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공주님!
투나를 평상에 옮겨놓고 다가온 캐롯이 또 손가락을 튕기려 하자 사람들이 뒤로 후다닥 물러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크랭크는 그 와중에 방패마저 챙겨 들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 공주님이 좀 늦네?”
“얼마 전에 국경 국경수비대 마을에 시장 보러 갔다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미 도착하셨다더군. 다만 여러 사건의 뒤처리를 하느라 일이 많으신 듯하다.”
“흠!”
딱-!
빡!
“아으?!”
좀 떨어진 곳에서 롱소드를 손질하고 있던 지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곁에 있던 보리스가 버럭 외쳤다.
“야! 캐롯!”
그걸 보고 낄낄거리던 모험가 하나가 말했다.
“그건 그만두는 게 좋겠는데?”
“에에? 이게 편한데요? 한 번에 뺄 수 있어서, 이거 내기라고요.”
에이플의 동료 여 마법사 포핏이 말했다.
“와, 넌 오토마톤이면서 주인님하고 내기도 해?”
“그럼요. 스릴만점이에요. 이거 10만 리즈 빵이에요.”
“돈 걸고?!”
수전노 크랭크는 이번엔 질 수 없다는 듯이 그 커다란 몸을 아크로바틱하게 움직이며 젠가를 공략하고 있는데 때마침 아리에테와 비타가 우물가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찾아왔다.
“와, 젠가네요? 어릴 때 신전에서 많이 했어요.”
“음, 놀이인가? 나도 좀 해봐도 되나?”
철크럭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다가온 아리에테가 대뜸 그것을 건드렸다.
“어어어?”
와르르륵?!
비틀거리던 젠가 탑이 무너지자 평상 위에 엉덩이를 쑥 내밀고 엎드려 젠가 나무 조각을 빼들고 있던 크랭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 아리에테와 기괴한 모양새의 크랭크가 눈이 맞았다.
“갑자기 할 일이 생겼……!”
젠가에 이어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이번엔 아리에테가 술래였다.
* * *
크랭크의 예상대로, 쥬세페 공주는 산맥의 관통굴 조사에 앞서 인신매매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고 현지를 시찰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지금 이 사건이 매우 엄중한 사항이며, 그것을 왕족이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이번 현지 시찰은 관통굴 조사보다 더 중요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쥬세페 공주도 자신이 지금 놀러 온 것이 아니며,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보여주기 위해 시찰을 빙자해 이런 끔찍한 사건이 터질 때까지 방치한 책임자들의 피를 말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관련자 처벌과 재발 방지에 대한 보고와 지시, 수정이 매일 이어졌다.
그녀의 방문에 방주도시 웰메인과 극동 국경수비대에서는 한바탕 칼바람이 불었고, 많은 인선이 갈아치워지고 쥬세페 공주에 대한 악명과 존경심이 동시에 솟구쳤다.
그래서 그녀가 웨일즈 본 산맥 아래 위치한 개척민 마을에 입성한 것은 투나가 도착하고 일주일이 더 지난 뒤였다.
“후으! 1년 치 일을 한 것 같은 5일이었어.”
움직이는 자동수송차량 안에서 화장을 고치고 제복을 갈아입은 쥬세페 공주는 피곤한 표정이 역력한 얼굴을 돌렸다.
“그거, 용기의 포션 한번 마셔보면 안 될까? 한계 이상의 힘을 낸다며?”
“안 됩니다. 그런 건 함부로 드시면 몸에 해로워요.”
쥬세페 공주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고백할게, 사실 나는 놀러 나온 것이 맞아.”
이미 그녀의 속셈을 알고 있는 여 보좌관 리리안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개척민 마을에 도착하셔서 모험가들 치하까지만 하고 오늘 일정은 마무리하시죠. 어차피 늦기도 했으니까.”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쥬세페 공주는 잠시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음, 일단 좀 쉬고 내일부터 놀아보자.”
하지만 도착해서 위업을 달성한 자랑스러운 모험가들의 얼굴을 마주한 쥬세페 공주는 몹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훌륭해! 그대들의 역할과 노고를 찬양하노라!”
듣던 것보다 상당히 괜찮은 수준으로 만들어진 개척민 마을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쥬세페 공주는 두 팔을 벌리고 지금까지 힘써준 모험가들을 치하했다. 그녀는 하나하나 손까지 잡아주며 이름을 물어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일부러 복귀하지 않고 체류하고 있던 모험가들은 감격하여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공주님의 손을 잡았어!
공주님이 나를 보셨어!
공주님이! 공주님이! 으아아아!
“음? 그대는?”
쥬세페는 고개를 들었다. 크랭크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인사를 했다.
“아르곤 모험가 길드 소속 크랭크입니다. 일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옆의 캐롯은 치마를 살짝 들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청동문 조사단장으로 아르곤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자들이었다. 커다란 마스터의 목마를 탄 조그만 오토마톤, 몇 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것 같았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크랭크와 캐롯, 물론 기억하고 있다. 힘내 주었다. 감사하다.”
난민들을 지켜내고 그 정착 마을의 건설에 힘쓴 모험가들을 치하한 쥬세페 공주는 뒤를 이어 큰 도움을 준 드워프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일하다가 말고 불려 와서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던 드워프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그런 입에 발린 소리 말고 맥주 같은 건 없나?”
딱-!
자신만만하게 눈을 감은 공주가 하얀 장갑 낀 손가락을 멋지게 튕기자 오토마톤과 병사들이 커다란 맥주통을 옮겨오기 시작했다.
물자가 부족한 곳에서 희망 하나만 보고 하루하루 벅차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역시 말보다는 물질적인 표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여러 가지 보급품을 준비한 리리안느가 살풋 웃으며 말했다.
“차갑게 식혀두었습니다.”
“우효-!”
구스타프를 포함한 드워프들이 우르르 달려와 맥주통의 뚜껑을 따고 거품 가득한 맥주를 퍼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을 내버려 둔 쥬세페 공주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한 다음 마지막에 덧붙였다.
“국가가 부여하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충실히 세금을 납부하는 그대들에게 우리는 리즈넷의 건실한 국민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를 선물할 것이다.”
왕녀의 말은 보좌관에 의해 즉시 해석되어 큰 소리로 울려 퍼졌고 듣고 있던 사람들은 환호를 질렀다.
선포식이 끝나고 준비된 맥주와 먹거리로 잔치가 펼쳐졌다. 진수성찬을 대접을 받은 사람들은 온몸으로 감사를 표현하며 배불리 먹고 마셨다.
사이퍼즈 사람 중에는 맥주를 난생처음 마셔보는 사람도 많아서 놀라움과 더불어 눈물을 글썽이는 자들도 여럿 있었다.
연회를 베풀어준 쥬세페 공주는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에 간단히 마을을 시찰했다. 그러다가 커다란 창고 앞에서 멈췄다.
“저건 뭐지?”
뒤따라온 크랭크가 설명했다.
“자동 베틀입니다. 드워프가 만들어주었습니다. 향후 이 사람들의 수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준비해보았습니다.”
멋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복잡한 자동 베틀이 일렬로 죽 나열되어있고 몇 대는 반쯤 직물 원단을 짜다가 멈춘 채로 서 있었다.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는가?”
왕녀의 요청에 잠시 후 갈색 피부에 은색 머리를 땋은 처녀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더니 익숙한 몸짓으로 베틀을 다루기 시작했다.
드르륵! 윙! 착!
자동 베틀 기계가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뒤로 완성된 면포가 둘둘 말리고 있다.
그걸 본 쥬세페 왕녀를 비롯한 보좌관들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방직 산업은 의식주의 한 축을 담당하다 보니 국가기간 사업 수준으로 중요시되고 있으며 리즈넷에서도 자체 생산량이 소비를 따라가지 못해서 부족분은 항상 수입에 의존했었다.
그런데,
착! 드륵! 착!
눈앞이 갈색 피부의 어여쁜 처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무아지경으로 베틀을 돌리는데 그 움직임이 너무도 재빠르고 일사불란하여 마치 사람이 베틀의 중요 부품이 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깜빡 정신을 차린 처녀가 손을 놓고는 배시시 웃으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보좌관이 통역했다.
“베틀 기계가 좋아서 일이 손쉽다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마주 화사하게 웃어준 쥬세페 공주가 물었다.
“필요한 것은 없는가? 내 뭐든 수배해 주겠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처녀는 통역을 듣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보좌관이 말했다.
“실, 실이 필요하답니다. 준비해 온 걸 다 썼다고 합니다.”
오뚝한 코의 콧구멍을 벌렁거린 쥬세페 공주는 처녀의 어깨를 힘 있게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이 나라의 국민이 된 것이 나는 진심으로 기쁘다 걱정 말거라, 내가 준비해주마.”
그 발언에 음흉한 양철 거인도 함께 기뻐했다.
그 뒤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으로 마저 시찰을 마친 쥬세페 공주는 파티 중인 마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슬쩍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리고 자동수송차량의 실내에 마련된 회의실로 보좌관들을 불러들였다.
“아까 그 베틀, 어떻게들 생각하지? 경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가?”
보좌진들이 히죽 웃었다.
“넝쿨이 호박째로 굴러들어왔습니다. 먼 미래의 일이지만 이건 잘만 운영하면 좋은 자금원이 될 것입니다. 물론 면직 공산품 거래도 활발해질 것이고요.”
“들으니 다들 고향에서 면직 생산을 담당하던 자들이라고 하더군요. 설비도 만만찮으니 재료만 꾸준히 공급되면 바로 상품으로 가공할 수 있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던 쥬세페 공주가 흥미로운 얼굴로 크랭크를 올려다보았다.
“저렇게 만든 원단의 판로는 어쩔 셈인지도 들어보고 싶군. 크랭크 경.”
경?
얼떨결에 참고인으로 끌려온 크랭크는 투구를 흔들었다.
“아니, 저는 단순히 시장에 내다 팔아서 생필품과 교환 정도를 생각하고……!”
보좌관 중 젊은 남자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현재 설비로는 그게 한계일지 모릅니다만, 멀리 봅시다. 인구와 설비가 늘어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너무 멀리 나가는 그들의 발언에 당황한 크랭크였지만 그는 곧 확실히 선을 그었다.
“아니요, 일개 모험가인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뒷일은 여러분 같은 유능한 분들께 맡기고 싶습니다.”
쥬세페 공주가 웃었다.
“경은 욕심이 없군.”
“모험가는 모험을 하기 위해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나 그런 것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투구를 쓴 친절한 거인이 낮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이 고요한 일상을 이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돈도 받았고.
물론 뒷말은 하지 않았다. 크랭크도 눈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모험가 크랭크, 돈만 주면 뭐든 하지만 기본 낭만주의자.
짧은 회의가 있긴 했지만 물 밑 지원은 하되 아직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무턱대고 거금을 들이기엔 공주의 보좌진은 꽤 신중한 편이었다.
하지만 침은 발라두고 싶었던 쥬세페 공주는 마을을 일궈낸 주축으로 지목된 크랭크에게 촌장직을 제의 했으나 거절당했다.
내내 좋은 말만 듣고 자랐던 쥬세페 공주는 자신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는 그를 보고 조금 당황해버렸다.
“어, 얼마를 원하지?”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공주님.”
호위무사들의 표정이 사나워졌지만 오우거와 눈싸움을 하는 직종의 크랭크는 담담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모험가입니다.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쓸 만한 사람을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명단에 오른 것이 그란이었다.
“그란을?”
겨우 풀려나 잔치 중인 동료들에게 돌아온 크랭크는 캐롯을 보면서 말했다.
“도로 잡아 와야겠어. 속죄의 시간은 이어져야 해.”
“어어? 나 그란에게 새 출발을 약속했는데.”
“정들면 고향이라던데 새 출발은 여기서 해도 되지 않겠어? 사람들은 아직 의지할 본토 사람이 필요해. 이 바닥을 좀 아는 눈치 빠른 친구면 더 좋겠지.”
캐롯은 입술을 오므리며 크랭크를 바라보았다.
“오, 정들면 고향, 그거 듣기 좋네. 그런데 그란은 눈치가 그다지 빠르진 않던데 말이야. 그리고 잠깐 나쁜 놈이었잖아?”
크랭크가 투구를 돌렸다.
“오히려 그런 쪽 경험이 있으니 더 안성맞춤일지도 몰라. 비슷한 사기꾼과 악당을 잘 알아볼 테니까. 그리고 우리 쪽에도 보험을 하나 들어놓으면 된다.”
“보험?”
캐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