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섭외! 243 >
사람이 다닐 것 같지 않은 산 정상의 분지에 느닷없이 나타난 옥수수밭을 둘러보던 크랭크의 투구가 끄덕여졌다.
“여기가 오크가 가꾼 곳이라면 말이 좀 통할 것 같다.”
“어째서?”
캐롯의 물음에 크랭크는 옥수수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오크는 기본적으로 약탈의 민족이야. 빼앗으면 그만이니까 뭘 가꾸고 하는 재주는 없어. 하지만 드물게 이런 짓을 하는 것들이 있다. 일전에 봤다는 오크는 꼭 인간 같더라고 했었지?”
“응. 신기할 정도였어.”
그때 날카로운 비명성이 울리더니 초록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 뛰어가고 있다.
캐롯과 아리에테가 뒤쫓으려 하는데 크랭크가 말렸다.
“놔둬라, 좀 있으면 친구들을 잔뜩 불러올 거다. 그나저나 놀랍군. 사탕수수도 있다. 씨앗은 어디서 구한 거지?”
나이프를 꺼낸 크랭크는 사탕수수를 잘라서 다듬었다.
“와, 멋대로 남의 물건을 뽑아도 돼?”
“오크의 물건은 원래 남의 물건이니 상관없어.”
간편하게 대답한 크랭크는 수숫대를 벗기더니 투구 사이로 밀어 넣어 질겅질겅 씹어댔다.
그때쯤 다른 오크들이 몰려나와 무기를 겨눴다.
아리에테는 그들의 용모에 놀라 버렸다.
“정말 사람 같잖아?”
“거봐, 내가 뭐랬어.”
길쭉한 팔다리, 수북한 머리털, 얼굴에 이르러서는 말끔한 것이 완전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피부색과 어금니가 눈에 띌 뿐.
두 사람의 놀라움과는 별개로 혼자서 사탕수수를 씹어대던 크랭크는 투구를 슬쩍 들고 입안의 것을 뱉어내더니 고개를 들었다. 눈구멍으로 드러난 그 눈은 불쾌함을 담고 있었다.
“놀랍군. 이 정도면 다른 종이라고 불러야겠는데.”
으적으적!
다시 사탕수수를 집어 든 크랭크는 그걸 또 씹어댔다. 오크들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캐롯이 중재에 나섰다.
“아와와! 아니! 싸우러 온 게 아니거든? 너희들 나 몰라? 전에 내가 구해줬잖아!”
캐롯이 두 팔을 흔들면서 소리치자 오크들 몇이 캐롯을 가리키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캐롯은 재빠르게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나야 나! 너희들에게 제안이 있어서 왔어! 제안! 말 좀 들어봐!”
으적으적!
옆에서 한가롭게 사탕수수를 씹으며 무심하게 구경하는 주인님이 꼴사나웠는지 눈썹을 곧추세운 캐롯이 말하다 말고 크랭크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철썩 때려 버렸다.
“야! 넌 도발 좀 하지 말고 가만 좀 있으라고!”
“가만히 있는 건데. 저기 저 친구는 고기가 많아 보이는군. 그런데 사람처럼 생겨서 동족 포식하는 기분도 느낄 수 있겠군.”
“크으으래에엥크으읏!”
철썩철썩!
그의 어이 상실한 중얼거림에 사람으로서 분노한 아리에테도 나서서 크랭크의 등짝을 후려쳤다.
고개를 돌린 캐롯이 방글방글 웃으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저기, 농작물을 함부로 다뤄서 미안하게 됐어. 이 돼지가 배가 고파서 말이야.”
퍽퍽!
캐롯이 주인님의 커다란 엉덩이를 몇 번 더 때려줬다.
크랭크는 소가 여물을 씹듯이 사탕수수를 씹어댈 뿐이었지만 투구 안의 시선은 누구보다 빠르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멀리 떨어진 움막에서 더벅머리 금발을 가진 인간 남자가 불려 나오더니 거창하게 하품을 하며 걸어왔다.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생각에 눈에서 불꽃이 튄 크랭크가 손에 들고 있던 사탕수수를 버리고 도끼를 뽑아 쥐었다.
“더러운 오크 놈들, 지금부터 네놈들을 다 구워 먹겠다.”
아리에테의 얼굴도 사나워졌다.
하지만 사내는 의외로 밝아 보였다.
“여어, 친구들!”
“어어? 아저씨는 뭔데 여기 있어요? 아저씨도 오크예요?”
협상을 위해 나섰던 캐롯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들었다.
낄낄 웃은 더벅머리 사내가 찌뿌드드하다는 듯이 기지개를 켜더니 말했다.
“아니, 나는 여기 종마야.”
처음엔 다들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지만 아리에테가 가장 먼저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챘다.
“조! 조조종마! 설마 그럼 이 오크들의?!”
덥수룩한 머리와 턱수염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익살스럽게 웃고 있는 저 표정만큼은 즐거워 보였다.
“그렇지. 저기 쪼꼬미들은 몇은 내 자식들이지.”
“커억!”
기겁한 아리에테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걸 보고 낄낄 웃어 버린 남자는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은 델린저, 뒷골목 고아로 자라 건달 비슷하게 지내다가 도박에서 빚을 지고 몬스터 사냥을 따라나섰는데 거기서 죽을 뻔했던 걸 오크들이 구해주어 눌러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크랭크의 손에 쥐어진 도끼에 힘이 점점 빠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철면피 크랭크도 어색하게 되물을 정도로 민감한 질문이 나왔다.
“당신은 정말 괜찮은 거요? 오크인데?”
“우효! 쌉가능이지!”
허리를 마구 흔들며 대답하는 이 지역의 진정한 미치광이를 만난 크랭크와 캐롯은 동시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멀찍이 떨어진 아리에테는 칼자루를 쥔 채 살기를 뿜어내고 있고,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델린저는 오히려 크게 웃어댔다.
“그런데 자네들 뭔가? 길이라도 잃었는가? 우리 부족 애들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사람 덮치지 말라고 일러뒀는데.”
캐롯이 사정을 설명했다.
“아니, 요즘 개미 떼가 극성이라서요. 같이 퇴치 좀 하자고 찾아왔어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캐롯을 내려다보던 델린저가 머리를 좀 벅벅 긁더니 손짓했다.
“이쪽으로 와봐라. 우리 족장님 소개시켜 줄게.”
뭔가 이야기가 통할 것 같은 상황에 캐롯이 룰루랄라 쫄래쫄래 따라갔고, 아리에테와 크랭크도 주변을 살피면서 걷기 시작했다.
마침 소란에 밖에 나와 있던 오크 족장이 움막 앞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놀랍게도 오크 족장 역시 인간적인 특성을 가졌는데 그 모습이,
“키나 체형도 그렇고 분위기가 마족 푸시케 경비대장 같지 않아?”
“그렇군. 여자치고는 멋진 근육이다. 오크가 아닌 것 같아.”
키가 크고 울퉁불퉁한 팔과 다리를 가진 젊은 여자 오크는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캐롯이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팔짱을 하고 고압적인 시선을 내리깐 오크 족장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오오우! 이봐요 족장님! 우리 같이 개미 때려잡지 않을래요?”
허리를 숙인 족장의 귓가에 델린저가 무어라 쑥덕이자 족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역시 뭐라 쑥덕인다.
그리고 델린저가 말했다.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게 뭐냐? 라고 하신다.”
“헤? 족장은 사람 말 못해?”
“조금 할 줄 아는데 거의 못한다고 봐야지.”
고개를 돌린 캐롯이 족장을 올려다보았다.
“뭘 원해요?”
오크 추장은 무어라 말하더니 마지막엔 크랭크를 가리키며 말을 마쳤고, 갑자기 표정이 바뀐 델린저가 목소리를 높였다가 우악스러운 손길에 그 풍성한 머리채를 붙들리고는 불쌍한 표정으로 통역했다.
“우리 땅, 그리고 기술, 그리고 저 남자의 씨앗. 이랍신다.”
“잉? 씨앗? 뭘 말하는 거지?”
델린저가 악을 썼다.
“뭐긴 뭐야! 종마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거지!”
“뭐가 어째!”
당사자인 크랭크도 가만히 있는데 어쩐 일인지 분노한 아리에테가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키가 큰 오크 촌장을 쏘아보았다.
“못하는 소리가 없군! 그럴 수는 없다!”
남자의 여자라고 생각했던지 피식 웃음 지은 오크 촌장이 아리에테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통역 델린저가 흐흐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당신이 자식을 낳아줘도 된다는군.”
뿌직!
아리에테의 이성이 끈이 끊어졌다.
스르릉!
기어코 검을 뽑은 아리에테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전에 너희들을 모두 죽이겠다. 이 괴물들아!”
“우와! 참아!”
진심으로 화가 난 아리에테를 말리려고 캐롯이 온몸으로 막아섰는데 의외로 크랭크의 주먹 한 방에 해결되었다.
꿍-!
“쿠우윽!”
정수리를 붙잡고 무릎을 꿇은 그녀의 뒤로 크랭크가 커다란 주먹을 들고 서 있다.
“진정해라.”
“네, 네가 그런 말을 할 처지냐! 오크의 종마가 되고 싶은 거냐!”
“시온, 마스크.”
촹! 철컥!
“으아아! 이걸 풀어!”
얼굴을 가린 마스크를 붙잡고 버둥거리는 아리에테의 곁으로 크랭크가 나섰다.
그러다 발치에 치이는 것이 있어 고개를 숙였다가 그것을 주워 들었다.
어떻게 흘러들어 왔는지 모를 금속제 냄비였는데, 바닥에 구멍이 뚫려서 다른 용도로 쓰는 것 같았다.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크랭크는 즉석에서 망치와 도구를 꺼내고 바닥에 자리를 펴더니 냄비의 구멍을 때우는 기행을 펼치기 시작했다.
팅팅탱탱캉캉!
협상하러 와서는 갑자기 구멍 난 냄비를 때우기 시작하는 주인님을 보고 팔짱을 낀 캐롯은 푸부부붓~! 하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털어댔다.
캐롯 나름의 어이없음을 알리는 신호가 되겠다.
“음, 다 됐다.”
냄비를 들어 푸르른 하늘에 비춰 보니 구멍은 이제 말끔하게 메워졌다.
그걸 주변에 서성이는 오크 여자에게 내밀자 우물쭈물 받아 든 냄비를 이리저리 살피며 놀라워한다.
바닥에 앉은 크랭크가 그 상태로 투구를 들고 오크 족장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은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그리고 이 땅은 넓다. 당신들이 안주할 곳쯤이야 어디에든 있어. 그보다 기술을 원한다니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드는군. 물론 수배해 줄 수 있······.”
크랭크가 말하는 중에 우르르 움직인 오크 여자들이 저마다 움막과 동굴에서 냄비며 그릇을 가져와 내밀었다.
다들 망가지고 구멍 난 것들이었다.
성격상 그런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한 크랭크는 이제 협상은 뒷전, 자리에 앉아서 냄비를 때우기 시작한다.
캐롯은 이제 어깨 힘이 쭉 빠져 버린 채 중얼거렸다.
“어디 무슨 출장 냄비 수리 온 거야?”
이제 그의 주변으로는 불을 쓰기 위한 모닥불은 물론 큼직한 돌덩이가 작업대로 놓이고 유능한 오크 조수도 하나 붙어서 업무의 편의를 도모했다.
하는 짓이 참 마음에 들었는지 콧구멍을 벌렁거린 어여쁜 오크 족장이 굵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짧게 배운 말로 외쳤다.
“남자! 기술자! 원한다!”
“안돼안돼-!”
“맞아! 내가 더 힘낼게! 버리지 말아줘!”
마스크를 덮어쓴 아리에테와 델린저의 비명, 그리고 냄비를 때우는 망치질 소리가 곁들여진 대환장 파티에 캐롯은 배에 손을 올리고 뿌하하 웃어 버렸다.
순식간에 오크 부락의 냄비를 전부 때운 크랭크는 몸을 일으키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제는 마을에 들른 박물 장수 취급인지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촌락의 오크들이 전부 그의 기행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만, 크랭크의 투구 안의 눈동자는 빠르게 움직이며 대략적인 숫자를 파악했다.
그때 아까부터 우거지상이 된 델린저가 오크 추장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이봐, 친구들. 우리 추장이 당신들 제안에 관심 있다고 해.”
“와! 정말? 잘됐다! 크랭크! 어? 크랭크?”
추장이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데도 불구, 크랭크의 기행은 멈출 줄 몰랐다.
이제 사탕수수밭에서 수숫대를 잔뜩 꺾어 온 그는 방금 때워 놓은 커다란 냄비에 쑤셔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협상하러 와서는 대체 뭐야? 설탕이라도 만들게?”
“사탕수수는 설탕으로 가공해 놓는 편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거든.”
“아니, 주인님아.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거든요?”
불가에 쭈그려 앉아 있던 크랭크가 투구를 돌리고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어찌 됐든 나는 관심을 한곳에 모았다. 봐라.”
캐롯이 주변을 살피니 다들 흥미가 돋는지 구경하기 바쁘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 경계심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에에? 이게 무슨 일이래? 냄비 때우고 설탕 만들어 호감도 급상승? 겨우 이런 걸로?”
“지금 이 친구들에게 나는 마법사로 보이겠지. 기술이란 그런 것이야.”
“호오호오. 그런감? 좋아. 그럼 좀 더 쌓아봐. 인간과 오크 사이의 증오의 골짜기가 메워질 정도로.”
“거기까지는 좀 어렵겠군. 오크마저 등을 돌리면 우리는 누구를 미워하며 살아가야 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