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92화 (192/649)

192화. 끝까지 처음 그 마음으로

짝짝짝!

성건우가 또 한 번 손뼉을 쳤다.

“혹시 가족이 다칠까 걱정되진 않아?”

장목화의 물음에, 한명호가 자조하듯 웃었다.

“난 황야유랑자고 유적 사냥꾼이야. 나한테 가족이 있을 리가 없지. 과거 동료들도 내가 치안관이 되기로 하니까 다른 곳으로 떠났어.”

“아내도 없어?”

용여홍은 예리하게 그 점을 짚었다.

“레드스톤 마켓의 치안 질서가 어느 정도 잡히기 시작하고, 나도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사직할 생각이야. 결혼은 그다음에 생각해봐야지.”

한명호가 답을 마치자마자, 성건우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혼란스러워하는 한명호를 보고, 장목화가 한숨을 쉬며 얼른 설명했다.

“너한테도 목표가 있듯, 얘한테도 목표가 있거든. 네가 목표를 위해 어느 정도 너 자신을 희생한 것처럼, 얘도 목표를 위해 희생하려 해. 그래서 너한테 지금 악수를 청하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있던 용여홍이 남몰래 조용히 웃었다.

‘팀장님도 건우의 추리 광대 시전법에 전염된 모양이네.’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상대에게 호의를 느낀 한명호는 거절하지 않고 오른손을 내밀어 성건우와 악수를 했다.

이제 장목화는 성건우에게 더 이상의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곧장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기에 헬빅의 죽음과 이전에 있었던 그 사건들이랑은 다르다는 거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이전 그 범인이 조용해진 지는 벌써 2년이 지났다. 그렇다면 최근에야 그와 비슷한 각성자가 또 나타난 것인지도 몰랐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쇼크 능력이 달지기 에이돌른의 영역과 경계 교파의 범위 안에 속해 있어야 했다. 그게 아니면 비슷한 각성자가 같은 장소에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확인이 필요했다.

“그래. 이건 내가 정리한 용의자 명단이야. 전부 헬빅과 이해 충돌이 있었던 자들이지.”

한명호가 또 종이 한 뭉치를 밀어주었다.

장목화의 시선은 곧 첫 번째 용의자 앞에서 멈췄다.

「카를 스트리, 디마르코 선생의 집사. 레드스톤 마켓의 최대 무기상. 현재 헬빅과 리만을 두고 경쟁하고 있음.」

이를 한번 훑어본 뒤, 장목화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복사기가 있어? 한 부 복사해서 천천히 보려고.”

그러자 한명호가 웃었다.

“그럼 통조림 하나.”

연합 공업 암거래장인 이곳에 흔히 볼 수 있는 기계가 없을 리 없었다. 그저 널리 보급되어 있지 않을 뿐이었다.

* * *

자료를 건네받은 뒤, 구조팀은 치안소를 나섰다.

장목화가 제일 먼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껏 이 점을 소홀히 하고 있었어. 헬빅이 임무를 만들어 외부인을 끌어들이고 경계 교파의 믿음을 얻으려 한 건, 단순히 갈등을 불러일으켜서 애쉬랜더를 공격하기 위한 게 아니었는지도 몰라. 지하 방주와 디마르코를 노린 것이었을지도 모르지. 하하, 추측일 뿐이라 더 조사 해야 하겠지만.”

용여홍이 물었다.

“팀장님, 그럼 이제 우리는 뭘 조사해야 할까요?”

“말했잖아. 일단 이틀 정도 게으름을 피우면서, 테레사 말고 또 누가 우리를 찾아올지 기다려 보자. 자! 이제 가자, 가서 낮잠이나 좀 자자고. 건우에게 섬을 이겨낼 기회도 줄 겸.”

장목화는 웃으며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 * *

여관 구역, 05호.

장목화는 자신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어때? 질병에 대해 많이 이해하게 된 것 같아?”

성건우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질병 대부분은 외부적인 감염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았어요. 자기 자신을 잘 보호하고, 정해진 절차를 엄격히 준수하기만 하면 병이 날 리는 없다는 거죠.”

“맞는 말이지.”

장목화가 평가했다.

막강한 행동력을 가진 성건우는 곧장 침대 위에 누워선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 * *

어스름한 빛으로 일렁이는 기원의 바다 안.

성건우는 그때 그 책략에 따라 추리 광대를 발휘했다.

그는 ‘내가 곧 반고 바이오’라고 스스로를 인식한 뒤 질병 섬 위로 올랐다.

곧이어 흰 침대보를 뒤집어쓴 인영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온 세상을 다 뒤덮을 듯한 기세였다.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던 성건우는 스스로를 반고 바이오의 수많은 직원처럼 여러 인영으로 분열시켰다.

그렇게 나타난 인영 중 일부는 대대적으로 모여들면서 시설이 완비된 병원이 되었다. 살균 구역, 환자 구역 등 여러 구역으로 나뉜 병원에서는 엄격하게 감염을 통제했다.

남은 성건우들도 각자 소임을 다했다.

어떤 성건우들은 마스크를 쓰고, 우월한 숫자를 바탕으로 흰 침대보를 뒤집어쓴 무시무시한 인영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려 들것 성건우에 실었다.

또한 어떤 성건우들은 그 들것을 가지고 성건우 병원으로 향한 뒤 절차에 따라 병동으로 이송시켰다. 한편 성건우 보안경과 성건우 방호복을 입은 의사 성건우는 간호사 성건우와 함께 성건우 소독약을 사용한 뒤, 살균 구역으로 들어가선 성건우 주사를 이용해 환자를 치료했다.

이 과정엔 성건우 소독약과 성건우 마스크, 성건우 의료용 알콜, 성건우 방호복 등의 물건이 끊임없이 소모됐다. 하지만 의사 성건우과 간호사 성건우들은 덕분에 전혀 감염되지 않고 계속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자 성건우들의 감소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흰 침대보를 뒤집어쓴 인영들만 성공적으로 치료되어 병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처음으로 성건우들이 우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랜 대항을 거친 끝에 흰색 침대보를 뒤집어쓴 인영들이 점점 줄어들더니, 결국 섬에는 성건우들만 남게 되었다.

의사 성건우들과 간호사 성건우들은 이 광경을 보고 느릿하게 한숨을 토해내며 성건우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강렬한 피로가 느껴졌다.

그 순간, 그들의 몸은 점차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뭔가가 그들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던 의사 성건우들과 간호사 성건우들은 그들이 입고 있던 흰 가운과 방호복이 어느새 흰 침대보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점차 거대한 침대보에 뒤덮인 그들은 컴컴한 그림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질병이 생겨난 것이었다.

* * *

눈을 번쩍 뜬 성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때?”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있던 장목화가 물었다. 그녀는 개킨 이불로 등을 받친 다음, 베개를 세워서 뒤통수를 받치고 있었다.

성건우가 눈을 살짝 빛내며 답했다.

“거의 이길 뻔했어요!”

“음?”

장목화는 콧소리만으로 의문을 표했다.

성건우의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감염을 통제하고 그들을 모두 때려눕히는 데까진 성공했어요. 근데 거의 끝나려던 최후의 순간에 우린 알 수 없는 이유로 또 병이 났어요.”

장목화가 황급히 그를 저지했다.

“잠깐, 잠깐만. 현실로 돌아왔으니 우리란 표현은 좀 넣어두자. 그래서는 네 병만 가중될 테니까. 심령 세계에서는 천 갈래, 만 갈래로 분열됐더라도 현실에 지금 네 육신은 단 하나뿐이야.”

“맞아요. 현실에 주어진 육신도 많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최후의 순간, 병이 나기 전에는 어떤 느낌이었어?”

장목화는 성건우가 더는 이러한 생각에 집착하지 않도록 화제를 전환했다.

“굉장히 지쳐있었고 너무 피곤했어요. 매우 허약해진 느낌이었어요.”

성건우가 답했다.

장목화는 잠시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다.

“병이 꼭 감염에서 비롯되는 건 아냐. 자체적으로 특정 기관 조직에 병이 생길 수도 있고, 세포 분열 중에 악성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어. 유전, 정신 상태, 신체 상황, 습관 등의 요소랑 다 관련된 거지. 감염 되지 않도록 잘 막는다고 해서 병이 나지 않는 건 아니라는 뜻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성건우도 최근 들고 있던 책을 허투루 본 건 아니었다.

그런데 장목화는 오히려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심령 세계의 두려움은 너 자신의 인지랑 직결돼있어. 만약 네 잠재의식이 질병은 감염에서만 비롯된다고 믿었다면, 넌 벌써 그 흰 침대보를 뒤집어쓴 녀석들을 이기고 극복했을지도 몰라.”

성건우의 눈이 밝아졌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어요.”

장목화가 웃었다.

“지금은 안 될걸. 네 추리 광대는 표면적인 인지만 오도하면서 저도 모르게 특정 기억을 소홀히 하거나 일부 상황을 상상하게 할 뿐이잖아. 기억을 실제로 조작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잠재의식에 영향을 미칠 순 없단 말이지.

기원의 바다 안에 자리한 각각의 섬들은 네 기억과 잠재의식을 반영한 존재일 거야. 네가 아무리 스스로를 속여봤자, 그것들에는 네가 알고 있는 실제 상황이 적용된다는 거지.

진짜 신부의 기억 곡해 능력, 혹은 회사에 있던 그 각성자의 기억 삭제 능력이 이런 방면에 효력을 발휘할지는 모르겠네.

음, 충분한 예시가 있거나 시도를 많이 해보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들의 능력이 정말로 기억을 바꾸고 장기적으로 오도할 수 있을지는 판단할 수가 없어.”

팀장의 이야기를 듣던 성건우는 종이와 펜을 챙겨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뭘 적는 거야?”

장목화가 침대에서 내려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성건우는 이미 제목을 다 작성한 상태였다.

「진짜 신부 체포 계획」

장목화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결국 그녀는 손을 들고 양쪽 입꼬리를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의 능력에 의지하는 건 엄청 위험한 일이야. 제일 간단하게 추리해보면, 뭐, 질병 섬을 극복할 수 있더라도 곧장 기억 섬을 마주하게 되겠지. 네 잠재의식 속 기억이 곡해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그 섬 말이야.

기억은 개인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야. 그런 방면에서 기인하는 두려움은 질병의 10배, 100배에 달하게 될걸? 극복할 방법이 없는 거야. 만약 기억 조작을 포기하고 원상태로 복구시키면 질병 섬이 되살아날 테고.

생각해봐, 가짜 신부는 줄곧 특정 섬에 발이 묶여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고 했잖아.”

성건우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장목화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넌 지금 거의 90퍼센트 정도 승리를 거뒀어. 자체적으로 발병하는 질병에 대해 조금 더 파악하고 방법만 살짝 바꾸면 머지않아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네.”

성건우는 어느 부분부터 손대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장목화 역시 그의 고민을 돕기 위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치료 물자를 좀 구한 다음 레드스톤 마켓에서 무료 진료를 해보는 게 어때? 무료 진료만 하는 거라면 의학 교육을 정식으로 받을 필요는 없어. 다양한 환자들을 만나면, 질병에 대해 더 깊이 파악할 수도 있을 테고.

환자 입장에선 어떤 방법이든 약을 구하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희망을 안고서 많이들 찾아올 거야.”

성건우는 펜과 종이를 내려 두고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을 쳤다.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갑작스레 열의를 보이는 성건우의 모습에 장목화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레드스톤 마켓 사람들은 경계심이 상당히 높잖아. 약을 먹고 진찰을 받을 때도 계속 상대를 경계할 거야.’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지금은 남는 의료 물자도 없어서 이 계획은 좀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낮잠을 한숨 잔 구조팀은 방에서 머신헤븐과의 접촉 방안을 세우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구세계 이야기도 나누고, 여관 구역의 탁 트인 공터에서 격투 훈련도 하다보니, 어느새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