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동료
방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사각형 탁자 하나와 그 양옆에 딸린 등받이 의자 두 개만 놓인 단출한 방이었다.
안쪽 의자에 앉아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향해 손을 넣던 백새벽은 다시금 피어오르는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자조했다.
‘아직도 그 정신 나간 녀석의 말에 빠져있다니⋯⋯.’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선 아직도 주머니 안에서 갑자기 종이별이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믿고 있었다.
잠시 후, 최은이 경호원을 대동하고 들어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도시 방위군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오후나 돼야 사람을 보내줄 수 있다고 하네. 일단 일을 보고 있다가 그때 다시 와줄 수 있겠어요?”
“제가 도망치지 않을 거라 믿으신다면요. 게다가 이대로 나간다면 전 저를 방해하는 유적 사냥꾼들 때문에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할 거예요. 전 그냥 최대한 빨리 끝내고 나가고 싶네요.”
백새벽의 답은 상당히 단호하고도 솔직했다.
최은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한 번 더 연락해보죠. 이번엔 우리 쪽 인력 중에 찾아봐야겠군.”
사실 본질적으론 도시 방위군이나 사냥꾼 길드나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다들 성주를 위해 일하는 기구이기 때문이었다.
백새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기다렸다.
그로부터 15분 정도 지났을 무렵, 최은이 다시 웃으며 돌아왔다.
“다행히 협상이 잘 됐어. 우리 쪽에 믿을만한 전문가가 심문을 담당하겠다고 나서줬어요.”
뒤이어 최은이 옆에 있던 남자를 소개했다. 검은 머리칼과 파란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고급 사냥꾼 우딕입니다. 거짓말 탐지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죠. 그 어떤 거짓말로도 우딕을 속일 수는 없어요.”
우딕이 살짝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심문자를 확인한 백새벽은 용여홍의 당부를 떠올리며,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주머니 가장자리에 얹었다.
곧이어 최은이 경호원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사이 백새벽은 그 틈을 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백새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끝에 종이로 접힌 무언가가 만져졌다. 주머니에는 정말로 종이로 접힌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외출하기 전에 확인했을 때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내가 지금 정말로 꿈을 꾸고 있다는 건가?’
이러한 생각과 함께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난 백새벽은 용여홍과 함께 나이트클럽 ‘오늘’ 밖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을 인지했다. 뒤통수에 유진의 험악한 눈빛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꿈이야⋯⋯.’
흠칫 놀란 백새벽은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기억 속 광경을 복제해내면서 윤복 총포사로 돌아갔다.
그렇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백새벽은 2층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엔 고통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깜빡 잠들었다 깨어난 백새벽이 아침 식사를 마쳤을 때, 용여홍이 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길드에 백새벽을 노리는 임무가 발표되었다며 외출하려면 위장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백새벽은 의도적으로 그 정신 나간 녀석에 관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 생각을 했다간 그의 모습도 이 꿈에 반영될 것이었다.
똑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백새벽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어느새 사냥꾼 길드의 그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백새벽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우딕이 책상을 두드리던 손을 거뒀다. 그의 파란 눈동자엔 여전히 침착한 빛이 흘렀다.
“깜빡 졸았나 보네. 어젯밤 유진과의 만남으로 잠을 못 잤나?”
“맞아, 그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 근데 그럴 능력이 없었어. 그 사람만 보면 무서워서 온몸이 벌벌 떨리니까.”
백새벽은 한없이 당당했기에 솔직하게 답했다.
우딕은 그녀를 몇 초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거짓말이 아니네.”
그 후로 질문이 몇 개 더 이어지고, 백새벽은 모든 것에 확실히 대답했다. 심지어 그녀는 스카프를 풀어 목에 새겨진 문신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백새벽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에 약간 의문을 느꼈다. 평소에는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문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행위도 놀라울 정도로 아주 자연스러웠다.
아무래도 유진의 실종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증명해 보이고 싶은 생각이 커서 이런 것 같았다.
곧이어 우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고통도, 공포도 충분히 이해해. 끝이야, 이만 떠나도 좋아.”
“이렇게 빨리?”
백새벽이 물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잖아.”
우딕은 간결하게 대꾸했다.
백새벽도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즉각 일어나 방을 떠났다.
* * *
백새벽은 1층 홀로 내려가 20오레이와 신용 점수 10점을 받은 다음, 용여홍과 합류해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그러던 와중 백새벽은 맞은편 방에 묵는 정신 나간 그 녀석과 그의 동료를 마주쳤다. 그들과 어깨를 스치듯 지나치려는데, 그 정신 나간 남자가 씩, 웃으며 명찰 하나를 들고 가슴팍에 슬쩍 다는 시늉을 했다.
붉은 바탕의 명찰엔, 선명한 금색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반고 바이오」
그 글씨를 본 순간, 백새벽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마치 기억 회로가 다시 연결되기라도 한 듯, 성건우와 장목화의 기억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이내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백새벽은 겉으로 어떠한 이상 반응도 보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버렸다.
잠시 후, 성건우, 장목화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 무렵, 백새벽은 입꼬리를 꿈틀거리다 손을 들어 살짝 붉어진 눈가를 가렸다.
동료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 * *
두 사람과 조금 더 거리가 벌어졌을 때, 장목화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옅게 웃었다.
“반응을 보니까 새벽이는 이미 영향에서 벗어난 것 같네. 그건 그렇고, 조사라기에는 너무 대충이지 않아? 난 여홍이도 심문받을 줄 알았는데. 이게 끝이라니. 준비한 게 아까울 지경이네.”
“잘된 거 아닙니까?”
성건우가 적절히 대꾸했다.
장목화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당연히 잘된 일이지. 그러니까 넌 절대 우딕처럼 하지 마. 아무리 능력이 믿음직스러워도 밟아야 할 절차는 밟아야 허점을 메울 수 있는 법이지. 추리 광대도, 나머지 두 능력도, 반드시 준비된 상황에서 어느 정도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그 위력은 제대로 발휘되지 않으니까.”
팀장을 바라보던 성건우가 진지하게 호응했다.
“저한텐 저를 보호하며 함께 돌진해줄, 믿음직한 동료들이 있어요.”
“⋯⋯기억력 한번 지나치게 좋네.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난감하잖아.”
자신의 수법에 그대로 당한 장목화는 그냥 조용히 중얼거리고 말았다.
* * *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사냥꾼 길드에 진입했다. 발표된 임무를 살피면서 유진의 죽음으로 정세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예측하는 한편, 배윤수와 임보경에 관한 새로운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대형 패널에 나온 내용을 다 살피기도 전, 장목화의 시야에 2층에서 내려와 가까이 다가오는 우딕이 들어왔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뭐 새로운 단서라도 찾았나?”
우딕이 고개를 저었다.
“못 찾았어. 너희들은?”
“어젯밤에 술집 구역을 한 바퀴 돌았는데 임보경을 본 사람은 없대.”
장목화도 솔직하게 말했다.
우딕은 그녀와 성건우를 잠시 마주 보다가 불쑥 물었다.
“유진을 습격한 범인, 너희는 아니겠지?”
용의자와 마찬가지로 남녀 한 쌍인 두 사람이 와일드울프 앨리에 방문하기까지 했다니, 아무래도 좀 의심스러운 듯 했다.
곧 장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 그 사람에 관한 질문을 듣기 전까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우딕은 잠시 성건우와 장목화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보통의 유적 사냥꾼들보다 외모가 뛰어났으며 행색도 깔끔했다. 그렇게 한동안 둘을 훑어보던 우딕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너희들한텐 그럴 동기가 없지.”
장목화는 웃음을 머금고 화제를 전환했다.
“배윤수와 임보경에 관한 정보를 하나 알려줄게. 하지만 너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를 알려주겠다고 약속해.”
우딕은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반문했다.
“전에 얻었던 정보인가?”
그는 두 사람이 자신보다 더 빨리 새로운 단서를 얻었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목표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 있어선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맞아.”
장목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딕이 응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본 장목화는 굉장한 비밀을 말하는 척 입을 열었다.
“배윤수와 임보경을 비롯한 그 사람들은 한 달 전쯤 길드의 어느 고위층과 만난 적 있어. 구체적으로 누구랑 만났는지는 잘 모르고.”
성건우는 장목화가 주머니에 왼손을 찔러넣은 걸 보았다. 장목화의 진짜 목적은 우딕을 이용해 해당 단서를 조사하려는 것이었다. 우딕 같은 고급 사냥꾼이라면 현지 사냥꾼 길드 고위층과 접촉할 기회가 충분할 터였다.
“길드의 고위층을 만났다⋯⋯.”
우딕은 약간 의혹이 서린 얼굴로 말을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그러다 그가 매너 있게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고마워, 다음에 또 보자고.”
“뭐야, 우리한테도 정보를 줘야지.”
장목화도 딱히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그저 호기심만 동한 것 같았다.
우딕은 입꼬리를 살짝 움직여 미소를 보였다.
“어떤 고위층이랑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알아본 다음에 알려줄게. 그게 네가 가장 원하는 정보 아냐?”
“딜!”
장목화가 웃으며 대꾸했다.
곧이어 우딕이 자리를 뜨자, 장목화도 그제야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우딕 저 사람, 꽤 똑똑하네⋯⋯.”
“똑똑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한들 일찍 죽었겠죠.”
성건우의 답에, 장목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윽고 장목화는 대형 패널에 표시된 임무들을 확인한 뒤, 손목시계로 시간을 보고 성건우와 함께 사냥꾼 길드를 떠났다.
* * *
장목화와 성건우는 중앙 광장에 도착해 길가 벤치에 앉았다.
그로부터 15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장목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서관에 좀 다녀올게.”
“거기에 화장실이 있나요?”
“있을걸⋯⋯.”
장목화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성건우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번엔 한번 잘 관찰해보세요.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 질문에 그렇게 자신감 없게 답할 리 없잖아요.”
장목화는 콧방귀를 뀌려다 멈칫했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도서관은 진병욱과 접선해 소식을 주고받는 장소였다. 그래서 사실상 장목화가 도서관에 머무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벌써 두 번이나 방문했지만, 모두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 도주 경로에만 유의했을 뿐, 그녀는 아주 짧게 머무르고만 나왔었다.
이는 분명 의심을 살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도서관에 간 사람이 책도 빌리지 않고 10분도 안 되어 나오는 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지 않은가.
“훌륭하네. 그렇게까지 치밀하게 생각하다니. 꼭 우리 대본이 서로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장목화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성건우가 눈을 똑바로 뜨고 장목화를 바라보았다.
“전 그냥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물어본 건데요.”
그리고 몸을 일으킨 그가 장목화의 일갈이 쏟아지기 전 말을 덧붙였다.
“팀장님의 사고방식을 배워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장목화도 구겨졌던 미간을 살짝 풀었다.
“그래, 좋아. 그렇다고 네 특징을 버리진 마. 그래야 상호 보완이 되지. 장목화 둘보단 장목화 하나랑 성건우 한 명 있는 팀이 더 낫잖아.”
“새벽이랑 여홍이는 빼셨네요.”
장목화는 더는 그와 말하고 싶지 않아서,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