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제 발로 찾아오다
카를의 사무실은 굉장히 단순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구조팀에겐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반고 바이오 내, 여러 부서의 중급 사무실과 매우 닮은 모습이었다.
파일과 책이 꽂힌 책상 하나, 사무 탁자 하나, 소파 한 벌, 화분 하나, 등받이 의자 여러 개.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사무실 안에는 검은색 금고도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가면을 착용하지 않은 카를은 오늘도 약간 희끗한 머리를 뒤로 말끔히 빗어넘긴 상태였다.
자세도 남달랐다. 항상 그런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카를은 허리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었다.
“경계 교파의 신도가 아니신가 봅니다?”
장목화보다 성건우가 먼저 나섰다. 당연히 레드리버어로 한 질문이었다.
“전 주인님의 일에만 경계심을 곤두세우고 있지요.”
카를은 덤덤하게 답했다. 주인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안위 따윈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뜻이었다.
장목화는 곧장 한발 앞으로 나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시간 낭비하지 않도록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군용 외골격 장치를 가지고 계신가요? 한 대 구입하려고 하는데요.”
카를은 몇 초간 고민하다 답했다.
“큰손이 예약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그런 물건은 우리가 직접 사용합니다. 주인님은 본인의 안전에 상당히 신경 쓰시고 또 경계하시죠. 그런 물건을 사들이는 데 무엇도 개의치 않으시고, 프리미엄까지 붙여가며 구매하시죠.”
이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그러자 장목화는 조급해하는 대신 화제를 전환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카를 씨, 헬빅의 무기 강도 사건에 대해 알고 계시는 게 있나요?”
카를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당시 지하 방주 안에 있어서,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었죠.”
장목화가 말을 받았다.
“그럼 카를 씨 생각엔, 헬빅의 죽음이 누구와 연관됐을 것 같나요?”
카를은 살짝 무거워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무 많죠. 헬빅은 탐욕스럽고 잔인한 악인이었으니까요. 심지어 어인과 산 요괴들에게까지 무기를 팔아 불필요한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를 적대시하고 증오하는 사람은 이 레드스톤 마켓에 널리고 널렸어요. 게다가 헬빅은 무기 사업을 독점하려고 마을 주민들이 지하 방주를 적대시하게 선동까지 했었죠. 그의 죽음은 분명 달지기가 우리에게 내리는 은혜일 겁니다.”
이 대목에서 돌연 카를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장목화는 더 이상의 질문을 이어가는 대신 예의 바르게 작별을 고한 뒤, 팀원들을 데리고 레드스톤 마켓에서 빠져나왔다.
* * *
구조팀은 남는 시간 동안 지프를 몰고 유유자적하게 폐허 도시를 돌아다니며, 여러 구역의 지형적 특징을 기록했다.
그리고 점심시간 무렵, 네 사람은 다시 레드스톤 마켓 입구로 향했다.
한창 차가 달리던 도중이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갑자기 장목화의 눈빛이 급변했다. 그녀는 원체 외부 상황을 관찰하는 데 습관이 돼 있던 터라, 멀찍이 자리한 건물 중간 부분에서 익숙한 불빛이 번득이는 걸 목격했다.
“왼쪽으로!”
장목화가 황급히 외쳤다.
백새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핸들을 왼쪽으로 끝까지 꺾었다.
그와 동시에 바주카포 안에서 튀어나온 포탄 한 알이 지프로 날아들었다.
기습은 언제나처럼 불시에 닥쳐왔다.
지프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대로 왼쪽으로 미끄러졌다. 휘청거리는 사이에도 차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미친 듯이 왼쪽으로 방향을 튼 지프는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계속 덜컹덜컹 나아갔다.
다음 순간, 로켓탄이 떨어졌다.
콰광!
새빨간 불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부풀어 오르며 주위를 밝혔다. 덩달아 바깥쪽으로 확산된 충격파는 지프의 창문과 충돌했다.
다행히 지프차 창문은 무근자 야영지에서 방탄유리로 개조한 상태였다.
룸미러로 폭발한 광경을 확인한 장목화는 점점 미간을 구겼다.
뒤이어 백새벽은 재차 방향을 틀어 무너진 빌딩 뒤쪽으로 지프를 몰았다. 덕분에 구조팀은 습격자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콰광!
또 하나의 로켓포가 조금 전 지프가 지나쳤던 땅을 때렸다. 그 후,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멈춰!”
장목화가 외쳤다.
백새벽 역시 이유도 묻지 않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자 지프가 천연 바리케이드 뒤쪽에 멈춰 섰다.
성건우와 용여홍은 곧바로 차창을 내린 뒤 그 위에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얹었다. 혹시 주위에 있을지 모를 습격자를 경계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성건우가 안타깝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 녀석들, 사격 훈련을 제대로 받아야겠어.”
장목화도 그의 말에 반박하기보단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저 습격자, 아무래도 우리를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
“왜요?”
용여홍은 언제나처럼 자신이 모르는 것에 관한 질문을 꺼리지 않았다.
“만약 내가 미리 발견하지 못했거나, 지프가 원래 가던 대로 계속 앞으로 갔더라도 첫 번째 로켓포는 다른 곳에 떨어졌을 거야.”
장목화가 설명했다.
성건우는 진지하게 그 이유를 고민해보았다.
“팀장님의 판단력까지 감안해서 예측 사격한 거 아닐까요?”
장목화가 그를 살짝 노려보았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새벽이한테 저 건물 안으로 차를 몰라고 하겠어? 첫 번째 로켓포는 전방으로 비스듬히 떨어진 고층 건물 입구에 떨어졌어.”
성건우는 습관처럼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내리쳤다.
“아, 알겠다. 실력이 워낙 형편없어서 애초에 맞힐 수 없었나 보네.”
장목화는 참 짜증이 나는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왜 굳이 우리를 습격하려 했을까?”
성건우는 다시 몇 초간 고민하다가 두 손바닥을 부딪쳤다.
“미인을 얻으려고요!”
장목화는 금세 성건우의 말을 이해했지만, 그래도 그의 특이한 생각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순 없었다.
‘정말로 정신이 나간 사람을 어떻게 이기겠어.’
그저 속으로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용여홍은 성건우가 어디에서 그런 논리의 근거를 배웠을지 어렴풋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아마 라디오 프로그램일 것이었다.
이때, 백새벽이 짧은 침묵을 깼다.
“우리를 놀라게 하려는 거겠죠.”
장목화도 이제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아마 경고일 거야. 이전에 왔던 경고장과 비슷한 셈이지.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고. 우리를 자극해서 무기 강도 사건이나 헬빅 사망 사건에 깊이 파고들게 하려는 거야.”
“그럼 이제 어쩌죠? 여긴 위드 시티보다 훨씬 혼란스러운 것 같네요.”
용여홍의 목소리에 다시금 걱정이 약간 묻어났다.
절차에 따라 무기를 찾고 임무를 완수한다면 위험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한 채 레드스톤 마켓을 떠나기에는 아무래도 찝찝했다.
“이미 알고 있던 거잖아? 내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건 이거야. 방금 그 습격자와 사주한 사람을 찾아 한데 묶어놓고 그들 주위에 로켓포를 쏘는 거지. 조금 전 우리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직접 경험하게 해 주는 거야!”
이 말을 한 장목화는 너무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순간 성건우의 눈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인데요?”
그제야 장목화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일단 레드스톤 마켓으로 돌아가서 이 일을 한명호에게 알리고, 그 사람의 반응을 살펴보자.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정하는 거야.”
“좋아요.”
용여홍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팀 내에 위험한 미치광이는 건우 한 명으로도 족하지. 팀장까지 그런다면 정말 힘들어질 거야!’
* * *
레드스톤 마켓, 치안소 안.
“한 대장은?”
장목화가 의사 웰러에게 물었다.
웰러는 여전히 수염을 깎지 않은 탓에 인상이 꽤 거칠어 보였다.
“팀을 짜서 호숫가로 갔어. 어인 쪽에 무슨 이상이 있는지 보러 간다던데.”
“언제 오는데?”
이어진 장목화의 질문에, 웰러는 고개를 저었다.
“어인에게 정말로 무슨 일이 생겼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나도 말이지, 연합 공업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만 아니면 이렇게 후진 곳에 처박혀 있지 않았을 거야. 밖에는 아류인이 있지, 안에는 분쟁이 끊이지 않지, 아침부터 밤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고, 설령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웰러가 짤막한 한숨을 흘려보냈다. 여자를 좋아하는 이 의사는 연애라고는 좀처럼 할 수 없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괴로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사실 레드스톤 마켓에서의 연애란 거의 운에 달린 일이었다. 가면을 벗고 옷을 벗기 전까지는 성별도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에이돌른을 믿고 경계심을 숭상하는 레드스톤 마켓의 주민들은 상대를 약탈할 작정이 아닌 이상 좀처럼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장목화는 웰러의 불평이 불편하기는커녕 흥미로운 듯했다.
“좀 궁금하네. 레드스톤 마켓의 주민들은 어떻게 서로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는 거야?”
웰러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나란히 서서 아류인과 외부 강도들에게 맞설 때, 함께 밀수 사업을 할 때, 밖에 나가 사냥할 때, 이따금 폐허 안에서 마주칠 때 감정이 생기나 보지.
그래, 경계 교파에는 이런 활동도 있다고 들었어. 짝을 원하지만 상대가 없는 신도들을 모아 성별대로 편을 가르는 거야. 그런 뒤에 제비뽑기로 숨을 사람과 찾을 사람을 결정하는 거지.
찾기를 맡은 사람에게는 본인이 찾아낸 사람과 결혼할 기회가 한 번 생긴대. 다들 그게 에이돌른의 계시라고 믿어서, 감히 결과를 어기는 행동을 하지는 못하고.”
‘그게 통한다고?’
용여홍은 한동안 살짝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은 참으로 넓으며, 신기한 일들도 많았다.
“재미있는 풍습이네.”
장목화는 어떤 평가를 내리는 대신 짤막한 감상만 밝혔다.
이때 성건우가 물었다.
“아무도 못 찾으면?”
“그건 아직 결혼하기 적합하지 않다는 달지기의 계시인 거지.”
웰러가 답했다.
“달지기도 참 바쁘겠네.”
성건우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용여홍도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어디선가 이 기회를 틈타 자신을 놀리는 성건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럼 여홍이 너도 아무도 못 찾겠네.’
반면 장목화는 이곳 풍속을 더 파악하게 된 게 퍽 만족스러운 듯했다.
“한 대장이 돌아오면 여관 구역으로 우리를 찾아와달라고 좀 전해줘.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알겠어.”
눈치 빠른 웰러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 * *
다시 여관으로 돌아온 구조팀은 차를 잘 세워두고 05, 06호로 향했다.
그런데 미처 방 근처에 이르기도 전, 돌연 고개를 돌린 장목화가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곧장 반응하는 대신 앞으로 몇 걸음 더 나아간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매고 있던 전술 배낭을 앞쪽으로 홱 끌어온 성건우가 소형 스피커를 꺼내며 큰소리로 외쳤다.
“넌 이미 포위됐다!”
백새벽과 용여홍도 권총을 뽑아들었다. 오랫동안 함께 부대껴 온 까닭에, 그들은 이제 장목화와 성건우가 시선을 주고받는 모습만 보고도 방에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끼익-
짧은 침묵 후, 06호의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안에서 금속으로 만들어진 듯한 검은색 가면을 쓴 남자가 나왔다. 린넨색 머리카락은 오래도록 빗질한 적이 없는 듯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자신을 향한 시커먼 총구에 급히 뒤로 물러난 남자가 조그맣게 말했다.
“나 버즈야…….”
“뭐? 뭐라고?”
장목화가 큰소리로 물었다.
다시 몇 초간 침묵하던 버즈는 목청을 높였다.
“헬빅의 수하 버즈라고! 너희들, 날 찾아왔었잖아.”
“땅굴을 잘 파던?”
사실 장목화는 진작에 각종 특징을 보고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
버즈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왜 우리를 찾아왔지?”
장목화는 굉장히 여유로운 모습으로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버즈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겁을 잔뜩 먹은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누군가가 날 죽이려 하고 있어!”
우아한 중 가면을 쓴 장목화는 바로 답을 건넸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