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난민촌! (3)
크랭크가 난민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는 우리나라다, 이 사람들은 자국의 난리를 피해 온 외국인이고, 왜 거기서 싸우다 죽지 않고 왔냐고는 말하지 말자. 사람 대 사람으로 보자. 나는 이 나라의 모험가다. 국가 차원에서 방침이 정해지기 전까지 내 마음대로 당신들을 돕겠습니다.”
“말 돌리긴, 돈 받았으니까 그런 거잖아요?”
골이 난 보리스가 끼어들었지만, 크랭크는 무시했다. 그는 고디브를 보았다.
“통역.”
고디브가 통역하자 사람들이 감사하며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고,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남자가 고디브에게 와서 뭐라 한참 떠들어 댔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크랭크를 가리켰고, 고디브가 쳐다보자 크랭크는 괜찮으니 말하라고 했다.
“조국이 침략 당했다면 당연히 싸우다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전이다. 서로의 욕심 때문에 다들 싸운다. 누가 왕이 되던 우리의 형편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의 편도 들고 싶지 않다. 그저 조용히 살고 싶다. 우리를 이 나라에서 받아 줄 수는 없나? 세금도 착실히 내겠다.”
고디브의 말이 멈추자 그 남자가 크게 외쳤다.
“웨이다 디 아미르!”
고디브가 울먹이며 통역했다.
“고요한 평화, 원한다.”
가만히 듣고 있던 크랭크가 말했다.
“여긴, 몬스터가 많습니다만.”
“우리는 몬스터보다 사람이 더 무섭습니다. 그건 사냥해서 먹을 수가 없잖습니까?”
어쩐지 서글픈 표정을 지은 고디브의 말이었다.
투구 안의 시선을 움직여 그의 일족들을 둘러본 크랭크는 슬쩍 말을 돌렸다.
“사이퍼즈는 우리나라에서 가공한 몬스터 고기를 많이 수입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저녁은 융숭히 대접해야겠군요.”
근처에서 파티를 꾸리게 된 아리에테는 팔짱을 하고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오토마톤 둘, 칼쟁이 하나, 활쟁이 하나, 자신 포함 5인 파티였다.
“어떻게 하지?”
캐롯의 물음이었다. 뭔가 생각하는 아리에테를 보고 지오가 손을 들었다.
“주변을 수색할까요?”
“맞아. 아까 우리가 보고 온 그 녀석들을 족쳐볼까? 아, 자동 석궁 있었어. 조심해야 해.”
아리에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었다.
“납치한 사람들은 어디로 데려갔을까? 20명이 넘는다고 했었다.”
“뻔하지. 다들 예쁘장하니까, 도시의 윤락가나 귀족들 노리개로 팔아…….”
은근슬쩍 끼어들어 비참하면서도 현실적인 의견을 제시했다가 비타에게 등짝을 두들겨 맞은 보리스였다.
퍽퍽!
“당신 때문에 인류애가 증발하고 있어요! 그런 생각밖에는 안 들어요?”
“너야말로 그만 때려! 애초에 하는 짓이 다 비슷하지 뭐! 사람은 복잡해! 너라고 다를 것 같냐?!”
“뭐요?!”
비타와 보리스가 손을 마주 잡고 힘겨루기를 하는데 아리에테가 손을 들었다.
“크랭크, 멤버 교체를 요구한다.”
“왜?”
“역시 보리스를 데려가고 싶다.”
지오가 손을 들었다.
“그럼 제가 빠지겠습니다.”
크랭크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안 됩니다. 아리에테가 날뛰면 막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코비, 보리스랑 교대하십시오.”
“옙. 전 어디나 좋아요.”
“아싸!”
성격 좋은 코비와 말썽쟁이 보리스가 손을 마주치며 자리를 바꿨다.
크랭크는 팔짱을 자주 끼는 편이다. 몸이 커서 그런 자세를 취하면 자연스레 위압감이 생기기도 했고, 끔찍한 근육 덕에 어깨가 좀 편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같이 사는 사람들도 자연스레 그 행동을 보고 따라 했다.
오토마톤마저도 말이다.
캐롯과 로테가 팔짱을 하고 아리에테를 보았다.
“그래서 계획은?
“이런 일을 몇 번 겪어봐서 안다. 넓은 숲속을 뒤지면서 술래잡기를 해봤자 끝이 없어. 술래가 숨은 곳을 엎어야 해.”
“호오.”
아리에테가 고개를 들었다. 항상 소리나 지르면서 꽥꽥거리던 아리에테가 아니었다. 눈빛이 차갑다.
“가장 가까운 마을부터 뒤진다. 피부색이 다르니 눈에 띄겠지.”
“저기, 대놓고 깽판을 부리면 우리가 불리해. 상대는 같은 인간이야. 이 점을 유의해야 해. 어떤 방법으로든 찾아서 보복하려고 할 거야.”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면 상관없지 않나? 그거라면 걱정마라. 자주 써먹었던 방법이 있다.”
대략적인 방침이 세워지자 아리에테는 꼼꼼하게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제임스의 자동마차를 얻어 타고 가까운 마을로 향했다.
“오실 때 생필품 좀 사다 주십시오. 이건 돈과 품목입니다.”
“알겠네.”
고개를 돌린 크랭크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스크롤이나 장비는 아끼지 말고 사용해라. 그런 것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조심해라.”
“걱정마라. 나는 이래 보여도 잔뼈가 굵은 모험가다.”
아리에테를 비롯해서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크랭크에게 내밀었고, 그 역시 마주 엄지를 들어주었다.
떠나가는 자동마차를 바라보는 크랭크의 곁으로 코비가 다가왔다.
“주변 탐색 나갈까요?”
“아니요. 일단 몬스터 퇴치용 부비트랩부터 설치합시다. 방호조치가 먼저입니다. 주변 탐색은 베누스에게 부탁했습니다.”
“옙!”
남자들 몇 명이 돕기 위해 다가왔다. 무어라 말을 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았다. 통역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크랭크가 하는 것을 가만히 보더니 바닥에 그림을 그려 촌락 주변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손에 나무 작대기로 크랭크가 만들고 있는 트랩을 가리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챈 크랭크가 엄지를 세우자 남자들도 마주 엄지를 세우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숲속을 뛰어다니며 트랩을 설치했다.
근처에서 다친 사람을 치료하던 비타가 그걸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와, 말이 통하지 않는데 통하고 있어.”
그 현상은 신관 비타에게도 일어났다.
그녀의 활약 덕에 다치거나 기력을 다해 빈사 상태에 있던 사람들 대다수가 건강을 되찾았다. 피부색은 달랐지만 다들 손녀나 딸 같은 여 신관을 앞에 놓고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절을 해댔다.
“트레바! 트레바!”
“트레바?”
고디브가 해석했다.
“전설에 등장하는 생명과 치유의 신입니다. 사이퍼즈에는 신관이 없어서 리즈넷의 신관님들이 오시면 깍듯이 모시죠.”
“오와! 정말요? 아, 근데 좀 부끄럽다. 아픈 분들은 더 없어요? 아직 좀 더 쓸 수 있는데.”
그 와중에 크랭크는 아예 이곳에 마을을 세우기로 작정했는지 나무를 마구 베어 넘겨 그걸로 목책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베누스가 피란민들을 데려오거나 다른 집단의 위치를 알려오기도 했다. 그걸 바탕으로 스크롤에 보고서를 작성하고 대략적인 지도까지 그려서 첨부한 크랭크가 스크롤을 찢었다.
“메시지.”
화아악?!
애써서 작성한 보고서를 찢어버리자 푸른 불꽃이 일어나 확 불타오르더니 사라졌다. 코비가 그걸 보고 신기해했다.
“와! 메시지 스크롤이네요? 처음 봐요.”
“쌍방향 통신이 막혀있는 지금 거의 유일한 장거리 통신 수단입니다. 그것도 단방향에 글로만 상황을 전달할 수 있지만요. 빠른 보고를 위해서 길드에서 지원해준 겁니다.”
“우리도 좀 빨리 실력을 쌓아서 명성을 얻고 싶네요. 그러면 한결 편할 텐데.”
크랭크가 슬쩍 물었다.
“파티를 좀 더 키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실력 있는 모험가를 넣는다던가.”
“어, 그러면 좋긴 한데요. 우리 같은 초보들에게 그런 형편 좋은 사람이…….”
말을 하다 말고 코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와 잠깐 눈을 마주한 크랭크는 사람들의 부름에 몸을 돌리고 있었다.
“어어?”
코비는 덩치에 비해 눈치도 좀 있는 편이었다.
기어코 마을 사람들을 다 치료해버린 비타는 지금 아주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던 사람들이 약간의 도움을 주자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난민촌을 보호하기 위해 친절한 거인을 따라다니며 나무를 베어 목책 쌓고 트랩을 설치했다.
오토마톤들이 잡아 온 야생동물과 몬스터들은 여자들과 늙은이들의 손에서 가죽은 물론 뼈까지 발라내서 가공되기 시작했다.
사람이 살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을 둘러보던 비타가 놀라움의 감탄사를 내놓았다.
“오오! 오오! 마을이! 마을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크랭크는 목책과 트랩에 그치지 않고 돌창과 돌도끼 같은 원시적인 무기도 만들었다.
“억지력은 중요합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고요한 평화는 사람의 간절한 마음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통역.”
고디브가 크랭크의 말을 통역했다. 남자들의 얼굴로 비장한 표정이 흐르더니 각자 조악한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의외로 손재주가 좋아서 활과 슬링도 만들어냈다. 그때쯤 해가 저물고 베누스가 대형 사막 전갈의 다리를 가지고 돌아왔다.
“복귀 도중 가까운 곳에서 발견했습니다. 마을에 해를 가할 것 같아 처치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전갈 구이가 좋겠군. 가지러 가자.”
함께 전갈을 수거하러 간 난민촌의 남자들이 황소만 한 사막 전갈을 보고는 기겁했다.
“이걸 혼자서 잡았습니까?”
고디브가 초록색 방열 가발을 늘어뜨린 오토마톤에게 존칭을 붙이기 시작했다. 사막 전갈을 부위별로 해체해 난민촌으로 옮기자 사람들이 환호했다.
여기서 명탐정 비타가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사이퍼즈 난민들이 촌락을 돌아다니는 베누스를 조심스러워하는 것이었다.
물건을 줄 때 두 손으로 내민다든가 공손히 받든다든가.
그게 신기해서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고디브에게 물었더니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사이퍼즈에는 오토마톤이 없어요?”
“생산은 물론 수입 자체가 금지되었습니다. 미움을 받은 탓이겠지요.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비타에게는 새삼 놀라운 것이었다.
“와아! 오토마톤이 여성형이 된 이유에 그런 사정이 있었어요?”
과거, 전쟁 당시 적군들이 여성에게 살해당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신봉한다는 첩보를 접한 리즈넷 군부에서는 당시 남성형이었던 오토마톤을 악의적으로 개조하여 전장에 투입했다.
그렇게 체격을 줄이고 골반을 강조하여 여성성을 도드라지게 만든 초기의 오토마톤은 모래땅이든 숲속이든 어디서든 튀어나와 칼을 휘두르는 살인 기계가 되어 사이퍼즈 병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코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그래서…….”
그래서 다들 오토마톤 베누스를 보는 시선이 남달랐다. 전설적인 악명을 떨치던 적 병기가 자신들을 지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꺄르르륵-! 헤헤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까지는 몰랐고, 단지 인형이 걸어 다니는 것이 마냥 신기해서 쫓아다니기 바빴다. 그러다 철퍼덕 넘어지자 보고 있던 베누스가 다가가 넘어진 아이를 안아 올렸다.
인간 아이를 안고 걸어가는 기계인형의 모습은 공포심과 경외감으로 바라보던 사이퍼즈 사람들에게 따뜻한 표정과 신뢰를 선사했다.
우리를 지켜 주고 있다.
하지만 찬물을 뿌리는 존재가 있었으니 머리에 투구를 쓰고 다니는 미친 공돌이 양철 거인 크랭크였다.
“오토마톤은 주인과 모르는 아이가 물에 빠지면 아이를 먼저 구하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어엇?! 정말요?”
크랭크는 설명을 덧붙였다.
“밑바탕에 깔린 그런 고정 설정이 꽤 됩니다. 물건의 사용 설명서는 꼭 읽어두시기를 바랍니다.”
“저 아이를 향한 관심이 만들어진 사랑이라니 가혹해요.”
“그 사랑도 종족의 번식과 보존을 위해서 만들어진 감정이라고 생각해보면 똑같은 겁니다.”
비타가 허망한 시선으로 크랭크를 보았지만 그는 가볍게 무시했다.
곁에서 설명을 전해들은 고디브는 사람들의 시선을 돌아보고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는 부디 저 환상이 계속되길 바랐다.
노예 사냥꾼과 몬스터 때문에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새우던 난민촌에서는 신뢰할만한 모험가들과 경비용 오토마톤의 등장으로 오랜만에 안전하게 꿀잠을 이룰 수 있었다.
* * *
한편, 가장 가까운 리즈넷 국경선 마을의 술집에 손님이 들어섰다.
바에 앉아 고개를 들자 잿가루를 발라 위장한 사람이 얼굴을 든다.
“뭘 드릴까?”
“살려고 온 게 아니라 팔고 싶은 게 있는데.”
“그런 거라면 잡화점에 가보시오.”
촤라락-!
테이블에 금화를 올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좀 봐주쇼. 제일 가까운 데가 여기라서 온 거란 말이야. 수수료는 낼 테니 판매처 하나 뚫게 좀 거들어줘요. 물건은 확실해. 두 마리 있어.”
부리부리한 눈으로 술집의 주당들을 노려본 사내가 그것을 쓸어 담더니 말했다.
“쯧, 다음에는 말구종에게 말해라. 이래서 일 처음 시작하는 것들은……. 물건은 어디 있냐?”
“흐흐, 데리고 올까요?”
술집 주인은 손가락을 까딱이더니 말했다.
“뒷문으로 와.”
잠시 후 술집 골목길로 비틀거리는 모녀를 앞세운 남자가 다가왔다. 사이퍼즈 전통 복장에 검은 머리카락, 갈색 피부, 늘씬한 몸매, 불안한 얼굴, 팔짱을 끼고 있던 술집 주인이 말했다.
“연락했으니 좀 기다리면 업자가 올 거다. 어디서 잡았냐? 이거 요즘 넘어와 있다는 피란민들이지?”
복면의 남자들은 웃기만 했다. 그때 골목 반대편 여관 건물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차가운 인상의 아낙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대뜸 물었다.
“몇 명이야?”
술집 주인은 그만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고, 거래처가 바뀌어버렸다. 몸을 돌린 복면이 말했다.
“두 명.”
“30만 리즈.”
복면 하나가 인상을 구겼다.
“30만? 둘 합해서 겨우?!”
“싫으면 다른 데 가든가.”
쾅-!
나무문을 거칠게 닫아버리는 걸 보고 남자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아니! 30만이 말이 돼?! 겨우 그거밖에 안 되냐고! 사람 둘에 단돈 30만!? 장난해!?”
다시 문이 열리더니 여주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럼 50만.”
“아니, 지금 장난하는 거야?! 이봐요!”
기가 차서 항의하자 문은 다시 닫혔고, 사내는 분통을 터트렸다.
옆의 사내가 문에 대고 말했다.
“바쁘니까. 그냥 50만 합시다.”
문이 열리고 무표정한 여주인이 돈주머니를 휙 던졌다. 그걸 낚아챈 남자들이 궁시렁거리며 떠나가자 두 모녀만 오도카니 남았다. 거친 손길로 여자의 손을 잡아끈 여주인은 그들을 데리고 지하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