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정념
가운 차림의 사람은 그제야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허양원과 뒤쪽에서 나타난 세 습격자 사이를 가로막았다.
탕탕탕!
가운을 입은 그자를 향해 대량의 총알이 쏟아졌다. 그러나 총격 속에서도 옷만 조금 찢어졌을 뿐, 그자는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다음 순간, 그는 입고 있던 가운을 쭉 찢었다. 그러자 검은 금속 골조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몸과 위협적인 기계 부품이 드러나더니, 그가 한 손을 들어 올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빈승은 이미 그러한 감각을 느끼지 못합니다. 간지러운 느낌은 들더라도 충분히 참아낼 수 있습니다. 그저 한낱 환각을 마주한 것처럼 말입니다.”
조금 전 크리스티나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는 역시나 이 황원에서 생활하는 기계 승려였다.
그때, 크리스티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다른 느낌이라면? 네 욕망을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있는데.”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허양원과 그의 다섯 경호원이 느끼던 극심한 가려움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기계 승려의 눈에서 번득이는 붉은 빛은 매우 밝아졌다.
“성욕을 폭발시키겠다는 겁니까? 역시 각성자였군요. 만다라를 믿는 각성자. 시주님, 빈승은 정법 사제 같은 그런 승려가 아닙니다. 힘겹기는 해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어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기계 승려가 합장을 한 채 침착하게 말했다.
그 사이 허양원과 경호원 다섯 명은 이미 몸을 숨긴 채 위보배, 노기호, 김원해와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총격전의 핵심 지대에 자리한 기계 승려는 쉴새 없이 날아드는 총알에도 굴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냥 한바탕 폭우를 맞는 모양새였다.
이내 크리스티나가 골반에 손을 얹고 몸을 살짝 숙였다.
“그래도 영향은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만다라는 우리 마음속에 계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쩐지 그 웃음은 좀 거룩해 보였다.
“시주님, 세상의 모든 것은 허상입니다. 욕망도 마찬가지죠. 육신의 쾌락에 심취하면 결국 그것에 구속되어 속세의 짐승으로 변하고 맙니다.”
기계 승려가 내뱉는 전자 합성음에는 약간의 자비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재차 합장한 그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도윤회, 축생도(畜生道).”
이 말이 시작되자, 크리스티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야수의 허상을 보게 되었다. 늑대, 호랑이, 하이에나, 멧돼지 등의 야수들이 전부 번득이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 아래, 크리스티나의 자아 인지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 역시 어느새 한 마리 늑대로 변해 있음을 깨달았다. 거친 흑회색 털로 뒤덮인 몸에는 마른 풀 같은 꼬리도 나 있었다.
두려움과 혼란에 빠진 그녀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짐승의 울음소리뿐이었다.
허양원의 시야에, 크리스티나와 습격자 세 명의 기괴한 모습이 들어찼다.
그들은 갑자기 괴이한 자세로 엎드려 네발로 기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아우-!”
그들의 눈동자에서 지성의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 허양원은 숨었던 곳에서 나와 두려움과 흥분이 동시에 어린 눈빛을 드러냈다.
“하하⋯⋯. 나한테 평범한 경호원들만 있을 줄 알았나? 내 경호원들이 오직 길드에서 고용한 고급 사냥꾼들만 있는 줄 알았어? 정념 대사 덕분에 날 암살하려 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도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지.”
다섯 명의 경호원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기계 승려를 바라보았다.
승복도, 가사도 걸치지 않고 금속 골조와 중무기로 이루어진 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정념은 고승과 같은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념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빈승이 스스로를 비쳐 본 끝에 얻은 가장 중요한 신통술이 바로 그것, 예지지요.”
그때, 사우스 스트리트 쪽에서 퍼지던 총성이 돌연 희미해졌다. 덩달아 강하게 흔들리던 사냥꾼 길드 건물은 순간 한바탕 꿈처럼 산산이 조각났다.
바르르 몸서리를 친 허양원은 자신이 아직 회장 사무실에 자리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방금 막 전화를 끊은 상태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허양원이 후드를 쓴 기계 승려 정념을 바라보았다.
“선사, 방금⋯⋯.”
“빈승 역시 환각에 끌려들어 크리스티나 시주와 한 차례 겨루었습니다. 달지기 말인이 관장하는 영역의 능력과 매우 비슷하군요.”
그가 말을 맺기도 전, 정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허양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인이라면⋯⋯. 반 지성교가 믿는 달지기 아닙니까? 신부? 그는 제1 병원에 있었잖아요? 혹시 그들 중에 다른 각성자도 있는 겁니까?”
“지금으로서는 크리스티나에게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가 없겠습니다. 환각 속 크리스티나는 욕망 성인 교회에 속한 것 같은 모습을 보였어요. 만약 크리스티나가 정말로 이 일에 관련돼있다면, 그건 퍼스트 시티에서 저를 죽이려 하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허 시주님, 어쨌든 최대한 빨리 여길 떠나 저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정념은 낮은 목소리로 염불을 외웠다.
조금 전 공동 환각으로 인해 그의 정체와 두 가지 능력은 이미 완전히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그 사실에 정념은 위기가 닥쳐오리란 걸 예감했다.
“알겠어요!”
허양원은 자신의 권총을 뽑아 든 채 문 쪽으로 향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섯 명의 경호원은 곧장 방패가 되어 그를 에워쌌다.
이들은 자신의 몸으로라도 총알을 막아 성주를 지킬 각오가 되어있었다. 성주만 죽지 않는다면 그들의 희생으로 가족들만큼은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최고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허양원의 분부에, 한 경호원이 곧장 답했다.
“예, 성주님! 저희도 방금 그 환각에 끌려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압니다.”
허양원은 그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진 상대는 매우 피곤해 보였으나 눈빛만큼은 매우 깊게 빛났다.
이내 허양원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일만 마무리되면 내 섭섭지 않게 보상하도록 하지!”
이때, 정념의 눈동자에서 번득이던 붉은빛이 돌연 더 짙어졌다.
그의 보조 칩은 분명 이전까지 사무실 밖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은 넷뿐이었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의 실제 의식은 경호원의 총인원은 다섯 명이고, 현재 상황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군⋯⋯.’
정념은 곧장 영향 범위가 가장 넓은 축생도를 무차별적으로 발휘하려 했다. 그 순간, 경호원 다섯 명이 동시에 총을 들고 허양원을 겨눴다.
그들 중 네 명의 눈빛은 멍하고 흐릿했다. 성주가 아니라 철천지원수를 마주하고 있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곧이어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분분히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탕탕!
다섯 개의 총구에서 튀어나온 총알들은 모두 허양원에게로 쏟아졌다.
다행스럽게도 정념은 전문 경호원이 아닌데도, 늘 고용주의 곁에 붙어서 몸으로라도 총알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는 철칙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축생도를 발휘하며 금속 관절을 움직여 허양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팅- 팅팅-
총알 한 발, 한 발이 정념의 머리와 등을 때리며 불꽃을 튀겼지만, 딱히 두드러지진 않는 흔적만 남겼다.
말하자면 그는 단순한 방패가 아닌, 철통 장갑(裝甲) 방패인 셈이었다.
콰당!
정념에게 떠밀려 쓰러진 허양원은 비정상적으로 무거운 기계 승려의 몸에 짓눌려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리고 이 순간, 축생도의 효과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다섯 경호원은 양발로만 서 있는 게 불편하다는 듯, 분분히 엎드려 늑대 울음소리를 내거나 다리를 든 채 오줌을 누려 했다.
그중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있는 경호원 한 명만 힘겹게 서 있었다. 하지만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그도 평범한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꼭 인간 세계에 난입한 유인원을 보는 듯했다.
정념이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원숭이처럼 몸을 날린 그는 냅다 계단으로 달려가더니 난간을 짚고 아래층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렇게 이동하며 야수의 포효를 내지르는 대신, 큰 목소리로 미친 듯이 외쳤다.
“저들을 날려버려! 저들을 날려버려!”
이후, 정념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허양원을 일으켜 세운 뒤, 계단 입구를 바라보며 신중하게 말했다.
“창문으로 뛰어내립시다.”
“그럽시다.”
총에 맞아 죽을 뻔했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아직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허양원은 이젠 정념 선사를 전적으로 믿는 수밖에 없었다.
곧 팔 하나를 그에게 두른 정념은 두 무릎을 굽혔다가 가볍게 창문으로 돌진했다. 두 사람은 그대로 깨진 유리창 파편과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밑에선 부근에 결집해 있던 성주 호위대가 곧장 허양원을 물샐틈없이 에워쌌다.
야수로 변했던 네 명의 경호원은 그제야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들은 멍한 눈빛으로 서로를 돌아보다가, 본능적으로 정념을 따라 깨진 유리창 밖으로 몸을 날리며 사냥꾼 길드 뒷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 * *
특별 제작된 방탄차에 탄 후에야 겨우 진정한 허양원이 기사에게 명했다.
“저택으로.”
그리고 그는 옆자리의 기계 승려 정념을 보며 감격에 차서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사. 선사가 아니었다면 전 벌써 죽었을 겁니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칠층탑을 세우는 것보다 나은 일이지요.”
전자 합성음으로 답한 정념이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성주님, 이전의 약속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저희 교단이 위드 시티에서 설법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다고 하셨지요.”
“물론이죠. 하지만 쉬이 발광하는 승려를 파견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래서는 시민들을 설득할 수가 없어요.”
허양원의 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정념을 마주할 때마다 불안했다. 만일 자신이 무심코 상대의 역린을 건드린다면, 상대는 언제라도 정신이 나간 채로 발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방탄차의 문이 닫혔다. 소규모 차량 행렬은 웨스트 스트리트로 접어들었다가 노스 스트리트로 향했다.
* * *
사냥꾼 길드 3층, 부회장 사무실.
유리창 앞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크리스티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의 상황도 네가 예측대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그러지 않으면 난 퍼스트 시티로 소환될 거거든.”
그녀의 곁으로 한 인영이 다가왔다.
18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검은색 셔츠, 바지 차림의 그는 보통 남자들처럼 머리가 짧았다. 외모는 나름 괜찮은 편이었지만 오랫동안 잠을 설친 듯 눈 밑 다크서클이 워낙 짙어서 약간 무기력해 보였다.
그는 조금 전 허양원의 경호원 사이에 섞여들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들 앞에서는 계단 아래층으로 뛰어내렸던 그는 이후 다시 위로 올라와 이곳에 이르렀다. 전과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미 축생도의 영향에서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던 남자가 말했다.
“앞으로 변수가 있을지 없을지를 단언할 수는 없어. 성공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지. 너는 실질적으로는 참여도 안 했는데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크리스티나는 실제적인 환각 속에 등장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누구라도 이 일로 그녀를 질책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