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협동!
약효가 떨어지고 정신을 차린 크랭크는 즉각 보복을 준비했다. 그렇다, 주장한 것이 아니라 준비했다.
그는 먼저 이쪽으로 전향한 병사들을 불렀다. 합류 의사를 밝혔을 때 간단히 심문했지만, 그들 말로는 자신들은 별동대 같은 것으로 반대쪽에 남아있는 지원 병력은 없다고 했었다.
크랭크가 물었다.
“그럼 어제 저 오토마톤이 말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드미르 부족은 뭐 하는 자들입니까?”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그의 말을 고디브가 통역했다.
“저 오토마톤의 몸에 새겨진 문장은 유력 부족 아드미르의 것이 확실합니다. 현 왕위를 장악한 하만 왕자와는 별개로 도망친 인력을 잡아들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잡아들여? 잡아들인다고? 당신네 나라엔 사람이 그렇게 헤퍼? 그냥 물건 취급이네?”
고디브는 캐롯을 내려다보며 힘없이 웃었다.
“땅은 넓지만,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런 곳을 선점한 귀족들은 부족을 결성하고 사람을 모읍니다. 힘이 없는 평민들을 그들의 재산 취급입니다. 자기 부족이 거느린 마을에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곧 영향력입니다. 이웃 나라 사람을 납치해오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듣고 있던 리즈넷 모험가들이 얼굴을 찡그렸다. 고디브는 계속 말했다.
“우리는 그것이 싫어 소란을 틈타 도망쳐 왔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고 있던 모험가 하나가 의견을 제시했다.
“잠깐만요, 애초에 던전을 통해서 들어오는 거니까. 이쪽 출구를 무너뜨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내부가 던전이라 길 찾기 힘들다면서요.”
크랭크가 투구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볼 때, 동굴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거죠? 아!”
말을 하던 비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치 빠른 자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던 사실이 드러났다.
크랭크가 쑥스럽게 말했다.
“일전에 풀어준 그자가 밀고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또 찾아올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들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지휘관을 풀어준 당사자인 크랭크는 나름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불의의 사고라면 어쩔 수 없지만, 아무래도 다른 나라 군인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역시 신은 주사위 놀음이 좋아하신다는 것.”
기가 찬 아리에테가 한마디 하려는데 캐롯이 먼저 말했다.
“봐봐, 되게 뻔뻔하게 말하지? 얼굴이 안 보이니까 그런 거야.”
“으음, 맨얼굴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정말로!”
하지만 아리에테는 곧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왜 빼는 것이냐? 나도 가보고 싶은데.”
“그 팔로 말이냐?”
오른팔의 외골격이 부러져서 응급 처치를 받긴 했지만 당분간 전투는 힘들었다. 제대로 된 수리를 위해서는 장비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잠시 뒤로 미루고, 크랭크는 캐롯만 데리고 상황을 살피러 다녀오기로 했다.
“정말로 통역은 필요 없겠습니까?”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이곳에 필요합니다.”
부서진 오토마톤 앞에 앉아서 뭔가를 분해하고 있던 크랭크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이윽고 크랭크는 마력석이 4개 연결된 살아있는 마력 엔진을 뽑아냈다.
하는 짓이 심상찮았는지 지켜보던 모험가가 되물었다.
“이봐요, 크랭크 씨. 정말 상황만 살피러 가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절대로 보복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력 엔진을 받아들고 깔깔 웃던 캐롯이 말했다.
“크랭크! 빨리 입술에 침 발라! 침!”
넋이 나간 얼굴로 캐롯을 보던 사람들이 이제 크랭크를 올려다보았다. 투구 때문에 보이진 않았지만, 혀로 입술을 날름 핥는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고 다들 생각했다.
투구에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운 미친 공돌이가 붉은 눈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준비를 마친 크랭크는 여전히 따라가고파 징징거리는 아리에테와 베누스에게 각각 귓속말을 남겨준 다음 동굴로 들어갔다.
그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부탁받은 대로 빛과 바람의 흐름을 보고 출구를 찾지 못하도록 입구에 흙벽을 쌓아 올리고 위장까지 마쳤다.
* * *
동굴 안으로 들어서서 한참 걷던 캐롯이 심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아까, 귓속말로 뭐라고 했어?”
잠시 후 뒤따라가던 크랭크가 대답했다.
“아리에테에게는, 돌아오면 시온의 4차 개수 작업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오오, 좋아라했겠네. 그럼 베누스는?”
“3달 동안 우리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너희들은 자유라고 말해줬다.”
캐롯은 앞을 바라보고 걸으며 킥킥 웃었다.
“우리가 없어지면 투나와 아리에테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할까?”
“지금의 투나는 의외로 생활력이 있다. 샤를도 투나의 곁에 남을 가능성이 있어. 문제는 아리에테인데……. 어제 봤나? 팔이 부러지니 기겁하더군. 내색은 안 하지만 아직 완벽하게 트라우마를 극복한 것은 아니었어.”
크랭크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불면증도. 아리에테는 역시 네가 가까이 있어야 제대로 잠을 자는 것 같아.”
“오오, 빠삭하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의 치료에 도움이 될까 싶어 아리에테 관찰일기를 작성해 두었지. 공방에 돌아가면 보여주마. 재미있을 거다.”
그의 말에 캐롯이 빠하하 웃었다.
“본인이 보면 난리 나겠는데?”
“사실 그 녀석이 완전히 극복해냈을 때 선물로 준비하고 있는 거야.”
“와-! 끔찍해! 악취미-!”
“큭큭큭-!”
크랭크가 킥킥 웃는다. 고개를 돌린 캐롯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응, 그렇네. 우리는 꼭 살아서 돌아와야겠네.”
“그래. 이제 그냥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어두운 동굴 안을 걷고 있던 캐롯이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뽑아 들었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항상 씨를 뿌리고 물과 거름을 챙겨줘야 해! 우리는 착실히 순서를 밟아가고 있어! 응! 그렇게 생각해! 진짜로!”
재빠르게 전투 준비를 마친 캐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널찍한 중앙 통로 저편, 거대한 사막 병정개미가 더듬이를 움직이며 달려들고 있다. 숏소드와 드래곤 스케일 방패를 꺼내든 크랭크도 캐롯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조금만 더 바람을 이겨내면 우리에게도 언젠가 꽃이 필 거다.”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주인님 덕분에 캐롯은 신이 났다.
의기투합한 오토마톤과 모험가는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를 향해 함께 덤벼들었다.
* * *
던전 진입 후 2시간이 지났을 무렵, 크랭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이상하게 개미가 많이 보이는 걸?”
“개미굴이라도 있는 걸까?”
“그러면 큰일이야. 특정 개미들은 드래곤도 잡아먹으니까. 이놈들은 아닌 것 같지만.”
쭈그려 앉아 도끼에 묻은 개미 진액을 바닥의 흙에 문질러 닦아내던 캐롯이 반갑게 말했다.
“아! 책에서 봤어! 드래곤 살해자, 진홍 개미, 불개미, 크림슨 앤트!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한 종류라면서? 와, 정말로 드래곤을 잡아먹어? 개미가?”
“다 함께 굴 파기에는 장사 없지. 드래곤도 예외는 아니야. 황소만 한 개미가 수백, 수천 마리가 몰려들어 공격한다더군. 문헌에는 7일 밤낮으로 공격당한 성채 드래곤이 잡아먹힌 사례도 기록되어 있어.”
“오오오!”
아무도 없는 동굴 안에 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잘하지 않던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크랭크가 말했다.
“이 부근이 산의 중간쯤이겠지?”
“음, 2시간 들어왔으면 어디든 비슷할걸?”
캐롯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크랭크는 갑자기 통로 가장자리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적당히 파낸 흙은 한쪽에 잘 모아두었다.
하도 이상한 짓을 잘하기 때문에 캐롯은 별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뭐하는 거임?”
“그냥, 모래성을 쌓을 준비.”
땅만 파놓고 몸을 돌린 크랭크는 길을 재촉했다.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던 캐롯이 움찔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묘한 소리가 들린다.
“사람 목소리야. 그런데 아는 말이 아냐.”
“일단 숨자. 이리 와. 불 꺼.”
조명을 끈 크랭크가 캐롯은 껴안고 바위틈에 몸을 기댄 다음 배낭에서 위장 모포를 꺼내 덮었다. 그러자 그것은 주변 환경을 감지하여 비슷한 색감으로 보이도록 변화했다.
“와, 마법에는 펑펑거리는 거만 있는 게 아니구나. 신기방기.”
“쉿,”
잠시 후…….
그들이 서 있던 곳으로 중얼 중얼거리는 사람 목소리가 지나간다. 높낮이가 없는 여자 목소리로 사이퍼즈 말을 해대고 있었는데, 캐롯과 크랭크는 저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개척민 마을을 습격해왔던 오토마톤들이 떠들어대던 안내방송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참 그대로 있자 목소리는 멀리 사라졌다. 위장 모포를 내린 크랭크는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그놈들 일행인가 보군.”
“막상 던전을 통과하러 들어왔는데 몬스터와 갈림길에 가로막혀 빠져나오지 못한 게 아닐까? 우연히 나온 것들이 우릴 공격한 것이고 말이지.”
“가능성이 높다.”
크랭크는 그렇게 말하며 라이트 볼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옆 중앙통로에 백색 방열 가발을 산발한 하얀 인형이 가만히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랭크의 품에서 뛰어내린 캐롯이 재빠르게 도끼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사납게 웃었다.
“야! 깜짝 놀랐잖아! 우리 주인님 좀 봐! 너 때문에 애 떨어질 뻔했잖아?!”
가만히 서 있는 오토마톤에게서 다시 그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어제 전투 때문에 조금 신경질적이 된 캐롯이 재빠르게 덤벼들었다.
“에잇! 시끄러워!”
사사삭!
가까스로 공격을 피한 하얀 오토마톤은 허리춤의 검을 뽑는 대신 뒤로 물러서더니 두 손을 위로 번쩍 들었다. 공격 의사가 없음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캐롯은 미묘하게 그 오토마톤과 대치하면서 말했다.
“크랭크, 네가 좀 봐볼래? 이 자식, 좀 이상해.”
그렇지 않아도 지켜보고 있던 크랭크의 투구 속 이맛살이 일그러졌다. 정말 공격 의사가 없어 보인다. 어째서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던 캐롯이 말했다.
“도움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 옛날의 나도 그랬는데.”
“음.”
대답은 했지만 투구 안 크랭크의 눈은 가늘게 변했다.
부수는 게 맞다. 둘이서 협공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군. 이 녀석의 형제들은 명령에 따라 우릴 제압하려 했었어. 원래는 이 녀석도 그렇게 해야 해. 그런데 왜 그러지 않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아쉽군.”
“상황에 맞게 명령을 비틀어서 적용했겠지. 베테랑스는 그게 특기잖아? 어떻게 할까? 부수라면 부술 거야.”
크랭크는 캐롯을 보았다. 지금 캐롯도 궁금한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 물어오지 않고 자의적으로 먼저 행동했을 것이다.
“나는 오토마톤과도 친하게 지내고 싶다. 적의가 없다면 애써서 싸울 필요가 없지 않을까?”
역시 쿵짝이 잘 맞는 주인님이라고 생각하며 캐롯이 히히히 웃는다. 하지만 도끼를 치우지는 않았다.
“야, 너 뭐야? 나가는 길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