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옛날에는! 195 >
“엄머머-! 이거 맛있다!”
식탁이 없어서 작업대 하나를 치우고 차려진 식탁에서 마녀 고르곤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크랭크가 지하 정원에서 재료를 구하고, 그걸 캐롯이 손질해서 만든 요리는 홀로 생활하는 마녀에게 퍽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식사 풍경이었다.
덕분에 마녀의 탑과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본 크랭크가 맞은편에 앉아서 물었다.
“부엌은커녕 요리를 한 흔적도 없던데, 평소엔 뭘 먹는 겁니까.”
“음? 저 애들이 가져다주는 걸로 대충 해결하지.”
샐러드를 먹던 고르곤이 손에 든 포크로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거인들을 가리켰다.
크랭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몸으로 요리는 힘들겠지. 정원에 과실수가 많은 이유는 그 때문인가.
커다란 인형 기사가 바구니를 손가락에 걸고 나무의 과일을 따는 모습을 상상해보는데 캐롯이 냄비를 가져와 탁자에 올렸다.
뚜껑을 열자 고르곤의 눈이 반짝인다.
“후와아···!”
새콤하고 그윽한 향기가 나는 토마토 스튜 그릇을 받아든 고르곤이 숟가락으로 그걸 한입 떠먹더니 갑자기 울상을 지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기겁한 크랭크가 여차하면 도망칠 생각을 하는데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문지르던 그녀가 캐롯을 보면서 실실 웃는다.
“마치 엄마가 해주던 맛이네.”
“나는 네 엄마가 아니다. 못생긴 마녀야.”
고르곤은 곧 환하게 웃었다.
“응! 엄마!”
국자를 들고 빤히 고르곤을 쳐다보던 캐롯은 이제 크랭크에게도 그릇을 내밀었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화기애애한 식사 중간, 캐롯이 유리컵에 물을 따라 내밀며 말했다.
“조건을 듣고 싶다. 어떻게 하면 풀어 줄 것인지.”
“음···.”
그냥 뒀으면 난동을 피웠을 그들이 한가롭게 식사에 동석한 이유는 고르곤이 협상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인간과 인형이 마녀를 바라본다.
숟가락을 입에 물고 시선을 위로 향한 마녀는 다시 그들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먼저 여기 탑 청소 좀 부탁할까? 대청소, 알다시피 쓰레기가 너무 쌓였거든?”
듣고 있던 크랭크가 연구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소 몇 십 년은 방치된 것 같은 끔찍한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다.
“저건 몬스터 시체 같은데 맞습니까?”
“후릅후릅···! 캬! 좋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빵이니, 움냠냠.”
출발 직전 에밀리아에게 사놓은 보리빵도 식탁에 올라와 있었다. 그걸 죽죽 뜯어서 남은 스튜에 찍어 먹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해부 실험한다고 잡은 녀석들이었지. 한동안 썩는 냄새가 진동하더니 곧 멈추더라. 음, 몇 년 전이었지?”
“···됐습니다. 기억하지 마십시오.”
환하게 웃은 고르곤이 고개를 돌리더니 오토마톤 요리사를 쳐다보았다.
“요녀석! 요리를 엄청 잘하잖아? 너 내꺼 하지 않을래?”
“싫다. 마녀야.”
캐롯이 고개를 팩 돌리면서 즉답한다.
눈을 가늘게 뜬 고르곤이 날카롭게 웃으며 손에 쥔 포크로 이번엔 크랭크를 가리켰다.
“네가 남으면 네 주인님과 다른 친구들도 다 풀어줄 게 어때?”
곤란하지만 솔깃한 제안, 마녀와 얼굴을 마주한 캐롯이 잠깐 입을 다물었고, 크랭크가 끼어들었다.
“장난이 지나치군요. 당신의 목적은 내 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아하하!”
하지만 캐롯의 생각은 달랐다.
“검토해볼 수 있는 제안이다. 나 하나와 다른 사람들의 교환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요리를 위해 긴 금발을 땋고 머릿수건을 만들어 쓴 캐롯이 크랭크를 보면서 말을 마쳤다.
크랭크는 고르곤을 가리키며 말했다.
“캐롯, 제대로 된 협상은 서로가 동등한 상태일 때 가능한 것이다. 봐라. 이 사람이 순순히 그걸 이뤄 줄 것 같으냐? 너희들은 상대의 말을 한 번쯤 의심해 볼 줄 알아야 해.”
협상은 서로가 동등한 상태일 때 가능. 상대는 무력의 우위는 물론, 현재 인질까지 잡은 상태.
국자를 든 캐롯이 분노했다.
“나를 속이려고 한 것이구나. 이 마녀, 단언하겠다. 나는 앞으로 마녀의 제안은 의심부터 하리라.”
“아하하하하!”
놀림당한 오토마톤의 다짐에 스푼과 포크를 양손에 든 고르곤이 폭소를 터트렸다.
살아온 나날이 긴 덕분에 그녀는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왔다. 그중에는 발언과 행동 하나하나가 가슴에 박히는 고슴도치가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거북이도 있었다.
하지만 거북이도 선을 넘으면 물지.
그래도 이 녀석들 참 재미있다!
겉과 속에 다름이 없어 행동과 발언 하나하나를 계산하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최소한 지금, 크랭크와 캐롯은 후자에 속했다.
갑자기 인상을 찌푸린 크랭크가 물었다.
“내 동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사합니까?”
“걱정 마, 지금쯤 지하 감옥에서 우리 애들에게 한참 정기를 빨리고 있을 테니까.”
미간을 찡그린 크랭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차 싶었던 고르곤이 손을 흔들며 빠르게 떠들어댔다.
“와아! 걱정 마! 몸이나 정신에 문제 생기는 건 아니거든? 이건 진짜 장담해. 내 이름 걸고 맹세할게! 그리고 어차피 한창인 나이라서 너희들 쌓여 있잖아? 서로 좋으면 된 거잖아!”
얼굴에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운 크랭크가 굵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당신은 대체 뭡니까? 그 서큐버스랑 한패입니까?”
“아잉, 여자의 과거를 묻다니 저질이네.”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 말을 돌리는 그녀를 보고 크랭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도 어느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어쨌든 칼자루는 저쪽이 쥐고 있다. 일단 상황을 살피자.
그래서 그도 말을 돌렸다.
“식사도 마쳤으니 당신의 요구대로 대청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 정말? 풀어줄거라는 말이 진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역으로 치고 들어온 질문에 도전적인 시선을 한 크랭크가 팔짱을 끼었다. 하지만 의외로 대답은 캐롯에게서 나왔다.
“상황에 따른 행동의 3가지 분류에서 가장 최악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오오! 왜에? 왜?”
호기심이 돋아 고개를 쑥 내민 고르곤이 캐롯을 들여다보는데 몸을 돌리고 잡동사니를 뒤적이기 시작하는 크랭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명한 사람의 말이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미래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라더군요.”
이어서 말을 마친 크랭크는 이제 엉망인 연구실을 살펴보고 있었다.
캐롯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르곤을 보면서 말했다.
“봤느냐, 저분이 나의 주인님이시다.”
눈을 크게 뜬 고르곤이 얼굴을 찡그리며 킥킥 웃더니 그릇을 정리하는 캐롯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기 시작한다.
“궁합이 잘 맞는 주인님과 오토마톤이네.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어?”
“학교에서 배웠다.”
“와, 요즘 오토마톤은 학교에도 다니니?”
그러면 근처에서 잡동사니를 헤집고 있던 크랭크가 대답한다.
이런 대화를 통해 요즘 세상사를 얻어듣게 된 고르곤은 무척 즐거워했다.
“어머어머, 요즘은 지위가 낮은 일반 평민 사람들도 그런 교육기관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는구나. 그런데 3개월이면 조금 짧다.”
“아무래도 전문 지식의 교육이 아니니까요. 꼭 필요한 기초 생활상식과 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 정도만 가르칩니다.”
의자에 앉아 팔짱을 하고 다리를 꼬고 있던 고르곤이 히히 웃는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
말라붙은 몬스터의 시체를 치우던 크랭크가 문득 궁금해서 뒤를 돌아본다.
“당신은 대체 언제 적 사람입니까? 몇 살입니까?”
“아잉, 여자에게 나이를 묻다니 저질이네.”
고르곤이 몸을 요염하게 비틀며 곁눈질하자 크랭크가 잔뜩 굳은 얼굴을 휙 돌려버렸다. 그게 재미있는지 마녀는 깔깔 웃기 바쁘다.
캐롯이 연구실의 개수대에서 그릇을 설거지하려는데 크랭크가 손짓했다.
“그건 조금 있다가 해라. 지금부터 먼지가 끔찍하게 날릴 거다. 이걸 먼저 옮기자.”
나무 상자를 발판 삼아 개수대 앞에 서 있던 캐롯이 주인님의 부름에 얼른 몸을 돌린다. 그리고 둘은 힘을 합해 4층 연구실의 잡동사니를 치우고 설비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쿵-!
말라비틀어진 몬스터 시체가 탑 밖으로 떨어져 박살난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인간 기중기 크랭크가 고개를 돌린다.
“괜찮겠습니까?”
“응, 폐기물은 모아서 같이 치우면 되니까. 언제나 효율이 먼저고 모양은 그 다음이란다?”
지금까지 고르곤에게 들은 말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대답이라고 크랭크는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서 부족한 카드 패를 맞춰보는 것보다 일단 몸을 움직이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 그들은 쉼 없이 움직였다.
그래서 한동안 탑에서는 온갖 잡동사니가 다 떨어져 내렸다.
수 시간 후, 신축 당시의 말끔한 4층 연구실을 다시 맞이한 고르곤이 입을 헤 벌렸다.
바닥에는 빗자루질과 물청소까지 마친 크랭크가 대자로 누워서 씩씩거리고 있다.
“어머나, 대단한 걸? 이대로 다른 층도 부탁하고 싶은데.”
“후욱, 훅···! 오늘은 여기까지, 저와 캐롯 만으로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고르곤이 웃으면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그러면 나도 좀 거들까?”
“마녀의 도움은 필요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내려진 퀘스트, 의뢰인이 해야 할 일은 약속된 보상을 준비하는 것.”
머릿수건을 하고 달그락거리며 설거지 중이던 캐롯의 말이었는데 상황이 상황이라서 그 발언에 담긴 무게감이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마녀는 그저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건드리다가 여전히 탁자에 올라가 있는 두 쪽 난 오토마톤 지스터를 돌아보았다.
가끔 있다. 천성은 게으르지만, 주변에 신경 쓸 사람이 있으면 똑 부러지게 행동하는 부류,
혼자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
마녀 고르곤은 그런 축에 속했다.
“그러면 저걸 고쳐서 너희들 손이라도 좀 보태야겠네.”
“그래 주시는 겁니까? 하지만 지스터는 지금 마스터가 없어서 목적 완수를 위해 부여된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려 할 겁니다만.”
그리고 나는 말리지 않을 겁니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크랭크의 눈빛과 발언에는 뼈가 있었다. 하지만 고르곤은 음후후 웃으면서 손가락을 V로 만들 뿐,
“그것도 다 꼼수가 있지. 맡겨 보렴!”
그날 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단 하룻밤에 고르곤은 지스터를 복원시켰다.
크랭크 역시 조수를 자청해서 그녀의 옆을 지켰다. 여러 가지 이유로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았지만, 조금이라도 봐두면 앞으로 캐롯의 수리에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선택은 장차 인생의 자양분이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가 가진 설비는 대단히 진보적인 것들이 많아서 작업의 진행 속도가 무척 빨랐다.
새로 만들어진 부품을 손에 쥔 크랭크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거침 숨결을 불어낸다.
“놀랍군요! 이런 것이 가능하다니.”
“소재만 있으면 뭐든 깎아낼 수 있지. 이제 끊어진 신경선을 연결하자.”
아껴둔 체력 포션을 꺼내 들이킨 크랭크가 의욕을 불태우며 밤을 새워 그녀의 작업을 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