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상황 파악 (2)
성건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495층으로 돌아갔다.
활동 센터 안팎으로 직원들 여럿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조용하게 속닥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건은 모두에게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악몽의 재림과 다를 게 없었다. 많은 이들이 두려움과 혼란에 잠겨있었다.
현재 무심병 발병률은 굉장히 낮은 수준이라, 젊은 사람들 대부분은 지난 몇 년간 기껏해야 두세 명 정도의 감염자만 목격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고, 듣기만 했던 이들도 있었다.
사실 내내 그들의 머리 위를 뒤덮고 있었지만,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짙은 그늘이 불현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상황이었다.
성건우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활동 센터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그 안엔 용여홍이 있었다. 그는 한참 구석에서 양진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어디 갔었어?”
용여홍도 제쪽으로 다가오는 성건우를 발견했다.
“뭘 좀 놓고 와서.”
성건우는 능숙하게 변명했다.
“아, 그렇구나.”
용여홍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성건우는 용여홍의 옆에 앉아서, 자신이 지금 굉장히 여유롭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양진원에게 먼저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넌 596층으로 이사하지 않았어?”
양진원의 아내 주슬기는 그보다 10살이 더 많았다. 일찍이 한 번 결혼했던 그녀는 당시 배정받은 방이 있어, 양진원은 결혼 후 따로 방을 배정받지 않고 주슬기가 사는 곳으로 들어갔다. 부부의 방은 596층이었다.
“부모님 보러도 못 오냐?”
양진원이 웃으며 답했다.
성건우는 그를 위아래로 두어 번 한번 훑어보았다.
“아내가 널 잘 가르쳤나 보네.”
순간 양진원의 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
용여홍은 곧바로 성건우 대신 그의 말을 해석해주었다.
“얘 말은 그러니까, 네가 이전보다 훨씬 명랑해졌다는 거야.”
“조금은⋯⋯, 뭐. 자신감이 생긴 것 같기도.”
양진원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이후로 성건우는 연구소에서 일하는 양진원과 일에 관한 한담을 나눴다.
그러다 성건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아, 심도환 아저씨는 대체 어떻게 된 거래?”
용여홍은 이미 주위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지라 한숨부터 나왔다.
“듣기로는 어젯밤부터 좀 이상했대. 혼이 빠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는 거야. 하……. 조금이라도 일찍 병원에 데려갔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무심병에 감염된 상태라면 병원에 갔어도 소용없었을 거야.”
양진원의 직장은 의료 영역에 편중된 생물 연구소였다. 하지만 그는 그 전공에 근거한 연구소 전자 설비 담당이긴 했다.
용여홍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정말 안됐어. 애도 아직 어린데.”
몇 초간 침묵하던 성건우가 화제를 전환했다.
“언제 발병한 거래?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누구고?”
용여홍이 바깥쪽을 가리키며 답했다.
“옆쪽에 있는 질서 감독실에서 발병했대. 안으로 들어간 후에 아무런 말도 없더니 갑자기 발병 증세를 보였다나 봐. 휴, 그래도 거기에서 발병해서 다행이야. 덕분에 질서 감독자들이 바로 아저씨를 통제할 수 있었잖아. 그러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이 다쳤을걸.”
“질서 감독실⋯⋯.”
성건우는 심도환의 발병 장소를 조용히 되뇌었다.
이내 그가 다시금 물었다.
“그때 그 안에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으려나?”
“서너 명? 무심자 한 명을 통제하려면 두 명만으로는 안 되잖아.”
용여홍이 추측했다.
성건우는 계속 호기심이 생긴다는 듯 연속해서 질문을 해댔다. 그 답을 바탕으로 그도 당시 상황을 기초적으로 파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후, 심도환은 활동 센터 입구에서 잠시 배회했다. 모든 이들이 한목소리로 심도환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로부터 대략 10분쯤 지나, 심도환은 옆쪽 질서 감독실로 향했다.
그가 안에 들어간 지 1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방에선 갑자기 괴성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때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이라, 그 상황을 목격한 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그 후로도 성건우는 7시 40분이 넘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용여홍, 양진원, 또 남편을 데리러 온 주슬기와 인사를 나눈 뒤, 성건우는 비로소 활동 센터를 떠나 방으로 향했다.
B 구역 196호에 도착한 성건우는 일단 문 아래쪽부터 살폈다.
아래엔 흰색 분필로 갓난아기가 간단히 그려져 있었다.
내일 새벽 5시 30분, 생명 제례 교단의 집회가 있다는 뜻이었다.
* * *
그 시각, 647층에선 장목화가 짐을 챙겨 나왔다.
구석진 곳에 자리한 엘리베이터로 향한 그녀는 전자카드를 긁고 층수를 눌렀다. 그녀가 누른 건 349층이었다.
349층은 다른 생활 구역보다 방들이 그렇게 밀집돼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굉장히 성긴 편이었다.
일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작은 광장이 보였다.
광장 중앙엔 흙으로 채워진 화단이 있고, 안엔 다양한 초록빛 식물들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 구역 천장에서 내리쬐는 빛도 일반적인 하얀빛이 아닌, 자연광에 더 가까웠다.
장목화는 잠시 꽃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갖가지 꽃들은 약간 시든 꽃도, 만개한 꽃도 있고, 다양한 만큼 상태도 제각기 다 달랐다.
이내 그녀는 왼쪽으로 꺾어 C 구역 12호에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소파, 티 테이블, 의자, 라디오 등이 놓인 거실이었다.
거실 왼편 주방과 연결된 곳에는 식당도 있고, 거실 안쪽으로는 여러 개의 방이 딸려 있었다.
창가 의자엔 한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쉰 살 정도로 보이는 그는 바깥 가로등 불빛을 빌려 책을 읽고 있었다.
빽빽한 검은 머리엔 사이사이 흰 머리 몇 가닥이 보이고, 곧은 눈썹과 커다란 눈이 인상적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전자 개량인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상당한 미남자였을 것 같았다.
그를 힐끔 보고 미간을 살짝 구긴 장목화는 문 옆 벽의 스위치를 켰다.
탁!
등이 다시 방 안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아빠, 왜 또 불 안 켜고 계세요?”
장목화가 애정 어린 말투로 아버지 장문봉을 질책했다.
장문봉은 들고 있던 책을 내리며 시원하게 웃었다.
“가로등 불빛이 이렇게 환한데 뭐하러 또. 에너지를 절약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젊을 때 생각하면⋯⋯.”
장목화는 얼른 손을 들어 귀를 만지작거렸다.
“어이쿠, 아빠,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튼 눈 나빠지면 안 되잖아요!”
장문봉은 책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늘 양쪽 가슴에 주머니가 달린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내 일부러 장목화 근처에 가까이 다가온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네 귀는 돌아가시기 직전의 네 할아버지보다 더 엉망인 모양이구나! 얼른 수술을 받아야겠어! 생체 공학 와우 이식 수술을 받는다면 지금보다 적어도 세 배는 더 잘 들을 수 있을 거다!”
장목화는 순간 입을 벌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수술 무서워하는 거 모르세요? 사는데 문제없으니 괜찮아요.”
“대체 뭐가 무섭다고 그러냐? 유전자 개조 받을 때나 생체 공학 의수를 이식받았을 때는 하나도 겁 안 냈잖아?”
장문봉은 전에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를 이야기를 또 주워섬겼다.
장목화는 또 한 번 어색하게 웃으며 나름의 변호를 했다.
“그때는 의식이 없었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무서워해요?”
“수술할 때는 당연히 마취해줄 텐데도?”
장문봉은 좀처럼 자신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딸이 안타까웠다.
몇 초간 침묵하던 장목화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스스로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는, 죽은 것 같은 느낌이 무서운 거예요.”
그리고 장문봉이 대꾸하기 전, 그녀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엄마는요?”
“회사에서 사과 두 상자를 나눠줘서 네 오빠한테 한 상자 주러 갔다.”
장문봉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사과 좀 깎아드려요?”
“됐어, 저녁 먹은 지 얼마 안 됐거든.”
장문봉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내 장목화가 서재를 가리켰다.
“아빠 컴퓨터 좀 쓸게요.”
“그래.”
장문봉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장목화는 경쾌하게 서재로 들어가 아빠의 컴퓨터를 켜고 그의 회사 내부 계정으로 접속했다.
반고 바이오 내부에는 구내 정보 통신망이 깔려 있었다.
컴퓨터가 있고, 권한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 접속해서 공개된 소식을 열람하고, 등급이 허락하는 한도 내의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부여된 권한에 따라 볼 수 있는 내용과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은 각기 달랐다. 심지어 사람은 같아도 접속 장소에 제한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반고 바이오 직원 대부분에게 컴퓨터는 굉장히 희귀한 물건이었다. 근무지에나 가야 볼 수 있을 정도였으며, 그 수량도 많지 않았다.
아버지 계정을 빌린 장목화는 보안 등급이 매우 낮은 내용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녀의 태도는 평소처럼 침착하고 여유로웠다.
컴퓨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소식들은 정각 뉴스에서 알린 소식들보다 훨씬 풍부했고 훨씬 더 심층적이었다.
그러던 그때, 장목화는 마침내 그녀가 찾던 제목을 찾았다.
「D8급 직원 유정현 사망 사건에 대한 정례 조사 보고」
그녀는 얼른 그 제목을 클릭해 진지하게 내용을 살폈다.
「⋯⋯엘리베이터 로비 감시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에 따르면 사건 전후 1시간 동안 해당 층 소속이 아니 외부인의 침입은 없다⋯⋯.
⋯⋯여러 직원은 당시 우정현 근처로 접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검시 결과 역시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인한 죽음을 시사한다⋯⋯.
결론 : 타살 가능성 배제. 자연사 처리.」
장목화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회사의 각종 제도가 다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어. 그럼 회사도 각성자를 포함한 갖가지 요인 때문에 발생할 사건도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었을 거야.’
그녀는 곧장 그 페이지를 나와 다른 내용도 열람해 보았다. 그리고 사건과 관련 없는 내용도 여럿 살핀 후에야 의료 관련 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녀는 각종 보건 지식을 검색해보다가, 아무런 의도도 없는 척 자연스럽게 검색어를 입력했다.
│최근 5년 동안 급성 심장 마비로 인한 사망 사례
곧 결과 페이지가 떴다. 대부분은 이상할 것 없는 사건들이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기록을 살피는데, 순간 장목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근 1년간 478층에서 심장 마비로 인한 사망 사건이 벌써 두 차례나 일어났다.
478층은 우정현이 담당하는 물자 공급 시장이 있는 그 층이자, 그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도 했다. 우정현은 지난 1년간 그 층에서 급성 심장 마비로 죽은 두 번째 사람이었다.
사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발병 비율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었다.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름의 추측과 의심을 안고 있는 장목화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그 전 기록을 보면 478층 내 급성 심장 마비 발생 비율은 1년에 한 건, 혹은 아예 없을 정도로 정상적이었다.
장목화는 이 페이지를 나가서 다른 내용을 한번 살펴보았다. 하지만 관심 없는 내용을 보고 있으려니 그녀의 눈에 초점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텅 빈 눈빛으로 장목화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는 건 그 각성자가 478층 주민이라는 건가? 그것도 최근 1년 안에 각성한?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어느 순간 그렇게 강력한 힘을 얻은 사람은 그 힘을 한번 써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질 못해. 그리고 그 시험 대상은 자신이 미워하던 상대가 될 가능성이 크지.
무엇보다 이건 생명 제례 교단에서 왜 이번에 우정현을 처리했는지를 설명하는 거야. 집회가 열릴 때마다 누군가를 질책하는 사람은 있었을 텐데, 건우는 그렇게 질책받은 사람이 죽은 건 처음이었다고 했어.
그래, 우정현 근무지가 있는 478층에 교단에 속한 각성자가 한 명 있는 거야. 그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아주 잘 통제해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거지. 회사에도 절대로 들키지 않고.
생명 제례 교단이 이번에야 비로소 신의 징벌을 집행하기로 한 건 바로 그 때문이야.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 495층 신도들이 사명에 더욱 깊은 두려움을 느끼면서, 더 신실한 마음을 갖고 더 순종할 수 있도록 한 거지.
그럼 심도환은 어떻게 하다가 무심병에 감염됐을까? 그렇게 편한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각성자를 통해 우정현을 죽인 거지? 우정현도 무심병에 감염시키면 됐을 텐데. 그쪽이 더 은밀하고 효과도 좋잖아. 설마 그건 무심병이 아니라 각성자 능력으로 만들어낸 비슷한 증상일 뿐인 건가?’
장목화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면서도,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