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소란스러운 밤 (1)
쉭!
금속관에서 쏘아져 나온 작은 금속 화살 하나가 성건우에게로 돌진했다.
성건우는 위치를 살짝 틀어 머리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작은 금속 화살은 그의 왼쪽 어깨와 가슴팍 사이에 꽂혔다.
“……!”
그런데 그가 갑자기 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섰다. 마비 증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엄기범은 의아한 얼굴로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곧이어 성건우는 아무렇지 않게 금속 화살을 뽑아 던지며 웃었다.
“내가 요즘 방탄조끼를 입는 데 습관이 돼 있어서.”
이는 팀장 장목화가 구조팀원 모두에게 내린 지시였다.
우정현과 심도환의 죽음은 총격으로 인한 게 아니었지만, 장목화는 성건우가 이 사건에 정식으로 개입한 이후 안전을 위해 전 팀원에게 방탄복을 갖추라는 지시를 내렸다.
본래 반고 바이오 내부에서 총알은 매우 엄격하게 관리됐다. 장목화 역시 아무리 구조팀 팀장일지라도 실탄 훈련을 진행하려 할 때는 상부에 미리 보고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번잡스럽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 살상력도 없는 방탄조끼는 신청하기도 쉽고, 팀원들에게 분배만 되면 팀장은 얼마든 그걸 사용하란 지시를 내릴 수도 있었다.
“겁쟁이.”
엄기범은 억지로 성건우의 말에 대꾸한 뒤 곧장 뒤돌아섰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승리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을 끝낸 것이다.
‘이후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성사의 몫이지, 내 몫은 아니잖아!’
그러나 엄기범이 막 돌아선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갑자기 강렬한 감정 한 줄기가 치솟았다.
‘어떻게 도망칠 수가 있어? 어떻게 포기한다는 거야! 이대로 이렇게 쪽팔리게 달아날 거라고?’
이렇게 마구 떠오른 생각들로, 엄기범은 다시 돌아서 성건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짙은 갈색이었던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동시에 성건우는 머릿속 뭔가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늘에 별처럼 떠오른 그것들은 주위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각각의 별들 속엔 성건우의 평생이 다 담겨 있었다.
이때, 밖에서 한 줄기 빛이 날아들었다. 별 하나를 달고 있는 그 빛은 하늘을 가로지르다, 허상인 기원의 바다에 떨어졌다.
성건우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팩 구겼다. 엄기범 역시 순간 정신을 퍼뜩 차렸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젠장, 내가 지금 도망치지 않고 뭘 하는 거지? 단편 기억 삭제 능력을 이용해서 공격하려 하다니⋯⋯. 비이성적으로 행동한 건 저 녀석의 각성자 능력 때문인가?’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엄기범은 심장이 저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단편 기억 삭제 능력은 전투 능력이 아니었다. 이 능력은 일단 상대의 기억을 살펴보고 3분 안쪽으로 삭제할 기억을 표시해둬야만 제대로 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으며, 상대와의 거리도 3미터 안쪽이어야 했다.
하지만 조금 전, 엄기범은 그저 본능에만 의지해 그게 어떠한 효과를 발휘하게 될지 생각도 하지 않고 기억을 삭제하려 했다.
이 능력만으로 상대에게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기란 쉽지 않았다. 3분 정도의 기억이 갖는 가치는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었다.
성건우는 현재 미간을 찌푸린 채,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엄기범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었고,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
쿵쿵-
엄기범의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방금 우리가 서로를 공격하던 기억이 지워져 버린 건가? 쟤는 지금 우리가 적이라는 걸, 내가 자기를 기습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엄기범은 밀려드는 기쁨을 느끼며 허리를 폈다. 그러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금속관과 작은 화살을 집어 들었다.
할 일을 마친 그는 성건우가 자신의 생김새를 확인하지 못하도록 야구 모자를 더욱 푹 눌러썼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엄기범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천천히 멀어져갔다.
“어이.”
바로 그때, 성건우가 갑자기 돌아서 그를 불러세웠다.
눈이 살짝 커다래진 엄기범은 등줄기에 땀방울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성건우는 복도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혀를 차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흠, 내가 자기 콧노래를 어떻게 평가할지 무서웠나 보지?”
* * *
349층 C 구역 12호.
장목화는 자신의 계정으로 로그인한 뒤, 진지하게 이메일을 작성했다. 그리고 수신 대상을 확인한 뒤, 마우스를 움직여 왼쪽 버튼을 눌렀다.
장목화는 이메일이 성공적으로 발신된 것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제 이후의 일은 더는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이 일을 잘 처리해서 다른 후환이 없기를 바라야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옆쪽으로 기울여 파란 보온병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보온병 무게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물이 없네⋯⋯.”
장목화는 고개를 저으며 보온병을 들고 서재를 나와 거실로 향했다.
“뭐 하느라 오자마자 방에 틀어박혀 있니?”
장목화의 엄마 설수민이 딸을 보자마자 잔소리부터 늘어놓았다.
하지만 장목화는 개의치 않은 채 웃으며 답했다.
“제가 일을 워낙 사랑하잖아요. 엄마, 머리 스타일 바꿨어요? 잘 어울리네요.”
349층에는 전문 미용실이 있었다. 물론 다른 층에도 비슷한 곳이 있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조악한 건 사실이었다. 평소엔 가장 기본적인 커트나 삭발 정도만 해줬고, 명절이나 돼야 파마 등 다른 옵션도 선택할 수 있었다.
설수민은 무의식적으로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래? 오늘 오후에 했어. 막 집에 들어왔을 때는 못 본 것 같더니?”
그녀는 얼굴에 주름이 있어도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이었다. 이제는 물결이 치는 듯 구불거리는 머리칼 덕분에 실제보다 몇 살은 더 어려 보였다.
“아빠한테 기회를 드린 거죠. 아빠보다 먼저 발견할 수는 없잖아요.”
장목화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로 둘러댔다. 덕분에 화제의 중심을 장문봉에게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역시나 설수민은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하면서 남편이 최근 한 달간 내내 목화밭에 묻혀 있어, 집에 돌아온 후에도 냄새를 풍긴다고 원망을 해댔다. 그러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그녀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내가 너한테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 진짜 할 이야기는 따로 있었는데. 조 씨 아들이 널 마음에 들어 한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그래?”
“회사의 공동 결혼을 기다릴래요. 회사에서 배정해줄 때, 배정해준 사람이랑 결혼할게요.”
장목화는 막강한 방어 카드를 꺼내 들었다.
“결혼만 먼저 하면 되잖아. 아이는 좀 천천히 갖더라도.”
그래도 설수민은 계속 딸을 설득하려 애썼다.
똑똑똑-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장목화가 큰소리로 물으며 문 쪽으로 향했다. 지금이 엄마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였다.
문을 여니, 밖엔 녹회색 제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구릿빛 피부의 소유자로 얼굴엔 고생의 흔적이 역력했다. 눈가엔 또렷한 흉터도 하나 남아있어, 조금 흉악한 인상이었다.
나이는 30대 정도로 보였고, 가슴팍에 달린 배지는 없었다.
장목화는 단박에 이 방문객을 알아보고 미소를 보였다.
“진시온⋯⋯. 벌써 관리층에서 행동에 나선 건가?”
진시온은 장목화가 안전부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귄 친구였다. 당시 유전자 개조를 받은 진시온은 특별행동팀에 속해 있었다.
그 후 몇 차례 작전을 진행하며 그의 피부는 햇볕에 탔고, 임무도 변경됐다. 당시 관리층 직속의 작전반으로 차출된 그는 현재 그중 한 행동 대대의 대장이 돼 있었다. 급으로 따지면 D8급의 직원이었다.
“맞아. 내 임무는 중요 증인을 보호하는 거고. 넌 굳이 보호가 필요치 않은 증인이긴 하지만.”
진시온이 웃으며 인사했다.
“아무래도 난 합법적인 총기 소지가 불가능하니까.”
그러다 장목화가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팀원들도 데리고 온 거야?”
관리층 직속 작전반 인원은 대외 작전반보다 작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팀당 10명 이상이 속해 있었다.
“응, 혼란 방지를 위해서.”
진시온이 간단히 설명했다.
곧이어 장목화는 웃으며 옆으로 비켜선 뒤, 거실을 가리켰다.
“들어와 앉아. 작전이 어떻게, 어디까지 진행된 건지 들어봐야겠네.”
내내 딸의 상황을 지켜보던 설수민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아무 말 없이 알아서 침실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 * *
어느 방 안, 분산된 손전등 불빛 속에 한 남자가 있었다.
한참 짙은 파란색 유선 전화를 들고, 조심히 번호를 누르고 있는 이 남자는 바로 엄기범이었다.
-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기범은 황급히 보고를 이었다.
“성사, 작전이 실패했습니다. 목표의 경계심이 아주 높았습니다.”
2초간 침묵 후, 전화 상대가 물었다.
- 네 정체가 노출된 건가?
“아닙니다. 저와 접촉하고 싸웠던 기억을 지우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그자는 제가 그자를 기습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저 저를 우연히 스쳐 지나간 직원으로 생각할 겁니다. 게다가 전 모자도 푹 눌러썼고, 얼굴에도 어느 정도의 처리를 해둔 상태였습니다.”
엄기범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전화 상대는 또 한 번 침묵하다가 낮게 목소리를 깔고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했다.
- 더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마. 앞으로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예, 성사.”
엄기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478층, A 구역과 B 구역의 경계.
관리층 직속 작전반 두 개 팀이 흩어져 이 구역을 은밀히 통제 중이었다.
그리고 심장 페이스메이커의 상태를 확인한 팀장은 오명훈의 방까지의 거리를 측량한 후 명령을 내렸다.
“곧장 작전을 시작한다.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끝내. 목표에게 반응할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방독면을 쓴 작전 팀원 네 명이 허리를 굽힌 채 전방으로 돌진했다. 그들은 단 몇 초 만에 오명훈의 방 앞에 이르렀다.
곧이어 한 명이 방문을 걷어찼다. 이후 다른 한 명은 마취 가스탄을 안으로 던지고, 나머지 둘은 안쪽으로 총구를 겨냥하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이내 묵직하고도 가벼운 폭발음이 울려 퍼지더니, 마취 가스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쿠당탕-
안쪽에서 무거운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팀원 2명은 몇 초 더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방으로 진입한 뒤, 정신을 잃은 오명훈을 끌고 나왔다.
그러자 오명훈을 알고 있는 누군가 다가가 그를 살피곤 빠르게 일어났다.
“목표 확인됐습니다!”
팀장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손을 휘둘렀다.
“심문실로 데려가.”
뒤이어 주위를 한 번 둘러본 그가 조리 정연하게 후속 명령을 내렸다.
“생화학 조는 남은 마취 가스를 처리하고, 지원조는 이 구역 주민들을 안정시켜라. 나머지는 곧장 철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