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접근
곧장 돌아선 우딕은 부근의 주차장으로 빠르게 걸어가 붉은 SUV를 끌고 나왔다. 튜닝한 흔적이 또렷한 이 차에는 두꺼운 장갑은 물론 방탄유리까지 과시하듯 설치되어 있었다.
“잘 빠졌네.”
장목화는 휘파람까지 불 기세로 감탄했다. 그녀가 애써 참았던 휘파람은 옆에 있는 성건우가 대신 불어주었다.
이는 무근자 야영지에서 이틀을 지내는 동안 생긴 못된 버릇이었다.
곧이어 장목화가 성건우를 향해 속닥거렸다.
“우딕처럼 묵직하고 진중한 사람이 이런 차를 몰 줄은 몰랐네. 하, 저 사람도 마음에 야생마 한 마리를 품고 있는 모양이지.”
그 사이 그들 앞에 차를 세운 우딕이 차창을 내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타. 아직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을 땐, 쓸 수 있는 차를 써야지.”
말을 마친 그가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하나 개조를 거친 차는 더는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버릴 거면 나한테 팔아. 얘를 무척 좋아할 친구들이 있거든.”
성건우가 뒷좌석 문을 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이미 차에 올라있던 장목화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약간 위험한 소리처럼 들리는데⋯⋯.”
순간 우딕은 두 사람을 조수로 삼기로 한 결정을 살짝 후회했다.
만약 두 사람이 이 사건에 이미 깊이 연루되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이런 결정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성주와 관련된 일이니만큼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 * *
중앙 광장으로 향한 붉은 차는 사우스 스트리트를 따라 성문으로 달렸다.
장목화, 성건우도 용여홍과 백새벽에게 성문 밖의 상황을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본 광경은 더 처참했다.
성문 밖 도로 양옆에는 쪼그려 앉아 있거나 철퍼덕 주저앉아있는 황야유랑자들이 정말 수많았다. 차가운 바람 속에,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으며 눈동자엔 빛이라고는 없었다.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땅굴과 천막 구역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이들이 누워있기도 했다.
이 풍경을 보고,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에 빠졌다.
잠시 후, 붉은 SUV가 멈춰 섰다.
끽-
정차 소리에 사방팔방에서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차에서 내린 우딕은 한 30대 남자 앞으로 다가가 신부의 초상을 보여주었다. 남자는 한눈에 봐도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였다.
“이 사람 본 적 있나?”
장목화와 성건우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권총을 뽑아 든 채 각자 한쪽씩 맡아 주변을 경계했다.
30대 남자가 신부의 초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던 그때, 그의 뒤쪽에 자리한 사람들 가운데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왠지 30대 남자로부터 이 일을 빼앗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비틀거리며 쓰러진 남자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매우 창백했고, 눈은 멍하니 뜨여있었다.
성건우는 그의 의식이 이미 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 남자는 걸어오다가 넘어진 그 충격으로 인해 바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반대편을 경계하고 있던 장목화 역시 가만히 앉아있다가 옆으로 그대로 픽 쓰러진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한 황야유랑자를 보았다.
자비 없이 불어닥치는 겨울바람 속, 주변에 비쩍 마른 잡초도 힘없이 쓰러지거나 허공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딕의 질문을 받은 30대 남자가 허약한 목소리로 답했다.
“봤어. 오늘 도시에서 나온 사람이 극히 드물었거든. 이 사람은 저 끝까지 죽 걸어갔어.”
고개를 끄덕인 우딕은 에너지바 하나를 꺼내 상대에게 건넸다.
그와 동시에 이 광경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의 충혈된 눈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빛으로 번득였다.
에너지바를 받은 남자는 빠르게 그 포장을 벗기더니 에너지바를 반으로 갈랐다. 또 잠시 고민하다가 그 반을 또 반으로 가른 그는 자신의 옆에 기대있던 소녀를 흔들어 깨워선, 그 손에 에너지바의 4분의 3을 쥐여주었다.
“얼른 먹어! 얼른!”
일고여덟 살 정도 된 소녀의 얼굴은 꼬질꼬질했다. 두 눈만 반짝거릴 뿐이었다.
멍한 표정의 소녀가 남자의 말을 따라 에너지바 짧은 토막 하나, 긴 토막 하나를 빠르게 씹어 삼켰다.
30대 남자는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에너지바 4분의 1을 몇 입 만에 먹어 치웠다. 뒤이어 고개를 들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우딕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건우는 그제야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각진 얼굴에다 고동색 피부를 가진 그는 정직하고 무던해 보였다.
머뭇거리지 않고 빠르게 차로 돌아온 우딕은 인파의 끝으로 차를 몰았다.
그 후로도 이어진 몇 차례의 질문으로 그들은 신부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어딘가로 향한 것을 파악했다.
그렇게 중간중간 멈추면서 질문을 반복한 결과 신부는 바깥쪽으로 크게 우회한 뒤 북쪽 성벽을 향해 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곳에는 귀족들만 오갈 수 있는 문이 나 있었다. 그 성문을 지키는 경비가 확인해 준 사실이었다.
경비는 우딕이 보여준 초상을 보고 확신에 차서 답했다.
“맞아, 이 사람이 왔었지. 성주의 특별 비준 통행증을 보여 주더라고. 우리가 그런 걸 가지고 있는 자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
‘아침 일찍 남쪽 문으로 나간 신부가 반 바퀴 돌아 북쪽 문으로 들어가?’
장목화의 미간이 팩 구겨졌다. 너무 이상한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성건우는 잠시 고민하더니 알겠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운동일 수도 있죠. 식후 100보를 걸으면 99살까지 산다잖아요.”
우딕은 그냥 성건우의 농담은 아예 무시해버렸다.
“북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노스 스트리트야.”
생각에 잠긴 장목화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노스 스트리트로 가기 위해서였다면 왜 시청 건물 뒤쪽의 다리를 건너지 않았지? 어차피 통행증도 있으면서. 이러는 편이 더 비밀스러워서?”
“그럴 수도.”
우딕은 별말 않고 자신의 통행증을 제출한 뒤 노스 스트리트로 진입했다.
* * *
넓은 도로 양옆으로는 건물이 즐비했다. 더러는 인공 산이 세워진 뜰을 에워싸고 있었고, 또 어떤 곳은 높이 세운 벽 안에 정원이 딸려 있기도 했다.
어디로 봐도 이스트, 웨스트, 사우스 스트리트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이곳에서도 장목화, 성건우, 우딕은 각기 다른 저택의 문을 지키는 무장 경비들을 탐문하며 차근차근 신부의 행보를 쫓아갔다.
그리고 세 사람은 굉장히 넓은 한 건물 단지 입구에 이르렀다.
이곳은 위드 시티 제1 병원이었다.
위드 시티 제2 병원은 이스트 스트리트에 있었다.
“이 사람을 본 적 있나?”
우딕이 병원 정문 초소 경비에게 신부의 초상화를 보여주었다.
경비는 초상화를 힐끗 살핀 뒤 답했다.
“이 사람? 자주 오지.”
곧바로 우딕의 질문이 이어졌다.
“오늘도?”
“응, 왔어. 한 2~30분 전에. 구관 개조를 담당하는 모양이던데. 아마 저쪽에 있을 거야.”
경비가 가장 안쪽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일행은 경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병원으로 들어가 개조를 위해 텅 비워진 구관으로 향했다.
* * *
5층 높이의 구관 외벽은 온통 흰색이었으나 내부 조명 상태가 열악해 곳곳이 음산해 보였다. 거기다 도통 적응되지 않는 소독약 냄새도 너무 짙었다.
그때, 한참 걷던 일행의 시선이 홀 깊은 안쪽으로 향했다.
계단 입구 옆쪽, 녹색과 흰색으로 이뤄진 벽에 아이 낙서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목구비 없이 선으로만 이뤄진 사람 그림이었다.
그림 속, 꼿꼿하게 선 사람이 가슴 높이로 양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 두 손에는 분필로 짤막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대들 역시 지능을 잃기를.」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음산한 환경, 이 같은 그림, 이 같은 부호, 이 같은 문장……. 기이하고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조성하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이를 목격한 이라면 누구든 당장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돌연 돌아선 성건우가 부러 목소리를 묵직하게 낮춰 말했다.
“지금 당장 문이 닫히면 극적인 효과가 더해질 텐데.”
장목화는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며 잠시 생각하다 말을 받았다.
“저건 전동 셔터야. 준비만 됐다면 원거리에서도 충분히 통제 가능해.”
우딕은 분위기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이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이라도 이런 대화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지금과 같은 분위기를 어떻게 하면 더 극대화할 수 있을지를 상의하고 있었다.
콰르릉-!
그 순간,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입구에 옅은 은빛이 도는 흰색 셔터가 정말로 알아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이 곧 안팎을 완전히 격리해버리자, 가뜩이나 어두웠던 홀이 더욱더 어두워지며 분위기도 더욱 음산하고 무거워졌다.
동시에 여태까진 가장 어두웠던 구석 쪽 등이 하나하나씩 밝혀졌다.
창백한 빛이 닿은 그 벽에도 선으로 이뤄진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다.
각양각색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림들 역시 조금 전에 봤던 것처럼 아이의 낙서 같은 수준이었다. 이목구비가 그려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림 속 얼굴은 전부 텅 비어 있었다.
그런 얼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홀 중앙에 드리워진 액정 패널에 눈꽃 같은 노이즈가 떠올랐다.
그렇게 몇 번 번득이던 화면에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는 이목구비가 없는 창백한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눈 위치에 뚫린 두 구멍에서 눈동자가 비쳤다. 숲속의 오래된 호수처럼 그 깊은 눈동자 바닥엔, 꼭 회오리가 맴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화면 속 인물과 눈을 맞춘 세 사람은 순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곧 창백한 가면으로 얼굴을 숨긴 상대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건물 곳곳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 세상에 진리란 건 없습니다. 부디 온몸과 마음으로 신을 믿으세요⋯⋯.
묘한 리듬에 맞춘 목소리는 계속 일행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던 그때, 성건우가 갑자기 끼어들어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 가면을 쓰고 있으면 안 불편해? 숨 막히지 않나?”
화면 속 인물이 쓴 가면에는 콧구멍과 입 구멍이 없었다.
남자는 일순 갑작스러운 방해에 할 말을 잊어버린 듯 말을 멈췄다.
덕분에 장목화와 우딕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실로 돌아와 다시 두 발을 땅에 디딘 기분이었다.
두려움을 떨쳐낸 장목화가 왼팔을 힐끗 살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한편 우딕은 뭔가를 깨달은 듯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부러 우리를 이곳에 유인한 거냐?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보인 비상식적인 행동과 이곳에 해둔 준비가 대형 최면 의식을 위한 것이었나 보군!”
우딕은 최면이란 능력의 효과는 외부적인 조치를 통해 강화되며, 심지어는 거리상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내 화면 속 창백한 가면을 쓰고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신부의 모습이 일그러졌다가 대량의 노이즈로 분해되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곳곳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누구도 그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 만약 여러분에게 최면을 걸지 못한다면, 누구에게 허양원한테 접근해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는 역할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이지 않은 패를 낸 사람이 하나 있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약간의 품만 더 들이면 해결될 일이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우딕은 이미 무전기 크기 정도 되는, 상당한 질감이 느껴지는 옅은 파란색 물건 하나를 꺼내 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의 버튼을 누르며 미리 정해둔 상대와 연락을 취하려 했다.
하지만 수화기에서는 치직, 치직 하는 소리만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