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수도관광! (4)
마차를 좀 살펴본 크랭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휴게소에서 제대로 수리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마우실 데가!”
머리와 가슴에 붕대를 감은 마부들이 연신 허리를 숙이며 몸 둘 바를 몰라 했고, 그들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은 싱긋 웃었다.
“돕고 살아야지요.”
얼추 상황이 마무리되자 티타임 중인 노신사의 앞으로 덩치 큰 책임자들이 몰려왔다.
“성함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메인쿤 상회 소속 이동 차량의 차장들입니다.”
“저는 차량 경호대장입니다.”
찻잔을 코 밑에서 흔들던 붉은 색안경의 노인이 말했다.
“그윽하군.”
잔을 메이드에게 돌려주고 지팡이에 의지해 몸을 일으킨 노신사가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보이드 D 위저드일세, 별것 없는 자작 가문을 이끌고 있지. 발 벗고 도와준 답례로 약소하겠지만 자네들이 소속한 단체에 감사장과 답례품을 보내겠어.”
별로 들어본 적 없는 귀족 이름이었기에 사람들은 고개만 끄덕였다. 경호 대장이 물었다.
“혹시 습격한 사람들이 누군지 짚이는 곳은 있으십니까?”
보이드 자작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웃더니 말했다.
“모르겠군. 내게 불만을 가진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나저나 이렇게 대놓고 습격한 건 좀 놀랐어. 돌아가면 경비대에 출두해서 조사받도록 하겠네.”
“그래 주시면 한결 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들 하는군. 도와줘서 고맙네.”
뻣뻣하고 안하무인인 귀족들도 많은데 들어본 적은 없는 이름이었지만 꽤 경우에 바른 노신사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자리를 비켰다. 그리고 마냥 길가에 서 있을 수는 없기에 서둘러 이동을 시작했다. 선두 차장이 외쳤다.
“이대로 휴게소까지 가보시죠! 저희가 뒤따르겠습니다!”
굴러가는 게 좀 불안하긴 했지만, 마차는 그래도 큰 탈 없이 휴게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하니 벌써 저녁이었다.
메인쿤과 수도 리즈넷은 마차로 이틀 정도 걸리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중간 중간 휴게소가 있어서 도시 간 이동 차량을 이용하는 승객들은 물론 주변의 모험가들에게도 편의 시설을 제공했다.
“오오! 여기다! 나도 여기서 몇 번 묶었지! 옛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차량에서 내린 아리에테가 휴게소 건물을 돌아다니며 감격에 겨워했다. 이 별것 없는 건물과 경관도 한때 다시는 못 볼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숙소는 어디지?”
“이쪽이다.”
차표를 살펴보던 크랭크는 명시된 번호의 방에 짐을 풀었다. 휴게소의 일반 숙소는 여관과는 달라서 그냥 큰 방에 접이식 야전침대를 펼쳐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같은 방이라니요! 우리 아가씨를 뭐로 보는 거예요?!”
귀족 가문의 조신한 메이드 파이가 참다못하고 불만을 드러냈다. 접이식 침대를 펼치고 있던 크랭크가 투구를 들어서 그녀를 보았다. 옆에서 거들고 있던 아리에테가 말했다.
“나는 별로 상관없다만?”
“내가 상관이 있어! 넌, 어쩜 다 큰 처녀가 남자랑 같은 방에서 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 공방의 네 침대도 그래! 어쩌면… 어쩌면 그런 곳에서……!”
“실례다! 거긴 내 집이야.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놓고 쉴 수 있는!”
둘이서 왁왁 거리는 것을 들으며 침대 3개를 조립해놓은 크랭크가 몸을 일으켰다.
“파이,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 둘은 내 기준에 여자가 아닙니다.”
고개를 돌린 파이와 아리에테가 서로 다른 의미로 눈썹을 세우고 도끼눈을 했다. 아리에테가 그의 커다란 어깨를 주먹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퍽퍽!
“밑까지 닦아준 사이에 네가 뭐라 하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만! 이건 너무한 처사다! 취소해라! 여자가 아니라니! 그럼 뭐로 보이느냐!”
“아야, 아프다. 때리지 마라.”
하지만 파이는 이상한 말을 들어버린 바람에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미, 밑을 뭐, 어떻게… 한… 사이라고요?”
“음, 그거, 말인가?”
크랭크를 두들기던 아리에테가 고개를 돌리고 구출 직후에 크랭크의 공방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비틀거리던 파이는 그만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다 끝났어…….”
“뭐가 말이냐?”
“뭐긴 뭐야! 네 순정이지! 세상에!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 거야, 너는! 크랭크! 당신이 책임지세요! 우리 아리에테를 아내로 삼아주셔야겠어요!”
“무…! 뭐 그런 거 가지고! 나는 신경 쓰지 않아! 팔다리를 달아 준 것 만해도 감사할 지경이다! 너는 의사에게 진찰받기 위해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냐!”
둘은 이제 방안에서 말싸움을 시작했다. 투구를 붙잡은 크랭크는 귀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자에 앉아서 그걸 가만히 쳐다보던 오토마톤 중에서 캐롯이 뿌하하 웃어댔다.
“와, 너희들 재미있다. 좀 더 해봐. 이거 돈 받고 보여줘도 될 것 같아.”
결국 말싸움을 승리자는 아리에테가 되었다. 파이는 도무지 앞뒤가 꽉 막힌 그녀의 고집과 주장을 꺾을 수가 없었다.
“이제 밥 먹으러 갈 건데.”
“나는 됐어. 너 때문에 혈압이 올라서 좀 쉬어야겠어…….”
“알았다. 도시락이라도 사 오도록 할게.”
수건을 얼굴에 덮고 침대에 쓰러진 파이와 그 호위로 로테와 베누스를 남겨 놓은 채 그들이 찾아간 곳은 식당이었다.
“여기는 수플레가 맛있다.”
자리에 앉은 아리에테가 드물게 환하게 웃는다. 호위 겸 식당에 따라온 캐롯이 그녀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크랭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팔팔하게 생기 돌지 않아? 아리에테.”
“당연하다. 개도 자기 집 앞에서 싸우면 쉽게 물러서지 않아.”
“나는 개가 아니다!”
“맞아, 사람한테 개가 뭐니.”
“예를 든 것일 뿐이야. 주문하자. 배고프다.”
그러고 있는데 저쪽에서 왁자지껄 시끄럽다.
“아악! 못 이기겠어!”
“이 영감님, 장난이 아닌데?”
“으흐흐흘! 젊은이들, 이 정도 뿐인가?”
“뭐야? 뭐?”
짧은 환호와 탄성이 멈추지 않았기에 호기심이 생긴 캐롯이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막상 가서 보니 낮의 그 노신사가 장기판을 펼쳐 놓고 앉아있었다. 메이드 오토마톤을 곁에 세워놓고 붉은 색안경을 빛내며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권좌에 앉은 끝판왕 같은 모습이어서 용사를 자청한 사람들의 도전이 멈추질 않았다.
마주 앉은 젊은이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장기 말을 옮겼는데, 바로 보이드 자작에게 잡혀버렸다.
“와! 이 영감님 쎄!”
“나도! 이번엔 나야!”
사람들이 밥 먹다 말고 장기판에 덤벼드는 것을 한심하게 여긴 캐롯은 몸을 돌렸다.
“그런 오락보다는 밥부터 먼저 챙겨 먹으라고.”
그때 캐롯의 귓가로 보이드 자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없는가? 누구든 10분 버티면 소원 하나를 들어주지.”
“오옹?”
캐롯의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그리고 뒤를 휙 돌아보았다.
“캐롯이 안 오네.”
“이 수플레 참 맛있구나.”
“오! 그렇지? 너도 그 맛을 알아주는구나!”
아리에테가 좋아했다. 5개째 수플레를 퍼먹고 있던 크랭크가 옆에 들리는 소음에 투구를 들었다가 접시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거, 캐롯 같은데?”
“응?”
자리를 옮겨보니 보이드 자작의 앞에 어느새 캐롯이 두 손을 올린 채로 앉아서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건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쪽과 이쪽으로 갈 수 있지.”
보이드는 낄낄 웃으며 말을 옮기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에 따라 말을 옮겼지만 바로 가로막혔다. 머리를 붙잡고 뺙 소리를 지르는 캐롯을 내려다보며 보이드 자작이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다가 다가온 크랭크를 보고는 말했다.
“마차 바퀴 달아 준 친구로군. 이 녀석이 자네 오토마톤인가?”
“그렇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버릇없게 보였군요.”
크랭크가 슬쩍 접시를 내리며 말하자 보이드 자작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 하지만 불은 당기지 않았다.
“괜찮네. 낮에는 고마웠어. 자네, 이름이 뭔가?”
“모험가 크랭크입니다.”
보이드는 대답 없이 손가락으로 캐롯을 가리켰다. 크랭크는 캐롯의 이름도 가르쳐 주었다.
“넘어진 마차 안에서 보았지. 참 잘 싸우더군. 덕분에 살았어. 그런데, 왜 이토록 사람처럼 만들어놓았는지 물어도 되겠나?”
잠시 말이 없던 크랭크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귀를 의식해서 적당히 둘러댔다.
“솔직히 어찌 되나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좋아하더군요. 이 녀석이.”
“너는 왜 인간처럼 되고 싶었더냐? 인형은 인형다워야 인형답단다.”
머리를 싸매고 장기판을 내려다보던 캐롯이 대답했다.
“그걸 우릴 만든 인간님들이 바랬대요. 이건, 어디로 갈 수 있다고 하셨어요?”
다리를 꼬고 팔을 의자의 팔걸이에 걸치고 있던 보이드 자작이 웃었다.
“그건 상대의 말을 뛰어넘을 수 있다. 내가 듣기 싫은 소릴 한 것 같군. 사실 난 오토마톤의 그 소프트 스킨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오랜 친구 하나가 그거에 홀딱 빠져버렸거든.”
“자세히 여쭤도……?”
그가 담배를 입에 물고 고개를 돌리자 석상처럼 서 있던 오토마톤 메이드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불꽃이 피어오른다.
팍-! 촤아악!
성냥!
오로지 희소성과 그 특유의 초연에서 느껴지는 풍미 때문에 일부 애연가들이나 사용하는 특이한 발화장치가 선보이자 크랭크는 물론 지켜보던 구경꾼들의 눈이 커졌다.
깊게 연기를 빨아들인 보이드 자작이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프후흐으……! 죽은 자기 마누라와 똑 닳은 소프트 스킨 오토마톤을 만들었지. 그 부인은 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어. 어찌나 똑같던지. 보자마자 소름이 돋아버렸지. 꼭 그렇게 해야 하나 싶었어. 대판 싸웠지.”
뭔가 많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크랭크였다.
“그분은?”
“죽었어. 복상사로.”
주변에 몰려와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중 몇몇은 화를 내기까지 했다.
“내 감동 물어내!”
“아!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려고 해!”
“대체 이 거지 같은 기분은 뭐야?!”
장기를 두던 캐롯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복상사가 뭐야? 응? 처음 듣는데?”
“너는 몰라도 된다.”
아리에테가 캐롯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말씀을 가려주십시오.”
“킬킬킬, 말을 가리라니, 이 꼬마는 오토마톤이 아닌가? 사실 자네가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고?”
재떨이에 담뱃재를 턴 보이드 자작이 몸을 의자에 편히 기댔다. 테이블에 올린 손가락에는 여전히 굵은 담배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
그 연기 속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두려움과 찬양을 한 몸에 받으며.
마치 마왕 같은 분위기의 노신사가 붉은 색안경을 낀 채로 입을 열었다.
“사람은 말이야. 같은 사람을 보듬고 사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 * *
결국 장기 마왕에게 패배한 캐롯은 다음 차례의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며 아리에테가 중얼거렸다.
“보이드 자작의 말이 신경에 거슬리는군.”
“왜?”
“타 종족을 배려하지 않은 말로 해석할 수 있다.”
크랭크의 뒤를 쫓던 캐롯이 말했다.
“아리에테, 사전적인 의미에서 사람은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래.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그게 사람이래.”
말을 하던 캐롯이 놀란 얼굴을 하고 멈춰 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볼을 감싸며 환하게 웃었다.
“오옥! 그러면! 그러면! 오토마톤도 사람 아냐? 그 범주에 들어가는 거 아냐? 나는 사람인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