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젠가!
“크랭크!”
로브 자락을 들어 올린 투나가 작업장 건물 입구로 난입했다. 내부를 두리번거리는 그녀는 이제 부품을 깎고 있던 크랭크를 발견하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크, 크크크랭크읏!”
“음?”
키가 맞지 않아서 그의 멱살을 잡는다는 것이 매달린 수준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투나는 그래도 꿋꿋하게 현재의 불만을 토로했다.
“여, 연구실! 공방으로 돌아가고 싶어! 여긴 아, 아무것도 없어! 모르는 사람도, 너, 너무 많아!”
재료를 공수 받으러 왔다가 울컥하여 딴소리를 늘어놓는 투나를 내려다보던 크랭크가 그녀를 달래보려는데 근처에 있던 드워프 하나가 끼어들었다.
“자네 양철 거인의 여자친구인가? 정들면 고향이라던데. 그냥 여기 눌러 사는 건 어때?”
드워프는 원래 작업과 기술을 숭상하는 종족이라서 근면 성실한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마법사와 약사라면 일단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
마법사는 드워프가 기술적 한계에 처했을 때 돌파구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며, 약사는 병을 치료하는 방법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투나는 둘 다 할 줄 안다.
“그리고 이상하게 저 처녀에게 좋은 냄새가 나는군. 향수인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투나가 손과 팔을 코에 대고 킁킁거리자 드워프들이 기분 좋게 웃기 시작했다.
“오, 오오. 작업장 안에 드, 드워프가 잔뜩 있네.”
잠시 입을 헤 벌리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베틀을 조립하고 나무를 깎고 있는 드워프들을 쳐다보던 투나였지만 슬그머니 크랭크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후다닥 달려가 매달렸다.
“어, 어딜 도망가! 가여운 나를 달래줘! 다, 달래 달라고! 이 심장을 잃어버린 야, 양철 거인아!”
신경쇠약에 거의 착란을 일으키고 있는 투나를 질질 끌고 그녀가 묶고 있는 숙소로 들어간 크랭크는 얼마 안 되는 집기를 다 들어내고 자재를 옮겨와 망치질하더니 기어코 간판까지 내걸었다.
극동 개척민 마을 출장 지부, 투나의 제2연구소.
두 손으로 볼을 감싼 투나가 간판을 올려다보며 비명을 질렀다.
“호오오오옥!! 여, 연구실이야! 내 연구실이야!”
신이 난 투나가 호다닥 달려 들어갔지만 곧 실망을 안고 뛰쳐나왔다.
“아, 아무것도 없잖아!”
“만두피는 내가 빗었으니 이제 속은 네가 채워라. 쇼핑을 준비해라. 고디브에게 필요한 물건을 물어봐줘.”
제임스가 자동마차를 준비했다. 가장 가까운 마을인 극동 국경수비대로 달려간 투나는 마차를 가득 채워서 돌아왔다.
빈 돈주머니를 돌려받은 크랭크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낭비는 좋지 않아.”
“여, 여자의 스, 스트레스는 쇼핑으로 푸, 풀어야 해. 으히히!”
언제든 틀어박힐 수 있는 제2연구실이 생겨서 마음이 안정되고 기분이 좋아진 투나는 으히히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을 여자들을 불러 마차 안의 냄비며 그릇을 포함한 생필품을 모두 연구실로 옮겼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에게 사이퍼즈 말로 외쳤다.
개업 기념! 약초를 캐오면 생필품과 바꿔드림!
가여운 얼굴을 하고 모여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자국에서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해왔던 지라 내내 눈치를 보면서 조용조용하던 사람들은 노동에 정당한 보상이 따라붙자 목적의식이 생겨서 다채로운 표정으로 떠들고 웃으며 약초와 잡초를 들고 고민하거나, 주변에 물어보고 가르쳐 주며 그것들을 주워 담았다.
호위로 불려와 그걸 흥미롭게 지켜보던 캐롯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와! 사람들이 웃고 있어! 나 여기 사람들 이렇게 웃는 거 처음 봐! 굉장해! 투나!”
약초를 뽑아온 사람들은 투나의 연구실 앞에 줄을 서서 늘어섰다. 그러면 투나가 캐온 약초의 양이나 희소가치에 따라 원하는 그릇이나 비누 같은 것으로 바꿔주었다.
동시에 연구실 내부 선반에는 약초들이 차곡차곡 쌓여 올라갔다.
지켜보던 크랭크는 박수를 쳤고, 아리에테도 그녀를 칭찬했다.
“멋지다! 투나! 똑똑해!”
투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엄지를 세웠다.
한바탕 약초 캐기가 끝난 다음 오후에는 말을 가르쳤다.
“아, 안녕 하, 하세요.”
“아, 안녕 하, 하세요.”
“프하하!”
말더듬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 이상해져서 캐롯이 폭소를 터트렸다. 결국 비타와 신관들을 초빙해 와서 말을 가르치고 투나는 통역을 했다.
생각보다 공부에 열의가 있는 학생들이 많아서 수업은 성황을 이뤘다.
어른들이 바쁜 와중에 심심해진 아이들은 캐롯이 도맡았다. 하지만 그냥 놀아만 준 것이 아니라 상황에 어울리는 간단한 말을 반복적으로 들려줘서 아이들이 더 빨리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덕분에 수일 만에 간단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인사말을 배운 마을 아이들이 오후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캐롯에게 달려왔다.
“아, 안녕, 하, 하세요.”
뿌듯한 얼굴의 캐롯도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하! 세요!”
“안녕하! 세요!”
그 모양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장난꾸러기 아이들 몇몇이 캐롯을 따라 만세 삼창을 하듯이 안녕하세요를 연발했다.
인사를 마친 아이들과 캐롯이 깔깔 웃는데 소녀 하나가 다가왔다.
“내, 내 이름은, 어, 음, 베리타. 여, 열둘, 열두 살.”
“오오! 내 이름은 캐롯! 반가워, 베리타! 나는 기체 연령 11년!”
말이 통하자 캐롯보다 조금 더 큰 베리타가 싱글싱글 웃었다. 캐롯도 그런 베리타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음 지었다.
“봐봐, 우리는 정말로 서로를 이해하면서 살 수 있을까? 너희들 우리 뒤통수치지 않을 거지? 응?”
사이퍼즈 소녀 베리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못 알아들은 것이다. 음흉하게 웃고 있는 캐롯을 아리에테가 번쩍 들어 올려 허리춤에 끼고 돌아섰다.
같이 온 투나는 모여 있는 아이들에게 이제 씻고 밥 먹을 시간임을 알려주고는 베리타의 등을 두드리며 저편에서 손짓하는 소녀의 엄마를 가리켰다.
“내일! 본다! 선생님!”
요즘 동네 사람들에게 좋은 향기가 나는 약사 선생님으로 유명해진 투나가 기분이 좋은 듯 몸을 숙이고 으흐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해맑게 웃으며 달려가는 소녀를 불편한 시선으로 훔쳐보던 아리에테가 캐롯을 보고 버럭 했다.
“캐롯! 너는! 주인과 판박이구나! 음흉해! 넌 음흉한 당근이야!”
아리에테에게 엉덩이를 팡팡 맞으면서 캐롯은 히히 웃기만 했다.
“아리에테는 당근 싫어해?”
허리를 편 투나가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히죽히죽 웃고 있던 모습과는 다르게 사뭇 의연한 얼굴이었다.
“사, 사람의 보, 본성을 결정하는 건 그, 그 행동이래.”
“와! 그거 좋은 말이야! 다음에 나도 써먹어야지! 아리에테, 그만 내려줘 밥하러 가야 해.”
바닥에 내려선 캐롯은 마을의 공동 조리장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그걸 보고 있던 아리에테가 투나를 돌아보았다.
“사실 나는 당근 싫어해. 하지만 저 당근은 예외로 치지.”
“흐흣……! 어, 음, 나, 나도.”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예뻐진 투나를 보고 코를 좀 벌렁거린 아리에테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한쪽 팔은 부러져서 붕대가 감겨 있었는데, 수리는 현지에서 무리라고 크랭크가 말했던 것 같다.
으히히 웃고 있던 투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엄마의 손을 잡고 오늘 있었던 일을 재잘거리며 걸어가던 베리타가 뒤를 돌아보았다.
멋진 여기사와 친절한 약사 선생님이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너무 잘 어울려서 엄마에게도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 엄마! 저기! 봐!”
베리타의 엄마는 딸이 가리키는 그림 같은 모습보다 며칠 만에 리즈넷 말을 하게 된 딸이 더 기특하고 신비로웠다.
* * *
사람들이 처음 이곳에 움막을 짓고 난민촌을 형성한 이유는 지하수가 솟아오르는 샘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개척민 마을로 변화한 지금 그곳은 마을에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우물과 함께 커다란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평상에 걸터앉은 채 간이 목공소에 얻어온 나무 조각으로 놀이용 젠가를 만들어본 크랭크는 그걸 가지고 캐롯과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주변에 몰려온 아이들과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가운데 커다란 몸을 잔뜩 웅크린 크랭크는 젠가 블록의 나무 조각 하나를 조심스레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애초의 목적인 피란민 조사 의뢰는 완수되었다고 봐도 좋다.”
“그렇지, 덤으로 납치된 사람도 구하고, 생활 기반도 다져줬어. 할 건 다 했다고 봐. 그 관통굴은 아쉽게 되었지만.”
평상에 아예 드러누워 자세를 잡은 캐롯은 한쪽 눈을 감고 제일 밑에 있는 나무 조각을 손가락으로 때려버렸다.
딱!
핑-!
날아간 나무 조각은 우물가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 마시던 에이플의 뒤통수에 적중했다.
딱!
“으흡?! 풉! 쿨럭쿨럭-!? 무! 뭐냐?!”
그걸 보고 사람들이 와하하 웃기 시작했다.
“우왕-! 잘못했어요!”
분노한 에이플에게 붙들린 캐롯이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사과를 하는 사이 크랭크는 흔들거리는 나무 탑에 저주를 걸어보려고 커다란 손을 내밀며 알 수 없는 힘을 가해보았지만, 탑은 넘어가지 않았다.
실망한 그는 다시 나무 조각 하나를 슬금슬금 밀어서 빼내며 말했다.
“상정 외의 일이 생기긴 했지만, 우리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알아서들 하겠지.”
험상궂은 에이플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캐롯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공주님만 도착하면 되겠네?”
“음, 인수인계가 끝나면 돌아가자. 홀로서기는 중요하다. 언제까지고 옆에서 부축해줄 수는 없어. 나는 내 인생도 중요하다.”
나무 조각을 빼는 데 성공한 크랭크는 무의식적으로 땀을 닦으려던 것인지 투구의 이마 부분을 손등으로 슥 하고 문질렀다.
“음? 아…….”
닦일 리가 없는데도 손을 비비던 크랭크의 행동과 그걸 뒤늦게 눈치채고 실망하는 모습은 보고 있던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평상 위를 이리저리 돌면서 적당한 곳을 찾은 캐롯은 다시 한쪽 눈을 감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핑-!
가공할 위력으로 날아간 나무 조각은 바로 옆 우물가에서 처녀들과 함께 약초를 씻어서 다듬고 있던 투나의 커다란 옆 가슴을 때려버렸다.
퍽!
“꺄으오오옥!?”
해괴한 소리를 내면서 가슴을 끌어안고 쓰러진 투나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가, 가슴이 아파! 수, 숨을 못 쉬겠어, 흐으어억…! 호옥호옥……!”
“어오옥! 미안! 투나 미안해! 이건 사고야!”
맨발로 호다닥 달려간 캐롯이 쓰러진 투나의 머리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어떻게 해! 내가 투나를 사랑에 빠트렸어! 가슴이 아프대!”
“프흐흣! 킥킥……!
쓰러진 투나는 아픈 것도 있지만 저 말이 너무 우스워서 킥킥거리느라 아픈데 웃긴 상황을 맞이했다.
근처에서 구경하던 모험가들도 킥킥거렸고, 통역을 받은 사이퍼즈 사람들도 낄낄 웃었다. 에이플이 얻어맞은 뒤통수를 매만지며 말했다.
“내 참, 여러 오토마톤을 봤지만 저 녀석은 정말……. 직접 만드신 거라고요?”
평상에 엎드린 채 엉덩이를 한껏 쳐들고 젠가 탑을 노려보던 크랭크는 나무 조각을 슬슬 밀어내고 잡아당기더니 기어코 그것을 뽑아 들고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 없는 환호를 질렀다.
그걸 지켜보던 에이플은 이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그가 저 캐롯의 마스터임을 확실히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