”
엄준모는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경고까지 해주다니, 친절하기도 하셔라.”
반면, 정도연은 덤덤했다.
“난 아직 나 정도는 충분하게 지킬 수 있어.”
숨을 들이마셨다가 느릿하게 토해낸 한명호가 정도연의 눈을 응시했다.
“말해봐, 원하는 게 뭐야?”
정도연이 솔직하게 말했다.
“마을 하나만 구해줘.”
* * *
에이펙스 격투장, 귀족석.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은 포카스가 한 무리를 끌고 들어오는 걸 보고 바로 시선을 거뒀다. 행여나 포카스가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까 봐서였다.
그러나 그 우려가 무색하게도 포카스는 구조팀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주위만 한 번 둘러본 뒤 자신의 칸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듀카스는 안 왔네.”
성건우가 그쪽을 힐끔거리며 아쉬움을 표했다.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카시엘도 안 왔어. 근데 두 사람은 포카스 장군 개인 경호원이 아니라 도시 방위군 장교잖아. 수시로 따라다닐 수는 없겠지.”
용여홍은 성건우에게 왜 듀카스가 오지 않은 걸 아쉬워하느냐고 물으려다, 하인이 된 처지를 떠올리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주인 장목화가 그의 마음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왜, 위장한 참에 팔씨름해보려고?”
성건우는 아래쪽 격투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팀장님이랑요. 만약 듀카스가 팀장님을 못 알아본다면, 여자한테 또 패배한 거잖아요. 충격받으면 더는 근육에 집착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럼 더 이상 가녀린 여자를 얕잡아 보는 일도 없을 거고.”
“……참 생각도 깊으시네요.”
장목화는 그게 과연 듀카스에게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알 수가 없었다. 뒤이어 보이지 않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듀카스와 카시엘이 없는데도 포카스 장군 주위에는 경호원 없이 호위병만 있어. 그럼 포카스가 자기 실력에 자신감이 상당하다는 건데.’
하인과 경호원을 대동한 귀족들이 속속들이 자리를 채우고 대략 10분 정도 지났을까. 용여홍이 돌연 눈을 번득였다.
오레이의 외손자 마커스!
구조팀을 퍼스트 시티로 불러들인 목표 하나가 출현했다.
마커스는 사촌 누나 아비아와 딱히 닮은 구석이 없었다. 좀 미묘한 표현이겠지만 머리 색은 금빛이 아닌 노란색이고, 눈동자는 옅은 파란색이었다.
코는 좀 날카로운 편에 입술은 굉장히 두꺼웠고, 얼굴형은 약간 가로로 넓었다. 또한 체형은 평범한 편이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185센티미터에 달하는 키에 대비했을 때 이야기였다.
마커스는 시종일관 웃음기 어린 얼굴로 움직였지만, 정작 눈에선 웃음기란 걸 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과 마주 보고 있지 않을 때는 음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네. 너무 답답해서 그런가.”
장목화가 속삭이듯 말했다.
마커스와 아비아는 오레이의 후손답게 어마어마한 우대와 삼엄한 보호를 받고 있었으나 그만큼 경계를 받기도 했다. 둘은 군대에 들어갈 수도 없거니와 원로가 될 수도 없어서, 퍼스트 시티 내 각종 문제에 대한 발언권도 거의 없었다.
말하자면 철창에 갇힌 동물에 가까운 신세였다. 야심이나 성취욕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환경을 답답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내 성건우가 곧바로 제안했다.
“구세계의 콘텐츠를 보여줘야겠네요.”
“모든 사람이 거기에 홀딱 빠지는 건 아냐. 그것보다 현실에서의 성취를 더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고.”
장목화는 혹여나 몰래 마커스를 보호하고 있을 강자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 마커스에게서 얼른 시선을 거두고 대꾸했다.
물론 그사이 성건우는 계획에 따라 일부러 마커스를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친 순간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서로의 얼굴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마커스도 다른 귀족을 대하듯 예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낯선 귀족인 성건우의 존재를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지금은 초대 귀족의 2세대, 3세대가 활발히 활동하는 데다 전공을 세워 귀족이 된 이들도 많아서. 퍼스트 시티 상류 사회 내의 구성원은 그 숫자가 상당했다.
평소 어울리는 지인, 혹은 혁혁하거나 지위 높은 부모를 두지 않는 이상 얼굴은 모르는 게 정상이었다. 거기다 귀족들의 사생아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가족 관계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상대가 누구의 자식인지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장목화는 마커스에게 시선을 뗀 뒤, 티 나지 않게 그가 대동한 네 경호원을 훑어보았다. 다들 신체도 건장했고, 같은 검은색 옷차림에 선글라스로 눈빛을 가리고 있었다.
상당히 전문적으로 보였다. 각성자나 변이인, 개조인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넷 모두 지극히 정상적인 경호원의 정석 같은 모습이었다.
장목화는 다시금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지만, 어딘가 숨어 있을 강자는 아직 흔적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마커스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격투장 양쪽 대문이 활짝 열렸다. 단번에 모두의 눈앞에 철책 뒤쪽의 상황이 드러났다.
귀족석 오른편에 오늘의 격투사가 있었다. 평소 철책 뒤쪽 방에 갇혀 있는 그는 오직 격투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짧은 금발의 레드리버인은 키가 190센티미터에 달했다. 가죽 갑옷과 더불어 양손에 방패와 긴 창을 쥔 모습은 고대에서 막 튀어나온 전사처럼 보였다. 하지만 짙은 수염으로 뒤덮인 그 얼굴에선 또렷한 분노와 억울함이 비쳤다.
시합 전 배부된 홍보 자료에 따르면, 그는 원래 퍼스트 시티 주민이자 용맹하고 전도가 유망한 군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작전에서 귀족 장교의 명을 어기고 부대의 손실을 일으킨 죄로 체포된 뒤, 판결 끝에 노예로 전락해버린 신세였다.
그는 목숨을 걸고 자유를 되찾고자 격투사를 자청했다.
오늘 그가 대적할 상대는 바로 변이 생물이었다.
용여홍은 거리가 한참 먼데도 그 변이 생물에게서 묵직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건 동족보다 두 배는 큰 검은 호랑이였다. 목 위로 머리가 두 개 붙어있어, 그 두 머리는 동시에 무시무시한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다.
둥! 둥! 둥!
관중들은 특수 제작된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리며 북 같은 소리를 냈다. 이로 인해 분위기가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장목화는 마커스 역시 열광적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는 걸 확인했다. 마커스는 확실히 이 격투장 분위기에 심취한 것 같았다.
같은 시각, 한 귀족이 잔을 들고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렸는지 캑캑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 기침을 멈추지 못하던 귀족은 삽시간에 얼굴이 새빨개진 채 그대로 앞으로 기우뚱 쓰러지고 말았다.
둥- 둥-
격투장을 달구는 소리 속, 귀족의 기침 소리는 완전히 묻혀서 주변 사람을 제외하곤 누구도 그 귀족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귀족석에 앉은 관객이라면 바닥으로 고꾸라진 사람과 새빨개진 얼굴에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눈,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과 이미 그의 손을 떠나 산산조각이 나버린 물잔까지 눈치채지 못할 수 없었다.
순간 용여홍은 작은 해프닝과 뜻밖의 상황으로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참사를 마주한 것만 같았다. 모든 목격자의 마음에도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의식적으로 응급처치에 나서려던 장목화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자마자 그대로 멈춰버렸다. 뒤이어 그녀는 성건우의 팔을 잡아 뛰어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포카스가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사자 같은 장군이 무거운 눈빛으로 질식한 귀족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조급해하지도, 당황하지도, 충동적으로 굴지도 않았다. 그저 한 편의 연극을 감상하듯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몇 초 후, 포카스가 이제야 무슨 상황이 발생한 것인지 깨달았다는 듯 곁에 있는 호위병에게 말했다.
“밖을 살펴.”
‘……밖?’
응급처치에 능숙한 부하 한 명만 보내도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카스는 위험에 빠진 귀족을 도와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듯했다.
다른 귀족들은 쓰러진 귀족과의 관계가 얼마나 가깝고 먼지에 따라, 그저 눈으로만 그쪽을 살피거나 하인을 보내 돕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마커스는 그 귀족과 잘 알지 못하는지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한 귀족을 힐긋 보기만 했다. 그러다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조롱의 빛을 드러냈다. 이상한 건 분명 저 죽어가는 귀족을 보고 웃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