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소생술! 263 >
당황한 크랭크와 마냥 신난 캐롯이 회의실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왕가 시종단을 이끄는 시종장도 함께 앉아 있었다.
상석에 앉은 제이드 기사단장이 얼굴을 잔뜩 굳히며 손가락에 끼운 편지를 들었다.
“여왕 폐하의 친서가 우회로로 도착했습니다. 속히 전 병력을 이끌고 수도로 향하여 왕궁을 지키라고 적혀 있습니다. 쿠데타가 의심된다시는군요.”
“쿠데-!”
동석한 시장이 버럭 외쳤다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자리에 앉았다.
이젤리아에서 도시의 영주는 곧 기사단장, 시장은 도시의 운영만을 책임지고 있다.
다소곳이 앉은 시종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귀족원의 르메르트 공작께서 배후에 계실 겁니다. 여왕 폐하께서는 정치에 그다지 소질이 없으셨거든요.”
왕가의 편이면서도 흑막을 감싸는 것이 미묘하다.
어쨌든 부름을 받았으니 제이드 기사단장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분연히 일어섰다.
“우리 검은백합기사단은 왕가의 부름에 답할 것이다. 출발 준비를 서둘러라.”
“에엥? 우리는요? 이거 엄연히 반란군 진압 작전인데요?”
고개를 돌린 제이드 기사단장이 씩 웃는다.
“당연히 함께 가야지. 그대들은 지금 우리에게 고용된 모험가지 않느냐. 여신의 가호를 두르고 왕위 찬탈을 막는 것이다.”
“호우우! 그런 건 모르겠고, 왕자님네 고양이를 보러 가는 겁니다!”
캐롯의 저세상 텐션은 이 심각한 상황을 전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덕분에 다들 긴장을 풀고 피식피식거리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원 요청하러 왔어요.”
“지원 요청? 왕님들의 자리 싸움에 우리가?”
단독으로 성문을 통과해 초원을 달려 오크 부락에 찾아온 캐롯이 음흉하게 웃기 시작한다.
“자자, 생각, 생각을 해봐요. 장차 국왕이 될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거라고요? 콩고물 좀 떨어지지 않겠어요? 최소한 표면적으로 이 나라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유익함을 알릴 기회라고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유전자의 변화는 이들을 더 이상 몬스터로 부를 수 없을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피부색만 다를 뿐, 인간과 다름없는 외모와 성향.
찡긋 윙크한 캐롯이 손가락을 들었다.
“다 함께 노려봅시다. 신인류의 한 자리!”
가만히 듣고 있던 델린저가 그걸 그대로 족장에게 들려주었다.
족장은 의외로 감이 좋은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희 족장 돕는다. 그러면 빚 남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도움될 수 있다.”
오크 부족에게 문명의 신으로 등극한 자동 인형 아테나의 노력 덕분인지 말솜씨가 좀 늘어난 것 같다.
이히히 웃어 버린 캐롯은 그들과 함께 단순하지만 매우 유기적인 작전을 세워놓고 돌아갔다.
“맞다! 돌아오면 바로 이사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여기 기사단장님이 노리고 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준비하던 참이다! 잘 가거라! 언젠가 또 보자고!”
혼자서 들판에 선 캐롯이 손을 흔들었다.
“나는 물 건너 찾아온 자동 인형 캐롯! 잊지 말아줘! 대대손손 당근을 키워서 날 기억해 주는 거야! 와하하!”
그 외침을 들은 델린저 역시 허리를 꺾으며 웃어 버렸다.
캐롯이 혼자서 음흉한 계획을 짜는 사이, 크랭크와 정비 반장은 5미터짜리 대형 자동 갑옷의 조정 작업을 마쳤다.
“움직여 봐야 하는데 이 꼬마 녀석은 어딜 간 거야?”
“좀 있으면 올 겁니다.”
“자넨 방임주의인가?”
“애들은 풀어놓고 키우는 거죠. 흙도 좀 주워 먹고 집에서 키우는 번견에게 사회성도 배우고요.”
듣고 있던 작업자 하나가 웃다 말고 지적했다.
“아니, 잠깐만요. 그건 애가 아니잖아요?”
“캐롯은 제 인생 최고의 작품입니다. 그러니 제 자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수송차량에 실린 채 누워 있는 거대 자동 갑옷은 이제 왕실 전용으로 개수되어 번쩍이는 장식이 잔뜩 달려 있었다.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던 스틱스가 씩 웃는다.
여차여차 준비를 마치고 이튿날 바로 병력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캐롯은 왕자와 함께 마차에 타게 되었다.
여행길에 지루해 할 그를 위한 시종장의 배려였다.
화려한 마차 안, 장기판을 펼쳐 놓은 캐롯이 맞은편의 왕자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장군.”
“엣!?”
궁지에 몰린 왕자가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토마톤에게 차별점을 부여하는 방법은 방열 가발이나 페이스 마스크의 모양을 바꾸는 정도다.
소프트 스킨은 비싸서 잘 쓰지 않기도 하고, 그걸 씌워 버리면 겉모양만큼은 인간과 다를 바 없어져서 색다른 문제점이 나타난다.
바로 인형에 대한 인간의 격렬한 감정 이입.
전신 소프트 스킨에 행동거지까지 그 또래 같은 인형 소녀를 보고 잔뜩 긴장한 꼬마 왕자가 한참을 고심한 끝에 제안한 것은 장기였다.
이기면 원하는 것 들어주기, 사심이 듬뿍 담긴 왕자의 계략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상대가 좋지 못했다.
“엣헴! 이 몸은 리즈넷 장기 동호회 명예 회원! 사실 이것은 국가 대항전!”
마차는 굉장히 넓어서 내부에 방이 몇 개 있을 정도였다.
오고 가던 시종들이 그 외침을 듣고 혼란에 빠지는 사이 캐롯이 맞은편의 왕자를 바라보았다.
“자, 왕자님. 약속대로 에이그스타 가문에 대해서 알려주삼.”
곁에서 훈수질을 꾹 참고 있던 시종장이 대신 입을 열었다.
“대대로 유명한 자동 인형을 많이 만들어 낸 명가지요. 이 나라 기술력의 산증인입니다. 한때 용사의 인형도 주문 제작한 일이 있었지요.”
그저 봄바 생각이 나서 물어본 것인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캐롯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개를 내밀었다.
“호옥! 용사의 인형요? 그 이야기 좀 자세히!”
뭔가 꼬투리를 잡은 시종장이 복기를 마치고 침울해 하는 왕자에게 허락을 구하더니 장기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중년 시종장, 그녀의 눈이 번쩍인다.
“국가 대항전에 진 채로 보낼 수는 없지요. 저와 한 수 겨뤄주신다면야.”
“호오우!”
정확히 한 시간 후, 마차의 창문으로 몸을 날린 캐롯은 차량과 마차의 행렬 속을 통통 뛰어 크랭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쿵-!
“흐억! 야 이 녀석아! 놀랐잖아!”
뭔가가 휙 날아와 지붕에 떨어지자 운전하던 병사가 깜짝 놀랐으나 캐롯은 우헤헤 웃어주고는 창문에 거꾸로 매달려 크랭크를 찾았다.
“너는 말이다!”
퍽퍽!
뭔가 또 거슬리는 소리를 했는지 아리에테에게 얻어맞고 있던 크랭크가 투구를 돌렸다.
“왕자님 호위는?”
“잠깐 휴식 시간이야. 그보다 나의 전리품을 한번 봐주지 않겠어?”
캐롯이 내민 것은 박빙의 승부 끝에 안타깝게 져 버린 시종장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써준 소개장이었다.
“여기 일 끝나면 봄바를 만든 에이그스타 가문에 한 번 들러보자. 들었어? 거기서 무려 용사의 인형을 만들어서 리즈넷에 납품했었대.”
용사의 인형, 크랭크는 당장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한 시대를 풍미한 자동 인형 제작 가문이라니, 꼭 찾아보고 싶······!”
번쩍-!
아침 해라도 다시 뜬 것인가?
별안간 피어오른 새하얀 빛무리가 모두를 감싼다.
그것은 한가로운 여행길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일 중의 하나였다.
콰르르르릉! 쿠르르릉! 콰아아아아!
엄청난 빛과 함께 휩쓸어지는 폭풍, 전형적인 마력수정폭탄의 폭발 효과였다.
폭발은 행렬에 일대 소란을 안겨주었고, 마차가 쓰러지고 차량이 밀려 버리는 등의 난장판이 벌어졌다.
한참 후 겨우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외쳤다.
“적습! 적습이다! 전원 무장! 경계하라!”
“아아악! 내 다리!”
“마법사는 방어 마법을 펼쳐!”
우왕좌왕하는 사이, 또 폭발이 일어났다.
번쩍! 콰르르르릉!
이번에 터진 곳은 대로 옆, 사방으로 흙먼지와 파편이 흩날린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던 사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위에서 뭔가 떨어진다! 마법사! 방어진! 뭐든 좋으니 저걸 요격해!”
자동 갑옷들과 오토마톤의 활약에 묻히긴 했지만, 기사단에는 마법사도 엄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나서서 두 팔을 들고 하늘을 겨눴다.
“매직 미사일!”
“윈드 커터!”
“파이어 볼!”
훙훙휭휭-!
몇몇은 자동 석궁을 주워 들고 쏘기도 했다.
철컥!
투두두두두두두!
대공포화라도 선보이려는 듯 공중으로 마법과 화살이 마구 난사되고 그중 하나가 날아오는 폭탄을 때리는 데 성공했다.
꽈르릉!
쿠오오오!
3번째 폭발은 하늘에서 일어났다.
세찬 폭풍에 사람과 물자가 휩쓸리는 상황이 끝나자 더 이상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첫 번째가 행렬 중앙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효과는 치명적이었다.
여기저기서 비명, 고함 소리가 들린다.
“적습에 대비하라!”
“부상자부터 구출해!”
“오토마톤은 주변 경계! 습격에 대비하라!”
“이쪽을 좀 도와줘!”
이 난장판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아리에테는 위를 덮고 있는 것을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으윽! 이, 이게 무슨 일이냐?”
갑작스러운 폭발은 모든 것을 파헤쳐 놓았다.
눈앞에 펼쳐진 장엄한 지옥도에 아리에테는 저도 모르게 몸을 벌벌 떨었다.
개미굴이 폭발할 때 그 안에 있는 녀석들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그녀는 본능적으로 먼저 팔다리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 더듬기 시작했다.
그 의지를 읽은 시온이 대답한다.
“각 부분 이상 없습니다. 아리에테, 마스터 크랭크를 살펴봐 주십시오.”
방금 아리에테가 치운 것이 바로 크랭크의 몸이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파편 사이에 쓰러진 크랭크를 잡아당겼다.
“크랭크! 크랭크!”
몸이 들썩일 정도로 흔들어도 깨지 않자 당황한 아리에테가 그의 가슴에 귀를 가져갔다.
그리고 일어나 질겁해 버렸다.
“시, 심장이 뛰지 않아!”
“주변을 살펴 주십시오. 소생술을 시전할 신관을 찾아보겠습니다.”
주인의 임종을 앞두었건만 자동 인형의 목소리는 언제나 단조롭다.
게다가 주변 상황도 좋지 못하다.
폭격을 맞은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아리에테는 시온의 말에서 다른 희망을 찾았다.
소생술! 심폐소생술!
“심장 마사지! 어, 어떻게 했었지?”
분명 기사 학교에서 그런 것도 배웠다.
신관만 찾지 말고 네가 뭔가 해라. 바로 지금, 당시 교관의 목소리가 너무도 뚜렷하게 들린다.
쓰러진 크랭크 가슴을 더듬으며 기억을 되살리는 그녀의 눈에 전혀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주마등.
그간 모두와 함께해 온 나날들, 온통 즐거운 기억뿐이었다.
“으악! 아니야! 아직 아니야! 어째서 내게 보이는 거냐!”
크랭크의 주마등이 자기에게 흘러들어 온 것이라 생각한 아리에테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더니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중앙에서 조금 왼쪽 아래, 심장 바로 위에 깍지 낀 손을 대고 온몸으로 누른다! 30회 반복!”
아리에테가 크랭크의 가슴에 손을 대고 누르며 심폐소생술을 시작한다.
그녀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크랭크가 들썩였는데 그게 마치 시체처럼 보여서 아리에테는 자기 심장이 멎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뭐 하는 거야?”
파편과 먼지를 뒤집어쓴 캐롯이 나타났다.
아리에테는 연신 심장을 압박하며 외쳤다.
“크랭크의 심장이 멈췄다! 신관을 찾아와! 어서!”
심장이 멈춰?
눈을 커다랗게 뜬 캐롯이 아리에테의 손에 들썩이는 크랭크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갑자기 머리가 뜨거워진 캐롯이 다시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아리에테가 고개를 돌렸는데 금세라도 울 것 같은 초조함이 잔뜩 서려 있다.
“캐롯! 신관을 데려오라고! 빨리!”
눈을 커다랗게 뜬 캐롯은 이제 실실 웃기 시작하며 3번째 같은 질문을 했다.
“뭐, 뭐 하는 거야?”
고장이라도 난 거냐!?
캐롯을 보는 아리에테의 얼굴에 처음으로 분노가 서렸다.
하지만 지금 다른 행동은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손을 뗄 수 없이 바빴다.
무거운 발걸음을 뗀 캐롯이 크랭크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힘없는 손을 주워 들었다.
손목에 맥박이 거의 없다.
있는 거라곤 아리에테가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진동뿐.
엄청나게 실망한 캐롯의 얼굴, 그 고개가 크랭크에게 돌아갔다.
“크랭크, 죽은 거야?”
“아직 안 죽었다! 어서 신관이나 데려와!”
연신 들썩일 뿐인 그의 몸뚱이를 바라보는 캐롯의 귀에는 지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캐롯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한다.
크랭크의 주마등이.
별안간 캐롯이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와! 이게 뭐야? 옛날 일이 막 보이잖아? 처음 만났을 때랑 모험 다닐 때! 아하하!”
그걸 본 아리에테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치기라도 한 건가?
“습격이다! 적습! 적습!”
별안간 들리는 고함 소리, 실성한 것처럼 보이던 캐롯의 고개가 기계처럼 빠르게 움직이더니 무리에 어울리지 않는 짓거리를 하는 이질적인 존재, 주인님의 원수를 찾아냈다.
그러곤 마치 고양이처럼 엉덩이를 쑥 들어 올리더니 이내 땅을 박차고 사라져 버렸다.
팡-!
“캐롯!”
복수심에 사로잡힌 자동 인형을 쳐다보던 아리에테는 제길! 하는 소리를 내더니 크랭크의 가슴을 내리누르다 말고 그의 투구를 덥석 붙잡았다.
“저주든 뭐든 올 테면 와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