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사람이 많으면 세력도 크지
성건우의 눈앞에 구세계 사제복 차림에 구식 모자를 쓴 인영이 있었다.
하지만 성건우에게 겁에 질린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얼굴엔 잔뜩 흥분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디마르코?”
매부리코를 가진 인영이 주위를 살피던 시선을 거두고 성건우를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성건우는 그에게 직접 질문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조금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군?”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 이런 상황에 두려워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이게 당신의 각성자 능력인가? 심령의 복도를 통하지 않고도 직접 다른 사람의 심령 세계에 침입할 수 있는 거?”
디마르코도 웃었다.
“숙명통(宿命通)이라는 더 좋은 이름이 있다네.”
그런데 말을 잇는 동안 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더는 마음에 잠재된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것 같았다.
“자네, 정말 겁을 먹지 않았군! 내가 겁에 질려 절망스러워하는 모습을 가장 좋아한다는 걸 모르나? 희망을 가득 품고 있던 생명을 직접 끝내버리는 행위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르는 거야?”
그의 표정은 갈수록 심각하게 일그러지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잔혹함과 광기를 드러냈다. 이내 고개를 쳐들고 웃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하. 자, 한 수 가르쳐주지. 공포, 두려움, 절망, 무기력이라는 게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마.”
동시에 그는 분열을 시작해 수많은 디마르코로 나뉘었다. 하나 같이 구세계 사제복을 입고 구식 모자를 쓴 디마르코들이 성건우를 포위했다.
“그게 당신이 지불한 대가인가?”
성건우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나서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하다는 모습이었다.
디마르코가 낮게 웃었다.
“내가 답해줄 거라고 생각하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회색 제복을 입은 성건우 역시 여럿으로 분열되었다. 더러는 개인용 바주카포를, 더러는 돌격 소총을 쥐고 있었고, 또 흰색 가운을 걸친 성건우, 들것을 든 성건우도 있었고, 작은 스피커를, 확성기를 쥐고 있는 성건우들도 있었다.
그중 여덟 명은 굉장히 또렷했지만, 나머지는 상대적으로 흐릿한 편이었다.
수많은 디마르코는 그 많은 성건우들을 바라보다가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잊어버렸다.
산과 물, 밝은 햇빛이 자리한 이 섬 위에, 성건우 부대와 디마르코 부대가 대치하고 섰다.
그로부터 2, 3초가 지나, 디마르코는 그제야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도 신경통(神境通)을 얻었나? 아냐, 그보단 인격 분열에 가까운데⋯⋯.”
음성은 각기 다른 디마르코에게서 흘러나와 층층이 울려 퍼졌다.
이를 보고,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접하네. 디마르코 각각이 다른 말을 하게 하지도 못하는 거야?”
이는 여러 성건우 중, 단 한 명만 이야기했다. 그 사이, 다른 성건우들은 배를 부여잡고 웃거나, 괴상 야릇한 반응을 보이거나, 잔뜩 흥분해 춤을 추거나, 확성기로 그 말을 반복하는 등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모든 디마르코는 동시에 얼굴 근육을 경련하며 포악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그들은 또 입을 맞춰 같은 말을 짜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은 기분이 매우 나빠졌다.
‘왜 저 녀석들이랑 이딴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여야 하는 거지?’
다음 순간, 디마르코는 분열된 모든 인영을 모아 한 명으로 합쳤다. 그런 뒤 섬 위의 산봉우리처럼 급속도로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신경통의 능력을 발휘하면 1이 될 수도, 1만이 될 수도 있고, 커질 수도, 작아질 수도 있었다.
* * *
엉망으로 망가진 디마르코의 방.
게네바의 시선이 성건우를 지나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에게도 닿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세 사람의 눈빛과 상태도 이상하다는 걸 분석해냈다.
그와 동시에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일그러졌다가 정상으로 돌아오는가 하면 매서워졌다가 멍해지기도 했다.
장목화는 사신 바주카포를 내버리더니 연합202 권총 한 자루를 뽑았다. 그리곤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스스로에게 총구를 돌렸다.
표정 변화와 함께 장목화의 팔이 구부러지고, 그대로 멈춰선 팔이 다시 총구를 바깥쪽으로 돌리려 했다.
그러나 음산한 느낌에 휩싸인 그녀는 재차 자신을 겨눴다.
지금 장목화의 안에선 두 영혼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주도권을 차지한 하나는 총으로 자살하려 하고 있었고, 제압당한 나머지 하나는 살고자 하는 본능에 따라 사력을 다해 저항하고 있었다.
이는 백새벽과 용여홍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역시 각자의 무기로 스스로를 겨누는 한편, 총구로부터 멀어지려 애를 쓰고 있었다.
게네바는 이 상황에 아무 혼란도 느끼지 않았다. 사전에 세워둔 참수 작전에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비책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령의 복도 급 강자로 의심되는 디마르코에게 대항하려면, 당연히 예방책이 필요했다.
구조팀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기이한 모습을 보인다면, 게네바는 곧장 이들을 기절시킨다. 이게 바로 게네바의 후속 임무였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게네바는 현재 가장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 용여홍임을 파악했다. 그 막강한 군용 외골격 장치에 장착된 각종 무기가 당장이라도 그를 삼킬 듯 겨누고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금속 관절 두 다리에 힘을 준 게네바가 그대로 훌쩍 뛰어올라 용여홍의 옆에 착지했다.
뒤이어 오른손을 들어 용여홍을 기절시키려는데, 갑자기 용여홍이 게네바를 향해 홱, 돌아섰다.
가려지지 않은 용여홍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장착된 유탄 발사기가 소리소문없이 게네바를 겨눴다.
외부 적의 위협을 받은 이때, 용여홍의 안에 존재하는 두 영혼은 의견 일치를 보았다. 하나는 기절 당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또 다른 하나는 본능에 따라 모든 기습에 저항하려 했다.
상황을 파악한 게네바는 착지한 순간의 반동을 이용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지금 용여홍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유탄 발사기로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것도 용여홍의 의지라 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모험을 하는 건 그야말로 객기나 다름없었다. 게네바는 빠른 판단하에 몸을 피했다.
고성능 유탄을 그대로 맞는다면, 게네바도 죽을 수 있었다. 명중당하지 않더라도 디마르코의 방에서 폭발한 유탄의 여파는 용여홍은 물론 장목화, 백새벽까지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터였다.
게네바가 한발 물러난 건, 바로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은흑색 로봇은 자신의 반응 속도와 기술을 이용해 용여홍과 장목화, 백새벽의 주위를 맴돌며 계속해서 시도에 나섰다.
함부로 냅다 달려드는 대신 인내심 있게 기회를 노리면서, 기절시킬 수 있는 사람부터 하나씩 처리할 작정이었다.
게네바의 이러한 시도 덕분에 장목화, 백새벽, 용여홍의 행동도 늦춰졌으며, 상황도 전보다 훨씬 덜 위태로워졌다.
* * *
기원의 바다, 산과 물이 흐르고 밝은 햇볕이 내리쬐는 섬 위.
수많은 성건우가 억지쟁이 능력을 쓰려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그때, 산봉우리처럼 거대한 디마르코의 인영이 성건우들을 내려다보며 전방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리고 우렁차고 장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시각 박탈!”
수많은 성건우의 눈앞에 소리 없는 어둠이 강림했다. 성건우들은 더 이상 어떤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심령 세계 속 의식 형태로 존재할 뿐이라 진정한 의미의 시각 신경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성건우들 모두가 시각을 박탈당했다.
깜깜한 어둠 속, 뒤이어 디마르코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청각 박탈!”
다음 순간, 성건우들의 주위에 무섭도록 무거운 적막이 찾아왔다. 이제 더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후각, 미각, 촉각 역시 차례로 역할을 잃었다.
죽음 같은 적막뿐인 어둠 속에선 그 존재마저 함께 힘을 잃는 듯했다.
이 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기원의 바다의 모처에, 성건우가 있었다.
남회색 제복을 입고 물속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는 해수면 밖으로 머리도 내밀지 않았다.
이것은 진정한 성건우이자, 최후의 그였다.
조금 전 성건우가 섬 위에서 사용한 성건우는 여덟뿐이었다. 나머지는 다 심령 세계의 특수성을 이용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지금 이곳에 자리한 성건우의 표정은 매우 냉정했다. 해저 속에서 뭔가 깊은 고민에 잠긴 듯했다.
* * *
디마르코의 방.
게네바가 구조팀을 기절시켜 이 기이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줄 기회를 노리던 그때, 갑자기 장목화의 얼굴과 몸이 경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온몸의 힘을 다 소진한 듯한 그녀는 단단히 움켜쥐었던 손을 느릿하게 풀면서 쥐고 있던 연합202 권총을 떨어뜨렸다.
권총이 도톰한 카펫에 떨어졌을 무렵, 장목화는 홀연히 왼손을 들어 올려 그대로 허공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녀는 아주 힘겹고도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라도 멈추게 될 듯 아슬아슬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그 대략적인 상황을 분석해낸 게네바는 혹여나 무슨 영향이라도 미칠까 싶어 더는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파직, 파지직, 파직-
마침내 한 덩어리 은백색 전광이 장목화의 손바닥 안에서 폭발했다. 위로 둥실 떠 올라 피어오르던 전광은 소리를 내며 어두운 방을 확 밝혔다.
거의 동시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성건우가 움켜쥐고 있던 왼손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펼쳤다.
그 안엔 때를 기다리던 황녹색 야명주가 있었다.
장목화의 왼손에서 점점 더 많은 아크가 뿜어지며 빛은 더욱 밝아졌다.
팟!
이내 은백색 빛 덩어리가 맹렬히 폭발하며 방 구석구석을 뒤덮었다.
본래 이 방을 감싸고 있던 미약하지만 이상한 전기장은 순간 혼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에 끝내 갈기갈기 찢겨 사라지는 눈처럼 빠르고 가차 없었다.
이로 인해 방 안의 어둠과 싸늘한 기운이 가시고, 구조팀의 들고 있던 손전등 빛도 원래의 밝기를 되찾았다.
그러다 사방을 휩쓸던 전광 일부가 백새벽과 용여홍의 몸에 떨어지며 그들을 살짝 자극했다. 말려 올라갔던 그들의 입꼬리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무차별적인 전기 충격에서, 장목화 역시도 목덜미의 솜털이 하나하나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동자 또한 조금씩 밝아지면서 원래의 색을 빛냈다.
한편,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봇 게네바는 대량의 전광을 흡수하며 흡사 은백색 뱀에 뒤덮인 꼴을 면치 못했지만 별 타격은 없었다.
이 역시 구조팀이 이번 작전을 짜는 동안 이러한 상황까지 고려한 결과였다. 만약 ‘지능 로봇 파견 근무 매뉴얼’에 ‘뇌우가 내리는 날에는 외출하지 말 것’이라든가 ‘천둥, 번개가 칠 때는 탄소 기반인 옆에 서 있지 말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다면.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장목화는 금속판을 열고 중요 인터페이스에 전류를 직접 주입한 후에야 율법 로봇의 과부하를 일으켰었다.
성건우가 들고 있던 황녹색 야명주 역시 두 갈래 전광에 맞아 진동하기 시작했다. 점점 불안정해지는가 싶던 야명주는 곧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