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107화 (107/649)

107화. 잘못된 타이밍

“회사에서 제가 각성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건 크게 두렵지 않습니다. 구조팀에서 전출될까 봐 그게 두려운 거죠.”

장목화가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 아직 네 비밀을 폭로할 필요는 없으니까. 네 아이디어 덕분에 더 간단하고 더 완벽한 방법이 하나 떠올랐어.”

“뭡니까?”

성건우의 물음에, 장목화가 씩 웃었다.

“모든 이사회 이사와 모든 안전부 고위층 직원들에게 편지를 한 통씩 보내는 거야. 사건의 전말이 담긴 편지를.”

“이메일이요?”

성건우는 교과서에서 이메일이라는 단어를 본 적도 있고, 대학생 시절에는 직접 이용해보기도 했었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팀 성건우가 우정현의 죽음으로 모종의 깨달음을 얻고 나한테 생명 제례 교단을 신고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규정에 따른 조사와 의료 통계에 근거해, 이 사건에 각성자가 포함돼 있고 그게 478층 주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후 성건우는 사건 관련자 탐문과 현장 탐방을 통해 용의자가 오명훈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대목에서 장목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이메일을 보내려고. 하지만 만약 오명훈이 붙잡혀서 너에 대해 실토한다면, 네가 각성자라는 사실이 폭로될 거야. 네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니 다행이네.”

성건우의 표정은 진지했다.

“전 오명훈에게 제가 각성자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그냥 그자에게 특수한 능력이 있듯, 저한테도 특수한 능력이 있다고 했죠. 그자의 특수한 능력은 눈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거고, 제 특수한 능력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거죠.”

장목화는 잠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회사가 오명훈이 너랑 그렇게 간단히 친구가 됐단 걸 믿을 것 같아?”

이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지금 가서 이메일을 쓸 거야. 넌 오늘 저녁에 심문당할 준비나 해.”

성건우는 고개를 끄덕인 후, 아무 말 없이 495층으로 돌아갔다.

* * *

환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성건우는 산책하듯 B 구역 196호에 도착했다.

이제 열쇠를 꺼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성건우의 시야 가장자리로 한 인영이 맺혔다.

188호와 190호 사이, 성건우와 약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색 야구모자를 쓴 채 남색 상의에 검은색 긴 바지를 입고서, 아주 오래된 듯한 가죽 구두를 신은 남자였다.

벽에 기대고 선 그는 모자를 매우 푹 눌러써서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모자챙 아래 생긴 그늘이 얼굴까지 다 가려서, 지금 성건우의 눈에 보이는 건 그가 입에 물고 있는 실버블랙의 얇은 금속관뿐이었다. 손가락만 한 길이의 그 금속관은 조악한 담배 대체품인 듯 보였다.

성건우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열쇠를 꺼내려던 것도 포기했다. 대신 무릎을 살짝 굽히고 허리와 복부에 힘을 주며, 언제라도 돌격할 수 있는 자세를 갖췄다.

바로 그때, 돌연 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신을 잃고 기절한 건 아니었다. 순간 주위의 빛이 무언가에 의해 모조리 다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뿐 아니라 귓가에 들리는 소리 하나 없었다.

꼭 기원의 바다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섬에 오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완전한 어둠, 완전한 적막……. 이곳은 오직 성건우 하나뿐이었다. 의지할 동료 같은 건 없었다. 다시금 그의 마음속에 익숙한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성건우는 점점 온몸을 미미하게 떨고 있었다.

이윽고 벽에 기댄 남자가 몸을 떼고 성건우를 향해 돌아섰다. 동시에 그는 고개도 빠르게 들어 올려 입에 문 금속관으로 성건우를 겨눴다.

그건 담배가 아닌, 바람총이었다.

이 남자, 엄기범의 바람총은 지상의 황야유랑자들이 가진 바람총과는 달랐다. 황야유랑자들은 나무로 만든 간단한 바람총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엄기범의 것은 복잡한 기계 구조로 용수철과 기계 장치로 구동되는 방식이었다.

그로 인해 길이가 짧아 은닉하기도 쉬웠고, 정말로 바람을 불어넣지 않고도 혀로 금속관 아래에 붙은 버튼만 눌러도 발사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로 보면 바람총에만 국한되지 않는, 손가락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무기였다.

이 무기의 진짜 이름은 암전(暗箭)이었다.

사실 입과 혀로 암전을 다루는 건 가장 불편하고 까다로웠다. 그러나 엄기범은 성사에게서 목표물이 상대의 손을 못 쓰게 만드는 각성자 능력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굳이 손 대신 이 불편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그는 목표물의 또 다른 각성자 능력 두 가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는 최면과 비슷한데 꼭 대화가 수반돼야 했고, 적용 범위도 매우 좁았다.

또 하나는 상대가 이성적이지 못한 행위를 하게끔 하는 능력이었다. 효력 범위는 4~8미터 정도였다.

엄기범은 이 정보를 토대로 목표와 거리를 엄격히 유지했다. 현재 그와 성건우의 방 사이는 대략 10미터 정도였다. 이는 대화 최면 능력과 비이성적인 행위를 하게끔 하는 능력의 효력 범위를 충분히 벗어난 거리였다. 거기에 임기범은 양손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피하려 암전을 입에 물었다.

이 복도에 붙은 방과 방 사이 거리는 2미터 정도라, 거리를 계산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보다 더 먼 곳으로 물러나지 않은 건, 엄기범이 가진 각성자 능력 때문이었다. 엄기범의 각성자 능력 중, 효력 범위가 가장 큰 꿈 여행은 자신에게서 11미터 이상 떨어진 상대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엄기범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가장 적합한 거리에서 꿈 여행 능력으로 성건우의 특정 기억을 증폭시킨 후, 실제적 환각에 빠진 성건우가 혼란한 두려움에 빠져있는 동안 그를 일시적으로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 후론 성건우를 작은 화살로 마취시키고, 196호로 끌고 들어가 그의 기억을 확인한 뒤, 단편 기억 삭제 능력으로 모든 단서를 제거할 예정이었다.

이는 엄기범이 본인이 가진 능력과 수단을 종합해 세울 수 있는 가장 최적의 방법이었다. 너무 급작스러운 상황인데다 성사의 명령도 지나치게 돌발적이라 이 이상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암전을 애용하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이 무기가 엄기범이 치러야 할 대가를 어느 정도 막아주기 때문이었다.

엄기범은 여전히 의아한 마음뿐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번 일은 오명훈에게 넘기는 것이 훨씬 나았다. 누군가를 죽여 입을 다물게 하고 그 단서를 제거하는 데에 있어, 심장 마비만큼 깔끔하고 좋은 수단은 없었다.

‘성사도 계속 사람이 죽으면 회사의 눈길을 끌 거라 생각한 거겠지. 그래서 기억을 삭제하는 능력이 있는 나를 부른 거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엄기범은 다시 바람총 아래에 달린 버튼에 혀끝을 댔다. 상황을 파악한 성건우가 도망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기범은 그의 방향을 예측하며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능력치고는 너무 약한데.”

순간 엄기범이 흠칫했다. 그건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계속 몸을 살짝 굽힌 채 바들바들 떨던 성건우가 돌연 웃으며 말을 하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꿈 여행 능력이 부족해서 이미 정신을 차렸다고 한들, 옆으로 몸을 날리거나 굴려서 이어질 공격을 피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이 귀중한 시간을 이야기하는 데 낭비하고 있는 거야! 저건 일반적인 반응이 아냐. 제기랄, 저 녀석 왜 말을 하는 거냐고!’

엄기범은 바람총의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모든 동작을 다 멈춰버렸다. 그의 이마엔 식은땀도 맺히고 있었다. 어느새 그는 저도 모르게 반문을 시작했다.

“약하다니?”

결국 열린 입술 사이로 실버블랙의 금속관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엄기범은 암전이 땅을 굴러가든 말든,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 능력은 특징 기억을 증폭시켜 널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처박아 버릴 수도 있어. 계획만 제대로 돼 있다면, 그리고 한 단계, 한 단계 긴밀하게 맞물린다면, 심지어는 현실과 허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지.”

성건우도 그의 이야기에 약간 놀란 눈치였다.

“내 조롱에 왜 답을 하는 거야? 난 방금 머리에 쥐가 좀 난 것뿐인데.”

그 순간, 뭔가를 알아차린 성건우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하하!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꼭 그것에 대꾸해야만 하는 게 네가 치른 대가구나?”

“그렇게 간단할 거라고 생각해?”

엄기범이 날카롭게 맞섰다.

그의 이마는 이미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그가 각성자 능력을 얻으면서 지불한 건 자율이었다. 하지만 사실 대가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엄기범은 특정 방면, 딱 논쟁에서의 자율만 잃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어떤 화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엄기범은 무조건 그에 대한 쟁론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상대의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한두 가지 작은 꼬투리만 잡아 물고 늘어지기도 했다.

엄기범은 본래 이게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러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자율을 대가로 치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며 엄기범은 자신이 치른 대가가 엄청나게 크고 위험한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상대와 논쟁하는 장소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렇게 정말 중요하고 급박한 순간, 고작 1~2초에 생사가 갈리는 순간에 논쟁 따위에 무조건 신경 써야만 한다면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대가는 엄기범의 인간관계까지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후로 엄기범은 교단을 통해 금속관을 주문했다. 그걸 입에 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면 어느 정도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비밀스러운 작전을 수행할 때 이 바람총이 꽤 상당한 도움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대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지만, 남이 자신과 관련된 화제를 꺼내지만 않으면 힘겹게나마 입을 다물 수는 있었다.

엄기범은 이번 작전을 계획할 때만 해도 상대와 말할 틈이 있을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또한 그는 위험에 당면했다면, 상대는 무조건 그 위험을 피하려 하거나 반격부터 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마주한 목표는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이었다. 이 위험한 판국에 말부터 하는 인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거기다 그는 엄기범을 비웃기까지 했다. 대체 이런 상황을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엄기범의 반문을 듣던 성건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고집을 부리는 것도 대가에 포함된 거냐?”

말하는 사이 발목과 무릎, 허리에 동시에 힘을 준 성건우가 마치 맹수처럼 엄기범을 향해 몸을 날렸다.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때, 성건우는 갑자기 균형을 잃었다. 이는 그가 아무 어려움도 없이 거뜬히 수행할 수 있는 동작이었다. 수십 번, 백번도 완벽하게 해낼 수 있었다. 실수를 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하필 이 순간, 성건우는 허공에서 균형을 잃었다.

쾅!

성건우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진실에 대해서는 입씨름할 필요 없지.”

엄기범은 옷 주머니 안에서 또 다른 암전을 꺼내 들었다. 그가 준비한 무기는 하나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내 엄기범은 웃음을 머금은 채 금속관 버튼을 눌렀다. 그의 세 번째 각성자 능력은 균형 방해였고, 이 능력의 효력 범위는 6미터였다.

몸을 날린 성건우를 갑자기 엎어지게 만든 게 바로 이 능력이었다.

엄기범은 일이 이렇게까지 발전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이렇게 짧은 거리 안에서는 상대 역시도 각성자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번 변화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 다행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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