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계약! 171 >
“흐흣, 그, 그렇지. 그런데 거슬리는 소리를 드, 들었네. 붉은 눈의 악마라니. 우, 우리 꼬마 인형이?”
다시 자리에 앉은 포비는 아예 주전자를 받아 잔에 부어 마시면서 말했다.
“그 녀석한테 걸려서 우리 애들이 많이 맞았거든요. 경비대에 신고도 못 하고 끙끙 앓기만 했지.”
“이, 이유 없이 그럴 애가 아니야. 너, 너희들이 뭔가 했을 거야.”
투나의 말에 잔으로 얼굴을 가린 포비가 배시시 웃었다.
“애들 삥 뜯다가 걸렸나 보드라고요.”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입 밖에 낼 정도로 투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너, 널 부른 건 샤를의 부, 부탁 때문이야. 돕고 싶다던데.”
“샤를······!”
빈 주전자를 돌려받은 샤를이 말했다.
“빛도 바람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은 당신들의 미래를 위해서 좋지 않습니다.”
포비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투나가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생각은 고마운데, 결국 돈이에요. 당신 돈 많아요?”
팔짱을 한 투나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조, 조금 있어. 으히히! 하, 하지만 나는 성인군자가 아냐. 비, 비생산적인 일은 관심 없어. 말해봐. 너, 너희는 뭘로 나에게 이득을 안겨 줄 수 이, 있지?”
“남친 이야기는 어때요?”
“흐흐흐! 소, 솔직히 구미가 당기지만 그런 걸로는 안 돼.”
그렇지 않아도 요즘 고민에 빠져 있던 참이었다. 비축한 식량이 떨어질 때쯤 뭐라도 해야 했다.
“솔직히 할 만한 것이 없어요. 애초에 길거리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인데다 일을 하려고 해도 애들은 아직 어리지, 노인들은 너무 늙었고.”
“다, 다른 애들은? 젊은 사람은 너, 너뿐이야? 너, 몇 살이지?”
밀크티를 다 마시고 쿠키를 주워 먹고 있던 포비가 말했다.
“우물우물, 18살이요. 다른 애들은 다 제 살길 찾아 나갔어요. 쫓아내기도 했고.”
“너는 왜, 왜 안 나갔는데?”
“개척민 마을에서부터 봐온 사람들을 그냥 버릴 수 없겠더라고요. 부모 잃은 동네 꼬마를 이마만큼 키워주기도 했고.”
쿠키를 입에 넣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샤를이 말했다.
“식사를 준비해야겠군요.”
“응. 쿠키로는 안 되겠네.”
“오, 정말?”
잠시 후 포비는 저녁에 먹다가 남긴 비프스튜 냄비에 빵 바구니를 받고 대단히 좋아했다. 조촐했지만 양만큼은 많아서 사양 없이 식탐을 부릴 수 있었다.
우걱우걱 먹고 있는 미청년을 보고 있는데 샤를이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들의 마을에는 밖으로 나가는 비밀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걸로 뭔가 할 수 없습니까?”
“그걸 들었어? 쯧, 수다쟁이 영감님들 혼내야겠네. 현재로선 유일한 벌이 수단이야. 껄끄러운 일을 저지르고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알선하지.”
투나가 관심을 가졌다.
“호오, 비, 비밀 문? 검문 없이 통과돼?”
“도시 건축 당시 있었던 작업자 통로 같은 건데 설계도에도 나와 있지 않아요. 인부였던 영감님 하나가 알고 있어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 거죠. 아니면 정말 겨울에 얼어 죽었어.”
투나가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겨, 겨울에 따뜻해?”
“냠냠,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요.”
“호오오옥! 지하! 온도 유지! 천연 온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투나가 볼에 손을 대고 소리를 지르자 포비가 깜짝 놀랐다.
“뭐야? 왜 이래?”
“뭔가 놀라운 상황을 맞이했을 때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신경 쓸 것 없습니다.”
헤 하고 샤를를 올려다보던 포비가 말했다.
“샤를, 좀 변한 것 같아. 처음 봤을 땐 좀 무뚝뚝하지 않았어?”
“그랬습니까?”
정신을 차린 투나가 끼어들었다.
“너, 너희 동네 구경하러 가 보고 싶어!”
“지금요? 그럼 이거 좀 싸가도 돼요?”
가만히 보고 있던 샤를이 몸을 돌렸다.
“마저 다 드십시오. 마을 사람들에게 먹일 식량 정도는 나눠드리겠습니다.”
“어, 정말?”
“물론입니다. 이곳의 운영은 제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주인님은 사랑을 돈으로 표현하는 분? 분? 분?”
덜커덕-!
기억회로의 충돌을 일으킨 샤를이 멈췄다. 아뿔싸 싶은 투나가 포비를 보면서 말했다.
“시, 시간이 좀 걸리겠어. 처, 천천히 먹어.”
이윽고 샤를의 수리가 끝났을 때는 거의 새벽이었다.
“과, 과거의 기억을 유지한 채 현재의 사, 사실을 왜곡시키니까 충돌이 일어나는구나. 어, 어렵네.”
“아으, 허리야.”
옆에서 거들던 포비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작업대에 누워있는 샤를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보니 정말 인형, 오토마톤이네요. 나랑 방금까지 이야기하고 밥도 차려줬는데.”
“흐흐흐, 나, 나도 그랬지. 다 마찬가지야. 해, 해체해 놓으면 별거 없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시간, 나른한 기분으로 의자에 앉아 고요한 창밖의 새벽녘을 내다보던 포비는 갑자기 세상만사 덧없어짐을 느껴버렸다.
“으음, 졸리네요.”
“자, 잠은 집에서 자야지. 가, 가자. 샤를. 일어나.”
눈을 뜬 샤를이 작업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요즘 자주 여기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흐흐흐, 기, 기분 탓이야. 네 주인님은 누구지?”
“돈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친절한 거인, 크랭크입니다.”
투나는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 지금은 이걸로 만족하자. 이제 포비 동네 구경을 가야지.”
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정작 포비는 의자에 기대 곯아떨어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늦은 시간이다.
“곧 해가 뜨겠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깰 때까지 기다려야지. 이 몸은 바쁘거든.”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긴 투나는 레나의 파워뱅크 제작 작업에 다시 몰두했다.
* * *
늦은 아침, 잠에서 깨어난 포비는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으, 깨, 깼어? 으흐흐.”
작업대에서 고개를 돌리는 투나의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퀭한 눈 밑에는 시커먼 그림자가 잔뜩 끼어 있다.
“당신은 안 잤어요?”
“하, 할 일이 많거든. 그보다 너희 동네 구, 구경 가자. 갔다 와서 잘 거야.”
공방의 문단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선 그들은 가장 가까운 하수도를 통해서 하수구 촌으로 이동했다.
“얼굴이 팔려서, 얼마간 조용히 지내야 하거든요.”
지저분한 하수구로 끌고 들어와 미안한 마음에 한 소리였지만 투나는 도시 지하에 있는 거대한 배수관로 시설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괴, 굉장해! 사람이 다녀도 될 정도로 크고 넓잖아? 그, 그다지 더럽지도 않고!”
“강에서 물을 끌어와서 흘리는 거라서요. 이 주변은 다소 깨끗한 편이에요.”
“오오!”
하지만 3번가 지하로까지는 한참 걸어야 했기 때문에 투나는 체력의 고갈로 샤를의 등에 업혀서 가야 했다.
“우와-!”
하수구 촌에 도착한 투나는 내부의 웅장함에 환호를 질렀다.
커다란 돌문을 닫던 늙은이들은 낄낄 웃고, 포비는 주의를 줬다.
“조용히! 여기서는 목소리가 울려서 퍼져요!”
“포비 형!”
빡빡이 소년이 달려오더니 와락 매달렸다. 포비는 빙그레 웃으며 까슬까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번의 그 소매치기 소년임을 알아챘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투나는 주변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졸려서 흐리멍덩해진 눈이 갑자기 밝아졌다.
“생각보다 굉장히 넓어. 온도도 적당하고.”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기엔 좋지 않은 환경입니다.”
샤를이 끼어들었지만 투나는 히죽 웃을 뿐이었다. 죄수들의 방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방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 늙은이 아니면 아이들이었다.
흐흐흐 웃으면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투나는 포비를 불러서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어서, 포비는 마을의 어르신들을 불러 모아놓고 설득했다.
한자리에 모여 앉은 늙은이들이 놀라워했다.
“마, 마법사님이라구요?”
“역시 마녀였구먼! 근디 좀 모자라 뵈는데.”
“이 사람아! 마녀님을 앞에 두고 모자라다니!”
샤를의 뒤에 몸을 숨긴 투나가 중얼거렸다.
“그, 그런 건 상관없어요. 하,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찬성표도 많았다. 일단 포비는 찬성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몸이라도 팔아야 해.”
“안 돼! 그거 안 돼! 차라리 내게 팔아! 내가 돈 벌어오면 되잖아! 몇 년만 지나면 나도 어른이야!”
나쁘지 않은 기분인 듯 피식 웃으며 리노의 까까머리를 슥슥 문질러주던 포비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경비대에 제 발로 찾아가던가. 잠깐 신전에 머무르다가 개척민 마을로 던져지겠지. 애들은 상관없지만, 별 도움이 안 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밖에서 지내기 힘들어.”
늙은이들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정좌하고 앉아있던 샤를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젊었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의 패기와 무모함은 어디로 갔습니까?”
“힘겨운 세상 살아내느라 다 써버렸는디.”
“가진 것이 없군요. 그때 쓰지 못한 두려움만 남았군요.”
늙은이들의 얼굴이 더욱 시무룩해졌다. 샤를은 포비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그걸 가진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지금까지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온 당신들에게 또다시 선택과 책임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따라오십시오.”
다들 포비를 보았다. 지금으로선 이 처녀가 마을을 이끄는 책임자였다.
“그럼 하자. 투나, 당신 말대로 할게요. 어차피 이대로면 망해.”
하얀 마스크와 은빛 가발을 두른 오토마톤의 뒤에서 검은색 머리카락을 묶은 음흉한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히히히! 좋아! 계약 성립이야!”
다시 공방을 돌아온 투나는 같이 데려온 포비에게 착수금을 내밀었다.
철크럭!
“이거, 사용해.”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돈을 처음 본 포비는 눈만 굴려서 상자 속의 금화를 들여다보고 앞의 투나를 보았다. 졸려서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의 투나는 비틀거리며 말했다.
“사람들을 이주시킬 거, 건물, 중고 오, 오토마톤 10대. 나머지는 당분간의 생활비나 활동비. 오, 옷도 새로 사 입어.”
“이거 다 가져가요?”
투나가 히히 웃었다.
“그, 그건 안 되지. 돈 관리는 샤를을 통하도록 해. 나, 나는 좀 자야겠······.”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투나는 침대로 몸을 던져버렸다. 기절한 그녀의 몸을 바로잡아준 샤를이 다가왔다.
“여러분의 어려운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내 마음이 올바른 것임을 증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시작합시다.”
그 말에 포비는 가슴 속 무언가가 욱신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샤를과 함께 대략의 계획표를 짠 포비는 먼저 건물을 빌렸다.
“이사 갑니다! 짐 싸요!”
“어디로 가는데?”
“빈 건물 하나 통째로 빌렸어요! 여기 내부 공사 끝날 때까지 거기서 살아야 해요.”
당연히 크고 작은 불만이 나왔지만, 앞으로 살게 될 건물 앞에서 그것들은 싹 가라앉았다.
보따리를 싸 들고 옮겨간 곳은 상회 길드에서 쓰다가 반납한 건물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을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의 규모였다.
“와-! 새 집 엄청 커! 방도 엄청 많아!”
“생각보다 좋구나. 조금만 꾸미면 되겠는데?”
“마당과 뒤뜰에는 밭뙈기도 일굴 수 있겠구먼!”
집 구경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막연히 푸르른 여름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깥에 나와 보는 게 얼마 만이여.”
“그러게.”
사람들의 이주가 끝나자마자 포비는 이제 판매점으로 달려가 중고 오토마톤을 구매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잘생긴 고객님!”
한 번에 10대를 팔아치운 코코 점장이 밖에 나와서 인사까지 해주는 통에 포비는 그만 울뻔했다.
뒤를 졸졸 따라오는 오토마톤들은 모두 크랭크의 공방을 한번 거쳐서 하수구 촌으로 향했다.
덕분에 사람들은 기인 크랭크가 오토마톤으로 또 무슨 짓을 하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