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장. 어둠의 시험(1)
[ ‘흘린 피는 흐르는 피로.’ ]
- 분류 : 무용담(E)
- 권능 : 죽음
- 내용 : 그의 검은 피를 머금을수록 강해질지니.
- 효과 : 적에게 입은 상처에 비례하여 공격력이 최대 1,000% 상승합니다.
마검을 쓰러트린 덕에 얻은 무용담.
신화적 존재의 시험을 통과해서인지 처음부터 등급이 높았다.
단군의 말대로 현재 북유럽은 새로운 힘을 얻기에 최적인 땅이었다.
“하아아…….”
그제야 긴장이 풀려 긴 숨을 토해 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사라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눈을 크게 뜬 그림 리퍼, 미간을 좁힌 채 입술을 달싹이는 호구별성이 차례로 보였다.
스스로 끼어들 일이 아니라는 듯 조용히 서 있는 단군과 바리를 지나, 나는 가늘게 흔들리는 검푸른 시선과 마주했다.
언제나와 같이 불안이 고름처럼 맺힌 눈이었다.
내가 무작정 마검에 달려들었다고 여겼을 터였다.
분명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끔찍한 기분을 느꼈으리라.
그럼에도 형이 입매를 단단히 굳히고서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당장 틀어막고 있는 것은, 우리가 몇 번이고 똑같은 이유로 부딪쳤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한 최선을 형이 용납하지 못하고 서로를 상처 입히는 것.
늘 반복되어 온 순간을 상기하며 나는 담담히 그의 시선을 받아냈다.
“정말이지, 너는 안 그렇게 생긴 녀석이 앞뒤를 가리지 않는 구석이 있어.”
사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파아아앙!
그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새하얀 빛이 전신을 감싸고, 피에 젖은 몸 위로 색색의 꽃잎이 피었다.
서천의 신성이 부드러이 상처를 어루만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네가 그리 나설 때는 매번 난관을 타파할 묘책이 있었지.”
여느 때처럼 무심한 목소리로 그는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보여준 것이 있으니 믿고 따른다만, 그래도 달려들기 전에 말은 좀 해줬으면 좋겠구나.”
편을 들어주는 동시에 가벼운 타박이 이어졌다.
그러자 호구별성도 어느 정도 진정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라 덕분에 경직된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그래, 뭐. 마검도 귓구멍이 있으니 대놓고 작전을 까발리기는 곤란했겠지.”
여전히 내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와 별개로 내가 다짜고짜 움직인 것을 이해한다는 태도였다.
“Oh, 나는 그냥 굉장했어, 킹. 검을 정말 잘 쓰던걸? 그 유명한 마검을 상대로 말이야!”
호구별성과 나란히 선 그림 리퍼가 유쾌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들은 사라의 의도에 맞춰 내가 잘했다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었다.
상냥한 신들이었다.
그러나 부러 가벼이 말을 건네는 그들과 달리 형은 짙푸른 눈으로 나를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름과도 같은 상실에 대한 불안.
한때는 그 불안이 나를 압박하고 짓누르는 서슬 퍼런 분노라고 생각했다.
형이 나를 보호하려는 마음만 앞세우느라 내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여겼다.
-뭐, 놈도 생각이 많아진 것이 아니겠느냐.
-새 왕이 이룬 것을 마냥 기꺼워하기엔, 앞으로는 또 무슨 일을 하려고 들지가 두려운 게지.
그러나 이제는, 지금 나를 안온하게 해주는 이들의 목소리마저도 형에게는 또 다른 불안이 될 수 있음을 안다.
형은 나의 패배를 두려워하는 만큼 나의 승리 또한 두려워한다.
피 흘려 승리하는 왕보다도, 자신의 품에서 아무 위험 없이 보호받는 막냇동생을 바란다.
그것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한 밤이 형에게 흉터처럼 남긴 사랑의 방식이었다.
“형.”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형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또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예전이었다면 형이 나서기 전에 먼저 상황을 정리해주는 사라 뒤로 숨어버렸겠지.
우리가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면 그게 최선인 줄 알았으니까.
다만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던 밤을 형과 함께 극복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서로에게 무탈히 돌아와야만 한다.
“앞으로도 저는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품고 나설 거예요.”
그리고 종래에는 형도 확신하게끔 만들 것이다.
덧붙이고 싶은 말을 애써 삼키면서 형의 대답을 기다렸다.
“염병,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모르겠네.”
쉽게 답하지 못하는 형 대신 호구별성이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대왕님 덕분에 목숨 부지했다고 절을 올려도 모자랄 판에 대체 뭐가 문제야, 저놈은.”
이어지는 비난에 형이 도끼눈으로 호구별성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그러거나 말거나 심드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흐음, 한데 새로 생긴 무용담이란 것이 마냥 좋게만 보이지는 않는구나.”
지켜보던 사라가 천천히 화제를 돌렸다.
호구별성처럼 내게 쉬이 잘했다고 하지 못하는 형을 배려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느끼면서도 새로이 오른 화두가 날카로워 멋쩍게 웃었다.
“적에게 입은 상처가 깊어질수록 공격력이 강해진다니. 그런 걸 쓰는 너는 떠올리기만 해도 피곤해져.”
사라가 새로운 무용담의 효과를 꼬집으며 혀를 찼다.
쓰지 말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함에도 수천 년의 현기가 깃든 눈과 마주친 순간,
사라는 내가 새 무용담을 쓰게 될 언젠가를 예각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업경의 권능이 그의 감정을 비추는 것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말하자면 모르는 사이 서로를 향해 쌓아 간 믿음이라고 해야 할까.
왕과 차사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이라는 신뢰와 다짐.
그것을 실감하며 나는 마땅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무용담을 함부로 사용하는 일은 없게 할게요.”
그리 대답하자 사라는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근데 이거 마검을 쓰러트렸는데도 딱히 반응이 없네? 시험인지 뭔지 이제 끝난 거 아냐?”
대신 호구별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의문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마검에 이어 두 번째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사이 재차 빛나는 문자열에 둘러싸인 단군이 차분하게 답했다.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당신의 활약에 감탄합니다. ]
때마침 새로운 팝업창이 떴다.
“야, 이놈 새끼야! 누굴 죽이네 마네 하는 게 재밌었냐?”
호구별성이 곧장 삿대질을 했다.
……그러는 본인도 변덕에 따라 병을 내리던 역신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일순 들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 (!) ‘3,500’ 드라실을 후원받았습니다. ]
그런데 두 번째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드라실의 후원이 이어졌다.
“이건 또 뭐야! 6천 준다며! 왜 반밖에 안 줘!”
다음 시험이고 뭐고 호구별성은 독기를 뿜으며 더욱 사나운 기세로 세계수를 추궁했다.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이번에는 보너스라고 말합니다. ]
“보너스는 또 무슨 헛소리야!”
그녀가 팝업창을 만질 수 없다는 사실에도 괘념치 않고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 이번에도 신경 쓰이는 액수로군요, 염라. ]
그때 단군이 전음을 걸어 왔다.
[ 네, 역시 일곱 명에 딱 떨어져요. 푯값이 500드라실인 세계라면 문제없이 이동할 수 있겠죠. ]
나는 곧바로 수긍했다.
[ 저 세계수의 뿌리는 이 땅을 양분하고 있는 세력이라고 했지. ]
사라가 전음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 이런 식으로 능력을 시험한 뒤 각 세계에서 무언가를 요구할 셈이로구나. ]
[ 용병을 찾는다는 추측 그대로군. ]
강림 형도 탐탁지 않은 어조로 말을 보탰다.
“이번 보상이 보너스라는 건 아직 늑대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죠. 그다음은 뭔가요?”
나는 호구별성의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이제 어둠의 시험이 이어질 차례라고 말합니다. ]
“어둠의 시허엄?! 늑대의 시대보다 더 구린 게 있었어!”
괴악한 네이밍 센스에 지체 없이 호구별성의 타박이 이어졌다.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신화의 시대에는 멋있는 말이었다고 변명합니다. ]
민망한 마음을 표현하듯 팝업창이 희미하게 깜빡거렸다.
“아주 소름이 다 돋네, 진짜!”
그게 더 짜증스러운지 한껏 인상을 구긴 호구별성은 다시 한번 세계수와 말싸움을 벌였다.
나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팝업창을 훑어보았다.
팝업창까지 빛내 가며 능청스레 굴고 있지만, 정체 모를 자가 우리의 이용 가치를 판단하고자 시험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없었다.
머리를 냉정히 가라앉히며 마검의 시험을 통해 얻은 무용담을 상기했다.
그쪽에서 우릴 시험한다면 우리 또한 그걸 이용할 뿐.
“그럼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다음 시험을 시작하죠.”
호구별성을 상대로 네온사인처럼 현란하게 팝업창을 반짝이던 세계수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상적인 메시지를 띄웠다.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당신의 호방함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
역시나 내려다보며 평가하는 태도였다.
[ (!) 어둠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
새로운 팝업창이 떴다.
쿠우우웅!
곧바로 큰 소리가 울리며 발밑이 작게 흔들렸다.
다리 밑에서 힘차게 절벽을 때려 대던 검은 바닷물이 삽시간에 솟구치며 거대한 회오리를 이룬 것이다.
물기둥만이 아니었다.
매섭게 요동치는 바다는 다리마저 덮칠 수 있을 정도로 파도가 드높아졌다.
“야이씨, 갑자기 맵이 지랄맞아지네?!”
호구별성이 고개를 홱홱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공간의 인과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단군도 허공을 흐르는 문자 사이에서 경고했다.
“짐승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대왕님.”
강림 형이 내 곁에 바싹 붙으며 말했다.
-아우우우우!
파도가 불길하게 고조되는 때 어딘가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왜 늑대 소리가 들리지?”
그림 리퍼가 굳은 얼굴로 파도를 돌아보았다.
-아우우우우우!
짧은 사이 고층 빌딩 수준으로 몸집을 불린 검은 파도는 맹수의 아가리처럼 사방을 물어뜯으며 다가왔다.
불안을 가중하는 짐승의 울음 역시 파도와 함께 빠르게 가까워졌다.
하여 기어이.
“Fucking!”
파도를 뚫고 나타난 산만 한 덩치를 올려다보며 그림 리퍼가 욕설했다.
“저 커다란 늑대 둘이 이번 시험관인가?”
한 쌍의 늑대였다.
단순히 커다랗다는 말만으로는 그 불길함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다.
용조차 집어삼킬 덩치와 무엇이든 박살 낼 수 있을 만큼 크고 날카로운 이빨.
빳빳하게 선 털은 마치 검은 철심을 빽빽하게 박아놓은 것만 같았다.
세상 전체를 씹어 삼킬 듯한 두 늑대의 위용에 나는 단박에 그것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스콜과 하티…….”
태양과 달을 잡아먹었다는 두 마리의 늑대.
마침내 어둠의 시험관이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우우우우우!
음산한 울음소리와 함께 두 늑대가 크고 새까만 아가리를 벌렸다.
그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주변이 무(無)로 지워지기 시작했다.
“……!”
먹물을 뿌린 양 칠흑으로 뒤덮인 시야에 눈을 크게 떴다.
눈을 덮는 어둠과 살갗에 닿는 한기가 어째서인지 낯설지 않다고 느끼는 찰나.
어둠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면서 눈앞의 풍경이 상(像)을 갖춰 나갔다.
“아…….”
머리 위로 드리우는 고운 처마에 작게 탄식했다.
곧게 뻗은 기둥과 화려한 단청이 아플 만큼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무너져버린 염라의 궁궐이었다.
“이거였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걷던 돌길을 내디디며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어둠의 시험이란 결국…….”
청공에서 흑암지옥의 함정에 빠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어둠은 내 눈을 가리고 나를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어느 날에 가두었다.
이 가슴 아픈 광경을 만들어 낸 세계수의 어둠도 본질은 흑암지옥과 같았다.
마검의 시험은 빈틈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 동료를 희생시켜야 하는 구조였다.
그 직후 마주하는 것이 자신의 어둠이라면, 수험자는 버틸 수 있을까.
마검과 어둠의 시험을 설계한 세계수의 주인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기에 이토록 마음을 헤집는 시험을 안배한 것일까.
그런 생각에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염라궁을 돌아볼 때였다.
-막내야, 거기 있었구나.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올려진 공간에 그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직시해야 할, 무엇보다 아프고 사랑스러운 과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