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고백! 269 >
저택 인근에 나타난 개미 떼와 맨몸으로 싸우는 기염을 토하던 아리에테와 크랭크도 갑자기 나타난 자동 갑옷을 보고 환호성을 올렸다.
“다들!”
이이잉! 쉬이익! 쉭!
특유의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고속 기동이 가능해진 자동 기사들이 속속 그들 주변으로 도착한다.
전열을 재정비한 동부 연합 흑백합기사단이 도착한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냐? 저것들은 다 뭐야?”
수도방위 기사단장은 도심을 종횡무진 누비는 개미 라이더와 고기동 자동 갑옷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여러 단체가 난입한 개미 소탕 작전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개미를 사살했다는 보고 후, 수색을 종료한 무력 단체가 이제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먼저 제이드 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도동가 족장, 도움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우리 일이다. 그대들은 자리를 피해주었으면 좋겠군.”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도동가 족장은 그녀의 말에 따라 일족을 이끌고 물러나 주었다.
일라이자의 가슴 장갑판이 열리며 캐롯이 나와서 그들을 배웅했다.
“고마워요! 친절한 이웃! 잘 가요! 언젠가 또 봐요! 어지간하면 싸우지 말고 지내요. 우리!”
험악한 얼굴로 주변 무력 단체들과 기 싸움을 하던 그들은 캐롯에게만 손을 흔들어 주는 등의 인사를 마치고 바로 성문으로 몰려 나가 버렸다.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것들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돌아가서도 할 일이 많다. 겨울 식량 준비도 해야 하고 이사도 시작해야 한다.
속이 시커먼 인간들의 일 따위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겠지.
두두두!
몰려 나가는 개미 기병단의 모습은 그걸 처음 보는 시민들에게 충격을 선사했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선보였다.
“뭐야? 오크야? 오크가 우릴 도와준 거야?”
“동부 쪽에서는 오크를 용병으로 고용해서 같이 싸운다더니 사실이었어. 그런데 오크치고는 나쁘지 않은데?”
“어허! 이 친구 큰일 날 소릴!”
“그보다 개미, 개미를 타고 있잖아요! 어떻게 한 거죠? 길들인 건가?”
“정말, 저게 되네?”
“소나 말처럼 쟁기도 끌 수 있으려나?”
그때 시민들의 소박한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던 속이 시커먼 사람 중의 하나가 입을 열었다.
“소속을 밝히시오! 그대들은 어디의 누구인가!”
쉬이이익!
정자세로 선 자동 갑옷 하나가 앞으로 스르륵 나서더니 마스크를 열었다. 제이드 기사단장이 얼굴을 드러냈다.
“동부 연합 흑백합기사단의 서 제이드 인사 올립니다. 링겐 수도방위 기사단장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여왕 폐하께서는 어디에 계시죠? 그분을 만나 뵙기 전까지는 못 갑니다.”
갑옷 때문에 키가 커져서 그녀를 올려다보아야 했던 링겐 기사단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거대 돌 거인은 아직 그대로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여왕의 목소리가 거인에게서 흘러나왔다.
-국민 여러분,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중대 발표가 있겠습니다. 제29대 아멜리아 여왕께서는 작년, 미스트랄 공주 전하를 출산 후 승하하셨습니다.
“뭐라고?!”
그를 우러러보던 수도 시민들이 경악했다.
800년 만에 일어선 돌 거인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이지스는 800년 전,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돌 거인의 제어 연산을 위해 제작된 자동 인형이었다. 이 내용을 아는 것은 대대로 왕위 계승자뿐.
고개를 들고 이야기를 듣던 아리에테가 중얼거렸다.
“놀랍구나! 800년간 이어진 비밀이라니.”
“800년 전에도 자동 인형이 있었다니 그게 더 놀랍다.”
팔짱을 한 크랭크도 투구를 들고 돌 거인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죽음을 직감한 여왕은 대대로 비밀의 방에서 만날 수 있는 고대의 자동 인형에게 부탁을 남겼다.
왕자와 공주가 장성할 때까지 곁을 지켜달라고.
돌 거인에게서 실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자동 인형이 사람의 위에서 군림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겉모습을 바꿔 여왕인 척 해보았지만 속은 결국 자동 인형, 게다가 그녀가 진짜가 아니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야망을 품은 자들이 속출하게 되었고, 압박이 이어지자 그걸 수습하려던 르메르트 공작 역시 역습의 메르카바에게 보기 좋게 이용당하게 된다.
투둑! 쿠쿵!
말하는 중간중간 거대 돌 거인의 몸에서 건물이 떨어져 내린다.
가짜 여왕 행세를 해보았던 이지스가 이 상황에서 우스갯소리를 들려주었다.
“800년 전 나의 마스터는 소위 호색한으로 많은 자손을 남겼습니다. 그 후예가 바로 당신들, 여러분의 강한 의지와 고집은 그를 닮은 것입니다.”
“뭐라고?”
이번엔 크랭크의 목소리, 투구를 돌린 그는 새삼 놀랍다는 듯 아리에테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아버지가 이젤리아 사람이라고 했었지.
“뭐? 왜 그러냐?”
“놀랍군. 너를 보니 800년 전의 용사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이 될 것 같다.”
“크래에에엥크읏!”
퍽퍽퍽!
아리에테와 크랭크가 툭탁이는 사이, 돌 거인이 하나 남은 팔로 광장에 모여 있는 기사단의 일라이자를 가리켰다.
“사랑하는 그의 후손 여러분, 여기 그대들의 용사를 소개합니다. 부디 그를 보좌하여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주십시오.”
쿠르르릉! 콰쾅!
말을 마친 돌 거인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자 모두가 통탄에 젖어 안타까움을 드러냈고, 그것은 일라이자의 조종석에서 기어나와 소리를 지르는 왕자의 목소리에 배가되었다.
“엄마아아!”
왕궁 법도상 어마마마쯤으로 불러야 했지만 이지스는 소심한 왕자를 위해 단둘만 있으면 엄마라고 부르도록 했었다.
무너지는 전설의 거인, 그를 향한 왕자의 소탈한 외침과 눈물은 많은 사람의 눈시울을 적셔놓았고 몇 사람의 마음마저 움직였다.
우리가 용사의 후예? 내가?
떨리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던 수도방위 기사단장이 제이드를 보았다.
그는 어떤 각오를 다진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야기 좀 합시다. 제이드 기사단장.”
“좋지요. 듣기 좋은 말씀이라면 얼마든지.”
이후, 제이드 기사단장이 주축이 되어 한동안 기사단과 귀족원에서 파벌 정리가 이어졌다.
말이 정리지 사실상 숙청.
다만, 드래곤 메르카바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점을 고려해 가능한 한 조용히 진행되었다.
“이 기회에 싸그리 엎어 버리는 것입니다!”
“보시오, 제이드 기사단장. 난 이제 돌아가고 싶은데.”
어느새 한 팀이 되어 뒤처리 작업 중이던 보이드 자작이 싫은 소리를 하자 제이드 단장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말했다.
“그건 안됩니다. 후작님.”
그녀의 호칭에 보이드 자작이 눈가를 찌푸렸다.
마법 몇 번 쐈을 뿐인데 그는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위명에 명예 작위까지 하사받았다.
“아니, 난 리즈넷 국민인데, 거기 궁정 마법사라고.”
“원래는 이젤리아 국민이셨잖습니까? 안됩니다. 가시죠, 오늘도 후작님과 할 일이 많습니다.”
맡겨진 외교 업무 따위 보좌관들에게 던져주고 자신은 그저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을 만끽하려 했던 것인데 계획이 다 틀어져 버렸다.
네 이놈 드래곤 메르카바!
“어서 가시죠. 그냥 있어 주시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거 참.”
곁에 와서 팔짱을 낀 그녀에게 보이드 명예 후작은 가기 싫은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사람은 대체로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시하기 마련, 무려 드래곤에게 마법을 날리고 조롱을 해댄 그의 위상을 기사단은 물론 시민들 모두가 보았다.
드래곤에게 맞선 그에게 감히 토를 달 사람이 있을 리 만무, 정말 그냥 옆에 세워만 두어도 다들 벌벌 떠는 만능의 프리패스 같은 느낌이었다.
보이드 자작도 그걸 알고 있었고, 솔직히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본국에 귀환했을 때 작성해야 할 보고서를 위해 잠자코 따르기로 했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여왕의 명령으로 드래곤에게 공격을 가한 근위대 구성원도 같은 위명을 얻어서 다들 코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 되었으며, 자동 갑옷을 타고 혼자서 드래곤에게 덤벼든 왕자는 국가 영웅 취급이었다.
“엄마, 이건 어디에 심어요?”
고요한 별채의 정원, 파헤쳐진 정원을 복구하는 모자가 있다.
방열을 위해 백금발을 산발한 가짜 여왕 이지스는 모종삽을 들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전하, 나는 그대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어, 하지만 엄마 얼굴인데.”
엄마, 어마마마나 여왕 폐하보다 입에 붙는 단어였다.
시무룩 해하는 왕자를 내려다보던 이지스가 쭈그려 앉더니 그와 눈을 맞추었다.
왕자를 비롯한 근위기사단과 궁내부원들의 강력한 요청에 이지스는 여왕의 외모를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어쩔 수 없군요. 여왕과의 약속대로 나는 당신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곁에 있겠습니다.”
“응! 엄마!”
왕자가 밝게 웃음 짓자 바라보던 가짜 여왕 이지스도 슬그머니 표정에 변화를 주어보았다.
멀리서 그걸 훔쳐보던 크랭크가 중얼거렸다.
“무척 자연스럽군. 정비도 없이 900년 가까운 세월을 어떻게 버텨온 거지? 논리 오류는? 마력 엔진이 식물에 끼치는 영향은? 실전된 기술의 창고야. 그야말로 인류의 보물이다.”
스릉-!
크랭크의 투구 앞으로 롱소드 하나가 올라왔다.
근위기사단 중의 하나가 시퍼런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실례되는 소리를, 저분은 이젤리아의 보물입니다.”
모자 사이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금 거리를 둔 채 복구 작업을 거들던 근위기사들이 모두 시뻘건 눈을 뜨고 있다.
무너진 거인 안에서 무사히 생환한 이지스는 드래곤의 브레스로부터 도시를 구한 그 영웅적 면모와 더불어 800년 전 용사의 파트너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나라의 국보로 지정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 크랭크와 비슷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젤리아 왕국 수도에서 일어난 슈퍼괴수대전과 드래곤 메르카바의 패배 소식, 그리고 800년 전 거대 병기의 출현은 엘프들이 바다를 건너도록 만들었다.
가뜩이나 앞으로는 복구, 뒤로는 숙청 작업에 정신이 없는데 엘프들까지 찾아와 조사 참관을 요구하자 제이드는 머리가 터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고민은 자문을 맡은 보이드 명예 후작의 조언으로 해결되었다.
“받아들이게. 적당한 먹이를 던져 주고 서로를 이용하는 거야. 이젤리아도 고집을 꺾을 때가 되었어.”
결국 합동 조사로 협상하고 그들의 방문을 허가했다.
그리하여 섬나라 이젤리아에 정식으로 엘프들이 발을 내디뎠다.
거대한 발자국에 쑥대밭이 된 왕궁의 정원, 성 거인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는 작은 동산이 생겨나 있었다.
“오오! 이것인가? 보고 내용보다 크군! 제어계는? 구동계는? 동력원은?”
혼자서 신난 사람이 있었으니 필림 장로였다.
무너진 건축물 더미를 살피는 그에게 누군가가 활기차게 인사했다.
“오우예! 필림 장로님 오셨떠요!”
찢어진 전투복과 반쯤 타 버린 금발에 이빨도 몇 개 빠져서 댕청미가 돋보이는 꼬마가 흐헤헤 웃으며 다가온다.
현장 주변을 관찰하던 엘프들의 고개가 휙휙 움직였다.
“캐롯이야?”
“오, 저 아이가?”
조사단에 참가한 엘프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엘프 사회에도 소문은 있고, 우상화의 경향도 있었다.
관찰이라는 명목으로 그들 공방에 억지로 꽂아놓은 동족이 꾸준히 보내주는 보고서는 세상 밖에 나가본 적이 없는 젊은 엘프들에게 묘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가감 없이 적어놓은 일기 형식의 보고서는 뭔가 재미있는 인간계 시트콤,
그래서 거기 등장인물 중의 하나인 실물 캐롯이 등장하자 다들 반가워했다.
필림 장로조차 마음에 들었던지 트리스타의 그 이상한 보고서를 굳이 교정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래, 이번엔 신품종 개량 킹 캐롯이라지?”
“데헷!”
혀를 빼물고 웃어 버린 캐롯이 두 손가락을 볼에 대고 귀여운 짓을 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