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사랑의 국경선! (8)
막상 웃고 있지만 보는 사람들은 전혀 즐겁지가 않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가? 설마 일부러 잡힌 건가?
“왁!”
“으아악!”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아리에테가 캐롯의 놀래킴에 호들갑을 떨었다.
분노한 그녀가 캐롯을 들고 흔들려는데 묵직하다.
“우, 무, 뭐냐?”
“으헤헤! 가방이 무거워서 그래,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르메이가 또 놀려?”
제 몸집보다 큰 가방을 등에 멘 캐롯을 다시 내려준 아리에테가 물었다.
“르메이가 누구지?”
“어, 나야.”
아까부터 상스러운 소리를 해대던 녀석이었다.
마당발 캐롯의 절대적 친화력은 무려 마왕의 아들들과 이름을 트는 사이로 발전했다.
캐롯이 하나하나 가리키며 소개했다.
“르메이 옆으로 발칸, 쉬페르 그리고 번데기 쥬다. 어? 쥬다는 죽었어?”
실실 웃고 있는 쉬페르가 주먹을 들고 흔들었다.
“기절시켰어.”
“오오, 잘했네. 자주 기절시켜. 애를 걷어차다니 어떻게 되어 먹은 정신머리야? 너희 엄마가 찾아오면 내가 아주 혼쭐을 내줄 거야.”
조그만 꼬마가 해대는 막말을 재미있게 쳐다보는데 웬 거인이 선을 넘어서 들어왔다.
크랭크였다.
“가자, 바쁘다.”
“오우!”
“인간이 저렇게 클 수도 있네. 누구야?”
마왕의 아들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캐롯이 그를 소개했다.
“여기 우리 주인님. 이쪽 금발은 우리 파티 리더. 아, 그렇지! 크랭크! 팔 벌려! 아리에테는 이쪽!”
그러다 또 뭔 장난기가 돋았는지 캐롯은 크랭크를 맨 뒤로 보내고 팔짱을 끼게 한 아리에테를 중간에, 자기는 맨 앞에 가방을 맨 채로 외쳤다.
키 차이로 차례로 얼굴이 드러났다.
“뚜둥! 이름하여 캐롯 패밀리!”
잠깐 그곳에 있던 모두가 그들을 쳐다본다.
도마뱀 인간들은 시큰둥한 표정이었으나 마왕의 아들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크랭크와 아리에테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부끄러워 죽으려 했고,
“캐롯 너는!”
“아이! 바쁘다 바빠! 어서 가자!”
“으음, 좀 부끄럽다.”
“거기 서라! 아직 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애들까지 우르르 몰고 가 버리자 마왕의 아들들은 각자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시끄럽던 게 없어지니 조용하니 살 것 같네.”
“저거 자동 인형이라지? 진짜 사람 같은데?”
“사람 같은 자동 인형이라면 마왕성에도 하나 있잖아.”
“에이, 그 괴물하고는 다르지. 뭐랄까, 저건 좀 붙임성? 귀엽지 않았냐?”
바닥에 동그랗게 그려 놓은 결계 감옥은 두 군데, 도마뱀 인간들은 따로 모여 있었다. 그 안에 있던 녀석이 송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도련님들, 조금만 참으십시오. 곧 마왕님이 와주실 겁니다.”
누워 있던 도련님들이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거 말인데, 신기하지? 사절단이나 구조대가 아니라 마왕성이 직접 온다고?”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인질 놀이 삼아 잡혀줬더니 일이 재미있게 되어 가네. 후후흐.”
다리를 쭉 펴고 앉은 채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실실거리는 쉬페르를 보고 발칸이 코를 벌렁거렸다.
“이 음흉한 자식이 또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냐? 르메이! 내가 잡을 테니 겨드랑이를 공략해! 솔직하게 말해라 이놈아!”
“으하하! 모른다고! 간지럽다고!”
늘상 있는 일인지 유쾌한 마족들의 장난질에도 도마뱀 인간들은 별 반응 없었지만, 그들을 감시하던 인간 경비병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쯧, 포로로 잡힌 주제에 뭐가 그리 신나는지. 다 큰 어른들이 하는 짓이 애들 같구나.”
“쉿! 들을라.”
그때 곁에 세워 놓았던 오토마톤이 고개를 휙 돌렸다.
다가오는 마족들에게 반응한 것이다.
함께 감시 중이던 하드 스킨 오토마톤 오롤 역시 천천히 투구를 돌린다.
“으히익!”
보따리를 안고 온 마족들이 찔끔하자 경비병이 물었다.
“무슨 일이오?”
“위, 위문단에게 사식을! 그리고 정중히 교미를 요청하러 왔다!”
뭐라고 하는 거지? 잘못 들은 건가?
서로를 바라보던 경비병들의 얼굴이 점차 노래지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마족이 말을 고쳤다.
“아니, 짝짓기! 그래! 짝짓기!”
경비병들의 얼굴은 이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주먹을 움켜쥔 마족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내 발정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다음은 내 차례였단 말이다!”
빠직!
이마에 핏대, 눈에 실핏줄이 돋은 경비병 하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포로를 내줄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돌아가시오.”
“이이잇! 그럼 너라도! 사, 상관은 없는데…….”
부끄러움 타는 듯 수줍게 말하는 마족 수비대원을 보고 경비병은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오롤 726호, 이분들을 정중히 쫓아내라.”
트드득-!
커다란 몸을 돌린 오롤 726호가 두꺼운 팔을 휘저으며 걷기 시작했다.
“으아아! 야! 너! 얼굴 기억했어! 두고 보자고!”
오롤에게 쫓겨 도망치는 그들을 바라보며 경비병 중의 하나는 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난 괜찮았는데.”
턱!
눈이 잔뜩 충혈된 동료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부인께 어서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겠군.”
“으악!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지 말아줘!”
도망치던 마족들은 앞서가던 크랭크와 캐롯을 지나쳤다.
“우아악! 따라오지 말라고!”
쿵! 쿵!
뭔가 싶어 투구를 돌린 크랭크는 이제 곁을 지나치는 오롤을 보고 그제야 놀랍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용사의 오토마톤 오롤, 나는 하나만 있는 줄 알았다.”
“아까 헤리슨에게 들었는데, 원래는 1,000대 넘게 있었대. 100년 전 마왕군과 전면전 당시 대부분 부숴 먹고, 남은 걸 접경지 여기저기에 나눠 놓았다고 하더라고?”
커다란 가방을 메고 걷던 캐롯이 크랭크를 올려다보았다.
“근데 저 크기, 그 물량.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캐롯은 다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르곤의 예전 공방의 그 녀석들이랑 비슷하지?”
“그분은 대체 안 끼는 곳이 없구나.”
아리에테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잠깐 생각하던 크랭크는 손을 저었다.
“관련되어 있어도 이상할 건 없겠지.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빨리 가자. 마왕성이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해.”
“무슨 일인데 그러냐? 도와줄까?”
아리에테의 말에 크랭크와 캐롯이 크고 작은 손바닥을 폈다.
“아니, 비밀 작전이다. 넌 다른 파티 멤버를 찾아서 할 일을 일러줘라.”
“다른 모험가들이랑 마족 동네 관광하고 있을 거야! 혼자 찾아갈 수 있지? 좀 이따 보자고!”
앙상한 마른 가지로 이뤄진 겨울 숲으로 들어가 버리는 둘을 아랫입술을 쭉 내밀고 바라보던 아리에테가 문득 중얼거렸다.
“시온.”
“예.”
“그래, 그냥 불러보았다. 가자.”
둘은 이제 마족들의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감시를 위해 방호 목책을 포함해 나무까지 다 베어 버려서 훤해진 마족들의 거주 구역에는, 지금 건너편에서 넘어온 경비병들과 모험가들이 돌아다니며 그네들의 별 볼일 없는 보금자리를 고쳐주고 있었다.
따로 그런 명령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구경 온 모험가 하나가 화를 내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가업이 목수인지라 어릴 때부터 싫어도 나무와 못질을 배웠던 모험가가 치를 떨었다.
일이 싫어서 뛰쳐나왔지만, 안목은 속일 수가 없었다.
“엉망이야! 엉망! 이런 걸 집이라고? 천장이 보이잖아! 비가 오면 어쩔 거야?”
“네 자식은 뭔데 남의 집을 평가하고 지랄이야! 밤이 오면 별을 세고 비가 오면 식수를 받을 수 있으니 좋지!”
집주인은 금발에 사슴뿔 같은 거창한 뿔을 가진 여마족, 그녀 역시 화를 내고 있었다.
목수 모험가는 계속 떠들어댔다.
“무지를 낭만으로 포장하지 마라! 겨울에는 그럼 대자연을 온몸으로 음미하는 거냐? 마족은 추위를 안 타?”
“그, 그런 건 아닌데!”
마족들의 마을을 구경 간다기에 그들의 건축 양식이 궁금해서 따라왔던 남자는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부시크래프트로 만든 내 움막보다 못한 집에 사는 주제에!”
그가 주 무기로 사용하는 쇠망치를 뽑아 들자 사슴뿔 여마족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이 자식 봐라? 지금 우리가 순순히 고개 숙이고 기어 다니니 우습게 보이냐?”
“뭐라는 거야? 저리 비켜!”
그녀를 밀치고 밖으로 나간 남자는 당장 지붕으로 기어오르더니 망치질을 시작했다. 그러더니 밑에서 올려다보는 자기 오토마톤에게 외쳤다.
“체인! 가서 나무 좀 베어와라! 판자가 필요해!”
오토마톤 체인이 등에 멘 무장을 끄집어냈는데 최신 유행 중인 체인 소드였다.
원래 목적은 벌목.
키이이이잉!
콰가가각!
문명의 이기의 등장에 마족들은 입을 딱 벌렸다.
“나무는 도끼로 베는 게 아니야?”
“내가 온 이상 이 꼴을 그냥 봐 넘길 수는 없다! 금발 사슴뿔! 뭘 쳐보고 있냐! 집 고쳐줄 테니 거들어라! 저걸 옮겨!”
당황하여 어버버거리던 그녀도 집을 고쳐준다는 말에 숲으로 뛰어가서는 체인이 베어 넘긴 나무를 끌고 왔다.
이상한 성질을 부리는 모험가를 보던 겔이 히죽 웃었다.
“내 친구야. 목수 일이 싫어서 뛰쳐나왔는데도 망가진 집을 보면 발작을 일으키는 녀석이지.”
“인간들은 이상한 녀석들이 꽤나 많구나.”
포대기에 미노를 업은 쿠핀의 중얼거림이었다.
이리하여 그를 주축으로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다.
잘라온 나무는 즉석에서 나무판자로 가공하여 자재로 탈바꿈되고, 그것은 여기저기서 사용되었다.
“기술자다! 집 고치는 기술자가 왔어! 약간 이상하지만!”
그 약간 이상한 집 고치는 기술자가 망치를 들고 지붕에 올라서서 괴성을 질렀다.
“곧 눈이 올 거다! 그전에 벽이랑 지붕을 손봐야 해! 움직여라! 이 쓸모없는 마족들아!”
“근데 말하는 게 싸가지 없다. 너!”
구경하던 모험가들도 망치질 정도는 할 줄 알았기에 두 팔을 걷어붙였고, 마족들도 부지런히 움직여 뒤늦은 겨울 대비에 나섰다.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그녀들이지만 그게 추위를 막아주진 않기에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발휘한 것이다.
다들 나무를 베고 자재를 확보하고 서툰 망치질을 해댔다.
겔의 의도대로 뜻하지 않은 보수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난동을 피우던 보급선의 병력은 포로로 구속된 상태지만 본래 수비대원이었던 마족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똑같이 취급하자니 상황이 복잡하기도 하고,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지라 당분간 이쪽의 지시에 따라주는 조건으로 눈감아주고 있었다.
탕탕!
입에 못을 물고 망치를 두들기던 겔이 문을 여닫아 보더니 빙글 웃는다.
“문은 이만하면 되겠는데?”
“그래, 끽끽하는 소리가 이제 안 나네.”
옆에서 구경하던 쿠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겔은 휑한 집안에 들어가 보더니 다시 한 번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살고 있었구나. 처음 와봤어. 크흡, 나는 그렇게 도움도 못 줬는데 혼자서 미노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아! 정말, 부끄럽게 왜 또 쳐 울어!”
발끈한 쿠핀의 목청에 포대기에 싸여 그녀의 등에 달라붙어 있던 미노가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 나 내려가면 안돼?”
“안돼! 갈비뼈가 나갔으니 한동안 엄마 등에 바싹 붙어 있어야 해.”
“난 아빠 등에 붙어 있고 싶은데.”
소매로 얼른 눈가를 비빈 겔이 곧 흐흐 웃으며 말했다.
“어, 그럴래?”
마족은 상처 회복이 빠르다. 그래서 미노의 상처도 금세 아물었으나 쿠핀이 놔주질 않았다.
“안돼. 아빠는 할 일이 많아.”
아빠, 가슴 뿌듯해지는 단어다.
겔이 실실 웃으며 미노를 보다가 말했다.
“난 괜찮아. 이리 줘.”
“됐어, 내가 안 괜찮아. 미노가 잘못되면 네 얼굴 보기가 미안해진다고. 온전히 나 혼자 키운 게 아니니까.”
겔은 정말 감동해 버렸다.
“크흐읍! 쿠핀!”
“아, 정말!”
그의 가슴에 폭 파묻힌 쿠핀은 쓴소리를 내면서도 손은 그의 등을 꽉 끌어당겼다.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겔이 중얼거렸다.
“이젠 떨어지지 말자, 꼭 붙어서 사는 거야.”
“그래.”
마왕성이 별다른 짓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