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감자 캐기! (3) 275 >
모두가 감자밭에서 일을 돕는 동안, 크랭크는 장갑차량의 작업실에서 오토마톤을 점검하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선 몇 년은 거뜬하지만, 전투용의 마모도는 극단적이지요. 이런 식으로 관절의 열화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의 설명에 조수로 자원한 코비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랭크는 그렇게 봄바, 게이지, 가이거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지원해 줬다는 군용 오토마톤도 살펴봐 주었다.
코비가 놀란다.
“와! 요즘 개척민 마을에는 오토마톤도 지원해 줘요?”
“세금을 부담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과가 나오는 곳은 해준다고 들었습니다.”
“에에, 그건 좀 쓰네요. 같은 사람인데 어디는 되고 어디는 안되고.”
불만스러운 젊은이의 목소리, 크랭크가 투구를 들어 코비를 바라보았다.
“코비, 안타깝지만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요.”
“그래! 어른이면 화를 내기 전에 생각부터 해야지!”
작업대 밑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내렸다.
캐롯이 히히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코비, 지오가 보일러 때문에 불러. 좀 가봐.”
“옙!”
그가 나가고, 둘만 남은 작업실에서 캐롯이 어제 일을 크랭크에게 들려주었다.
오토마톤의 관절에 윤활액을 보충하던 크랭크는 별로 놀랍지도 않은지 그저 가볍게 투구를 끄덕였다.
“음, 그럴 것 같았다. 이런 곳에 보내는 오토마톤은 보통 한두 군데 문제가 있기 마련인데, 이 녀석들 상태가 너무 좋았거든.”
“그래서 어떻게 할까?”
작업을 마무리하고 장갑판을 모두 덮은 크랭크가 오토마톤 디바를 불렀다.
칭!
눈을 뜨고 일어난 그가 어깨를 움직여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가동 상태 양호, 점검 감사합니다. 마이스터 크랭크.”
“어깨 관절에 열화가 조금 있어서 윤활액을 교환했으니 참고해라.”
작업대에서 내려와 주섬주섬 전투복을 차려입던 디바가 고개를 까딱이더니 다시 경계 근무로 복귀했다.
“디바! 다음 차례 보내줘!”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캐롯에게 크랭크의 중얼거림이 들린다.
“애초에 그들의 밀고가 있었기에 토벌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어떤 왕께 진언했다지. 공을 쌓은 자, 죄를 지었으니 공도 죄도 사하여 주자고.”
“음, 아리에테에겐 계속 모르는 척해야겠네.”
“그렇지. 아픈 기억을 파봐야 좋을 게 없다. 팔다리가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이야기는 또 다르지만.”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한 주인님의 발언에 캐롯이 킥킥 웃는다.
“네가 내 주인님이라서 정말 다행이야.”
“나도다.”
이번엔 주먹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마주했다.
크고 작은 손바닥을 마주 대자 따뜻한 무언가가 마력 엔진에서 피어오른다고 캐롯은 생각했다.
그때 크랭크의 머리에 번개가 쳤다.
“참, 누구였지? 강도단의 누군가에게 여기를 소개해 줬는데. 분명 내기도 했었다.”
“앗!”
당황한 캐롯과 시선을 마주한 그의 눈빛이 번쩍이더니 후다닥 차량에서 뛰어내려 촌장을 찾아갔다.
“자네가 말하는 그런 사람은 온 적 없는데?”
“에잇!”
갑자기 캐롯이 냅다 도망치기 시작하자 크랭크가 그 뒤를 바싹 쫓았다.
난데없는 두 사람의 술래잡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마다 웃는다.
“와! 여전히 사이가 좋네요. 요전에 들른 모험가는 데려온 오토마톤을 장비 취급하던데.”
“저 친구들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당 수천에 등까지 믿고 맡길 수 있는데 그걸 험하게 다루는 놈들이 이상한 거지. 인성 파악의 척도라고 불러도 될 게다.”
마을 어르신의 중얼거림에 젊은이들이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내기에서 진 캐롯이 텅텅 빈 지갑을 들여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우엥! 믿었는데! 레그 이 아저씨, 언젠가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테야! 다리를 뿐지를 테야!”
“아, 그때 그 사람? 결국 안 왔구나.”
“사람이 참 입체적이죠? 그땐 꼭 새 출발할 것처럼 보였는데.”
크랭크는 강탈한 동전을 세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니 다들 사람을 함부로 믿지 말고 주의합시다. 내 카드는 최후의 최후까지 아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
“그런 인생 참 쓰다! 써!”
빈 지갑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털면서 혀를 빼문 캐롯의 앙탈에 모두가 킥킥거렸다.
감자도 캐고, 오토마톤도 점검하고, 공중 목욕탕의 마력 보일러까지 손 봐준 크랭크들은 마을 사람들과 작별을 나누며 복귀를 서둘렀다.
출발 직전, 캐롯은 이주한 전 마도사 아하테를 찾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안녕!”
창문으로 쑥 올라온 캐롯의 얼굴을 보고 움찔한 아하테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좀 어때?”
품에 안긴 아기는 엄마의 젖을 힘차게 빨고 있다.
그걸 대견하게 바라보던 아하테가 말했다.
“건강해.”
“다행이네. 있지, 편지 해도 돼?”
아하테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았다.
“편지 말이냐?”
“응, 오토마톤은 잠을 안 자니 심심하거든? 서로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는 거지.”
“뭐, 좋을 대로 해라.”
히히 웃음 지은 캐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 이름은 뭐야?”
“아직 없는데.”
“오! 내가 이름 지어도 될까?”
아하테는 귀찮으면서도 호기심이 돋았다.
첫 아이라 들뜬 남편 녀석이 자꾸 이상한 이름을 지어대서 슬슬 짜증이 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집 안으로 들어오진 않고 창문에 고개를 내민 캐롯이 말했다.
“사내아이니까, 비트!”
“그거 빨간 무 아니냐?”
“그거 말고 비트!”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해 낸 아하테의 이마에 핏줄이 휙 돋았다가 확 사그라든다.
“나쁘지 않네, 참고할게.”
“음! 양지바른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해! 쭉 이곳에 있어 줘!”
이 말을 마치고 캐롯은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아하테는 젖을 빨고 있는 아기를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런 끔찍한 곳에서 널 키울 순 없었어.
탕탕.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방열 가발을 늘어뜨린 오토마톤 하나가 서 있다.
감시와 경호를 위해 와 있는 녀석들, 좋게 볼 수가 없는 존재들인데 요즘 그 평가가 바뀔 것 같다.
“숲에서 따왔습니다. 산모의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창가의 테이블에 갖은 산열매가 수북이 쏟아지는 모습은 그녀를 어쩐지 즐겁게 만들었다.
* * *
아르곤에 도착하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그리고 손님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르클레르냐? 이젤리아에 있던 거 아니었어?”
자기 집에 와 있는 것처럼 소파에 기대앉아 있던 르클레르가 그들을 불러 앉히고 샤를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그러다 우물쭈물 서 있는 소년들을 보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음? 저 애들은 누구야?”
서로 눈치를 주고받던 소년 중의 하나가 인사를 했다.
“그,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아멕스 공작 영애.”
다리를 꼬고 빤히 그를 쳐다보던 르클레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버밀리온 자작 가문이지? 미안하지만 네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아.”
“하, 하버트입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다른 친구들도 줄줄이 가문과 이름을 소개했다.
귀족이라면 사교계 입문은 필수,
그 사교계에서도 상당한 파벌을 자랑하는 쥬세페 공주의 친목회를 모를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르클레르 본인도 이쪽에선 꽤 유명인.
“그런데 귀공들은 왜 여기에?”
그러면서 아리에테를 쳐다보자 팔짱을 낀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현재 진행 중인 사업을 설명했다.
르클레르가 슬쩍 웃는다.
“용사 훈련소 1기생? 말썽꾸러기 교화소?”
“그렇다. 꾸준히 발전해서 네가 쳐다도 못 볼 위인으로 성장해 주마.”
좌절하지 않는 여기사를 바라보며 르클레르가 푸근하게 웃음 지었다.
“그런데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무슨 일이긴, 잊고 간 물건 주러 왔지.”
눈을 감은 르클레르가 손바닥을 두드리자 곁에 앉은 보좌관이 묵직한 가방을 탁자 위로 올렸다.
두루마리를 좍 펼친 그녀가 말했다.
“이하 생략, 위기로부터 왕국을 구한 모험가들에게 약소한 금액으로나마 그 용기를 찬양하는 바로다. 이젤리아 30대 국왕 그란프라스. 아직 끝난 거 아냐. 여기저기서 보내온 답례가 더 있어. 정말이지 좀 기다렸다가 받아 가면 좋았을 텐데.”
테이블로 계속 올라오는 돈 자루와 보석함, 각종 증서, 감사패들을 보고 다들 입을 딱 벌렸다.
르클레르가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뒷처리에 경황이 없어서 간소하게 끝냈지만, 아마 내년쯤에 제대로 된 수여식이 있을 거야. 그때 또 가야 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던 크랭크가 아리에테를 보았다.
“잘됐구나.”
“엇? 나, 나라고?”
흐흐 웃던 르클레르가 크랭크를 가리켰다.
“당신도 포함이거든?”
“그건 싫군요. 명예 작위 같은 것은 아리에테가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봅니다.”
아랫입술을 삐죽 내민 아리에테가 그를 보았다.
“귀찮으니 떠넘기는 게 아니냐?”
“들켰나? 사실 나는 돈이면 충분하다.”
피식 웃어 버린 아리에테는 감사장을 들어 보며 다시금 놀라워했다.
르클레르는 이제 캐롯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여기 캐롯은 우리나라에서 수세 기만에 출현한 드래곤 슬레이어로 이름이 올라갈 거야.”
“우오오오!”
모두가 놀라워하며 조그만 꼬마를 쳐다보자 코가 높아진 캐롯이 고개를 쳐들고 으하하 웃어댔다.
“봤지? 내가 이 정도라고!”
“와! 진짜였구나. 나는 그냥 헛소린 줄.”
“투덜이 뽀리스! 네 잘생김 따위 내겐 통하지 않아!”
“으억컥!”
캐롯이 보리스의 목을 조르는 사이, 리슐리에는 내심 부러운 듯 손톱을 깨물었고 비타는 따라갔어야 했다고 징징거렸다.
르클레르의 말은 계속되었다.
“조만간 리즈넷 왕궁에서도 부를 거야. 보통 몬스터가 아니라 드래곤을 격파한 것이니까. 영웅에게 충분한 예우를 갖추지 않으면 위기가 닥쳤을 때 다들 그걸 기피하거든?”
보리스의 목을 조르고 있던 캐롯이 고개를 돌렸다.
“에, 근데 드래곤 완전히 쓰러뜨린 게 아니거든요? 겨우 쫓아낸 것뿐인데.”
“영웅은 필요해. 어수선한 민심을 휘어잡는데 그것만 한 것도 없으니까.”
계속해서 르클레르의 근황 보고가 이어졌다.
도망친 드래곤 메르카바는 현재 행방불명, 엘프들이 탐사대를 꾸려 찾고는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는 상태였다.
“드래곤 하트를 노리는 거지. 그건 엄청난 보물이니 말이야. 그렇지 않아? 검은 머리 아가씨, 그리고 양철 거인.”
모두가 투나와 크랭크를 쳐다보았다.
크랭크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마력 엔진을 만들어 보고 싶군요.”
“우효오-! 사, 상상만 해도 구, 군침이 흐, 흘러. 으흐히히헤헤!”
캐롯도 덩달아 신나 버렸다.
“나한테 달아주는 거야? 응? 달아주는 거야? 우효! 용의 심장! 기대된다!”
용의 심장.
흡수한 마력을 뱉어내는 마력석과 개념은 같지만 드래곤 하트의 경우엔 그 용량이 어마어마해서 생산에 가까운 개념이 적용된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 보던 크랭크는 역시 고개를 저었다.
“미친 짓이다. 엄청난 출력을 얻는 대신 내구 수명이 극단적으로 떨어질 거야.”
“조, 조각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여, 영구동력기관을 만들어 볼 수 있을지도 몰라.”
팔짱을 낀 크랭크가 투나를 바라보는데 그 안의 눈동자가 잔뜩 충혈을 일으켰다.
영구동력기관!
“투나,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구나.”
“으히히헤헤헤! 저, 정말? 두, 두근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