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속임수
크리스티나는 남자를 보며 약간 촉촉해진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허양원이 살아남는다면 어쨌든 날 경계할 거야. 사력을 다해 본부에 나를 전출시켜 달라고 요구하겠지. 그 사람한텐 이유도 필요 없어. 나를 통제한 뒤 우딕의 각성자 능력을 이용해 단서를 찾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고.
만약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 아니었다면 난 절대 네 작전에 참여 안 했을 거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네가 방금 사용한 실제적 환각 능력은 말인 영역의 능력 같지 않던데? 그보단 오히려 깨진 거울의 은혜에 가까워 보였어.”
환각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깨진 거울은 11월을 관장하는 달지기였다.
다크서클이 심한 남자는 웃으며 크리스티나의 말을 무시했다. 그의 능력은 분명 말인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저 약간의 속임수를 썼을 뿐이었다.
몽환 여행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능력은 목표의 특정 기억을 자극하면서 그것을 통해 실제적인 환각을 일으켰다.
이런 능력을 가진 각성자는 대부분 적을 혼란과 무지, 두려움에 잠식시킬 정도로만 능력을 사용했다. 보통 그들은 이 능력이 여러 사람의 기억을 동시에 자극해, 공통으로 작용하는 환각을 여러 개나 만들어낼 수 있는 범위형 능력이란 사실을 잊곤 했다.
하지만 다크서클이 짙은 이 남자는 여러 차례의 시도를 거친 끝에 이러한 환각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기술을 파악해냈다. 큰 규모의 환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이 환각은 목표 대상이 이것이 환각이라는 걸 깨우치기 전까지 몇 분 정도 유지되었다. 그 사이에 그는 능력을 전환하면서 최면 기술로 환각의 내용을 발전시킬 수도 있었다.
최면은 효력 범위가 굉장히 좁은 능력이었다. 해당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매번 5미터 반경 이내로 적과 접근해야 할 뿐 아니라, 상대와 직접 눈을 맞춰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의 정신이 외부로 확장된 채, 다른 이와 연결돼 같은 환각에 빠진 상태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최면 능력자는 그 환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얕은 수준의 최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 일단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자신에게 대응하는 환경을 바꾼 뒤, 정신적인 연결을 통해 다른 사람의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그럼 그 환경의 변화를 이용해 어느 정도 암시를 걸 수도 있었다.
이러한 방법을 이용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두 가지였다.
일단 실제적인 환각 안에서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예행 연습하면서 목표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론 앞으로의 행동에 도움이 되는 간단한 최면 몇 가지를 걸 수도 있었다.
전자를 통해 정념의 능력 대부분을 파악한 남자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었다. 본인이 인간으로서의 의식이 사라지면 곧장 상황을 파악해 도망치는 한편, 사람의 말로 고함을 지르는 유인원이 되도록 만들어 축생도에 대처하는 최면이었다.
또한 후자로는, 정념과 허양원에게 경호원이 다섯 명이라는 생각을 심어둔 그는 몰래 그들에게 접근하면서 주위 경호원들에게 최면을 걸 수 있었다.
이내 크리스티나가 아무 답도 않는 상대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기원의 바다에서 자신을 찾았나 보군. 그를 이기기만 한다면 심령의 복도에 진입할 수 있는 상황인 거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다고 치지.”
남자는 웃으며 시선을 거둔 뒤 사무실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크리스티나가 바로 그를 불러세웠다.
“반고 바이오 녀석들을 데리고 노스 스트리트로 가는 거 잊지 마. 우리에게는 주요 빌런이 필요하니까.”
“이미 보내뒀어.”
남자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네가 신부라면, 병원에 있는 건 누구지?”
크리스티나가 그를 보며 물었다.
다크서클이 진한 남자가 씩,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를 신부로 여길 때는 그가 곧 신부인 거야. 온몸과 마음으로 신을 믿으시길.”
그는 양손을 들고 자신의 눈을 가리며 반 지성교의 예를 갖췄다. 그러고는 곧장 돌아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크리스티나는 돌연 기억 속 상대의 모습이 순간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특징조차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이 살짝 촉촉해지는가 싶던 그녀는 다리를 살짝 오므리며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네⋯⋯.”
* * *
노스 스트리트, 위드 시티 제1 병원.
장목화와 성건우는 문제를 발견하고 눈앞의 상대가 진정한 신부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여전히 현장에 남아 있었다.
일단 우딕과 배윤수, 임보경, 거기에 신부라 자칭한 남자를 바깥 공터에 옮겨둔 그들은 최대한 빨리 우딕과 회사 동료들을 깨우려 했다. 허양원의 곁에 있던 영생인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있는 한 허양원의 안전은 보장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허양원과 별다른 관계도 아니었다. 장목화는 사실 그저 한번 만나 구두 약속만 했을 뿐인 남자의 안위에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녀는 일단 얼른 배윤수와 임보경을 깨워 위보배, 노기호, 김원해의 행방을 파악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선 아니던가. 이는 장목화의 구조팀이 위드 시티에 파견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때, 우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코에 문제가 생긴 건지, 신 냄새를 너무 많이 맡은 탓에 재채기를 하다가 혼절 직전까지 갔기 때문인지, 마취 가스를 극소량만 마신 데다 본래 신체적으로 강한 사람인 우딕은 결국 넷 중에 가장 먼저 깨어났다.
우딕은 가만히 장목화와 성건우를 바라보다 순간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신부는?”
“조용, 깨우면 안 돼.”
성건우가 검지를 입 앞에 갖다 댔다.
“그렇게 쉽게 깨지는 않을 거야.”
장목화는 즉각 성건우를 말렸다. 그는 우딕을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물론 성건우의 의도는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신부의 능력은 강했고, 최면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 자가 깨어난다면 상황은 퍽 골치 아파질 것이 뻔했다.
그 사이, 똑바로 일어선 우딕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는 그들에게 어떻게 신부를 처리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부러 묻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딕은 그저 조용히 감탄만 내뱉었다.
“너희 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네.”
우딕은 처음에 대형 세력 출신인 듯 보이는 두 사람이 그냥 적당한 실력을 가졌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 수준은 예상보다 한참이나 더 높았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할 때가 아냐. 내가 생각하기에 이 녀석은 진짜 신부가 아닌 것 같아. 일단 성주한테 연락부터 해봐.”
장목화가 신부로 의심되는 창백한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나간 일을 반추하던 우딕도 스멀스멀 의심이 피어올랐다. 황급히 구세계에서 ‘핸드폰’이라고 불리던 전자기기를 꺼낸 그는 머신헤븐에서 세운 현지 기지국을 통해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빠르게 연결되었다. 일단 경고부터 한 뒤 답을 받은 우딕은 이쪽의 상황을 간단히 보고했다. 그리고 성건우가 계속 눈짓, 손짓을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내 전화를 끊은 그가 성건우와 장목화에게 말했다.
“역시 성주 쪽에 진짜 신부의 기습이 있었어. 다행히 아주 강력한 경호원 덕에 무사하다네. 성주 호위대 일부가 곧 여기 도착해 일을 인수할 거야.”
장목화는 고개를 숙여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배윤수와 임보경을 바라보았다.
“이 두 사람은 우리가 데려가도 돼? 신부로 의심되는 이 녀석은 넘길게.”
코가 여전히 빨간 우딕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답했다.
“좋아, 근데 그냥 데려가려면 불편하기도 하고 사람들 이목도 끌 거야. 내 차 타고 가.”
그의 새빨간 SUV는 제1 병원 정문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고마워.”
성건우와 함께 입을 모아 감사의 뜻을 표한 장목화가 물었다.
“근데 사우스 스트리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물어봤어?”
그녀도 어느 정도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확실한 정보가 필요했다.
우딕은 수류탄을 던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재채기 지옥에 빠졌다가 아예 정신을 잃어버려서, 사우스 스트리트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거기다 조금 전 상황이 워낙 긴박했던 까닭에 허양원에게 다른 정보를 얻을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물어볼게.”
다시 핸드폰을 든 우딕이 다른 번호를 눌렀다.
이 기회를 틈타 쪼그려 앉은 장목화는 가짜 신부의 몸을 더듬으며 혹시 유용한 단서가 있는지 확인했다.
곧 가짜 신부의 옷 주머니 안에서 쪽지 하나를 찾아냈다. 쪽지엔 애쉬랜드어와 레드리버어로 병기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건 성주의 특별 비준 통행증이다.」
이 문장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도장도, 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장목화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통행증을 가지고 노스 스트리트에 그렇게 손쉽게 진입한 거야?”
“이게 통했다니⋯⋯.”
성건우는 자기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듯 눈을 번득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장목화가 피식 웃으며 핀잔을 줬다.
“아서라, 최면도 모르면서 무슨.”
정말로 시도해보려거든 최소한 당근으로 판 도장이라도 찍는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었다.
그 사이, 우딕은 통화를 마쳤다.
“성문 밖의 황야유랑자들이 소동을 일으켰대. 이미 도시 안으로 들이닥쳐서 난리가 났다는데.”
“역시.”
장목화는 벨트에 걸어둔 무전기를 꺼내 백새벽과 용여홍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반응은 없었다.
“범위를 벗어난 모양이네.”
한숨을 내쉰 장목화가 우딕에게 말했다.
“우린 사우스 스트리트로 돌아가야겠어. 우리 동료들이 혹시라도 그 소동에 휘말리면 안 되니까.”
“잘됐네, 어차피 이 두 사람 데리고 내 차로 갈 예정이었잖아.”
우딕은 그녀의 상황을 아주 잘 이해해주었다.
“좋아, 차는 어떻게 돌려주면 돼?”
장목화는 겸손의 미덕을 발휘할 여유가 없었다.
“소란이 빠르게 끝나면 길드로 가져와. 좀 길게 이어질 것 같으면 성주 저택으로 찾아오면 될 거야. 차에 특별 통행증이 하나 있으니까.”
우딕이 간단히 설명했다.
성건우와 장목화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각자 배윤수와 임보경을 둘러맨 그들은 빠르게 제1 병원 정문 근처로 돌아갔다.
* * *
우딕이 준 차 키를 써서 차에 오르자, 이쪽 상황을 처리할 성주 호위대가 그제야 막 도착했다. 하지만 장목화와 성건우는 특별 통행증이 있어, 크게 힘들이지 않고 성주 호위대로부터 빠져나와 중앙 광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곳에 이른 순간부터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총성이 더욱 또렷하게 다가왔다. 길 곳곳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려 있기도 했다.
죽음엔 성역이 없었다. 시체들을 보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 죽인 것 같았다. 어떤 시신은 온전치도 못했으며, 어떤 시체는 목 졸려 죽은 듯 보이기도 했다.
나름 옷을 잘 갖춰 입은 이가 있는 반면 행색이 남루한 이도 있었다. 또한 평범한 일상복이 아닌 도시 방위군 제복을 입은 이도 있었고, 총을 쥔 사냥꾼처럼 보이는 이도 있었다.
이 시신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주위 바닥에 흩뿌려진 붉은 피와 함께 하나같이 몸에 대량의 총알구멍이 나 있다는 것이었다.
거리 가장자리와 골목길 입구에는 적지 않은 이들이 앉아, 입에 옥수수빵을 잔뜩 쑤셔 넣은 채 이 소란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에 가담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았다.
이 참혹한 광경 앞에서 장목화와 성건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