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82화 (182/187)

52장. 마검의 시험(2)

죽음의 무도.

일대의 모든 적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광역기가 펼쳐졌다.

검은 초승달을 그리는 사신의 낫에 병사들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아아아.

아아아아아.

아아아아.

그런데 어째선지 귀곡성이 불길하게 울려 퍼지더니, 갈기갈기 조각났던 병사들이의 몸이 저절로 이어 붙었다.

“뭐야, 왜 안 사라져?!”

융합 풍문의 효과가 끝나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호구별성이 깜짝 놀라서 독기를 뿜었다.

아아아아.

아아아아아.

되살아난 병사들은 또다시 녹슨 검과 피로 물든 철퇴를 휘두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달려들었다.

앞서 죽음의 무도를 펼친 의미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화르르륵!

다시 한번 불의 벽이 솟아올랐다.

“이것으로 확실해졌군요. 병사들에게는 특별한 인과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들을 막아낸 단군이 재차 휘도는 문자열 사이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마검 다인슬라이프의 전설이라고 해야 할까요.”

마검 다인슬라이프.

피를 보기 전까지는 갈무리할 수 없으며, 검에 입은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는다는 불길하고 위험한 검.

그제야 단군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했다.

이 검의 주인 회그니는 자신의 사위와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장인과 사위의 병사들은 낮에 죽어도 밤이 되면 부활하는 저주에 걸려 영원히 전장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 저주의 인과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니…….”

낭패감에 주먹을 쥐었다.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 일어나는 적과 싸운 경험은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라 한들 죽음의 무도쯤 되는 강력한 화력 앞에서 마냥 무사하진 못했는데.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그사이에도 힘을 소모한 단군의 불의 벽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흔들렸다.

“공간의 인과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만 저주가 작동하는 이상 전면전은 아군의 손해입니다.”

단군이 시야에 떠오른 문자열을 끊임없이 해석하며 말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다인슬라이프의 시험을 통과하는 조건을 알아낼 때까지 계속 소모전을 벌이는 것은 하책이다.

“……저들의 시선을 돌려야 해.”

절로 스치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유해교반에서 남해 용왕을 쓰러트렸을 때, 내게 생겨난 새로운 지옥 스킬을 상기했다.

[ 흑암지옥(L) ]

나를 가두었던 것처럼, 어둠으로 대상의 눈을 가리는 스킬이었다.

화르르르륵!

불안하게 흔들리던 불의 벽이 끝내 갈라졌다.

무기를 든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제기랄!”

“조심하십시오, 대왕님!”

더 이상 마력이 없는 호구별성이 욕설을 내뱉었고, 강림 형은 검푸른 신성을 끌어 올리며 내 앞에 섰다.

콰르르르!

바리의 주변으로 곳곳에서 나뒹굴던 다리의 파편들이 솟구쳤다.

흙을 다루는 권능을 이용해 그녀 역시 전투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더는 망설일 틈이 없었다.

“제가 저들의 눈을 가리겠습니다.”

망령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 흑암지옥(L) ]

열 번째 지옥의 힘이 시커먼 넝쿨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흑암의 넝쿨은 양쪽에서 달려드는 병사들에게로 각각 뻗쳐 나가며 그들을 크게 휘감았다.

직후 가시덤불 감옥에 사로잡힌 이들의 움직임이 일순 느릿해지는가 싶더니, 감옥을 이루고 있는 지옥의 어둠이 검디검은 신성을 발했다.

아아아.

아아아아아.

아아아아.

흑암지옥의 어둠에 갇힌 병사들이 귀곡성을 내질렀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병사들에게 집중했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흑암의 감옥에 발이 묶인 채 저들끼리 병장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야, 효과 좋은데?”

호구별성이 유쾌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계속 저렇게 가둬 둘 수 있다면야 편하겠다만…… 대왕, 너는 괜찮은 게냐?”

사라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숫자를 전부 묶으려면 네게도 부담이 상당할 텐데.”

펼쳐 놓은 어둠으로부터 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업경과 비슷하게 저들의 혼란이 느껴지기는 합니다만, 생각보다 견딜 만해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업경은 대상의 본질을 비춰 내가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흑암지옥의 어둠은 대상에게 무엇을 보여주는지를 나도 함께 느끼게 한다.

예컨대 지금 흑암지옥은 죽지도 못하고 영원토록 싸워야 하는 그들에게 억겁의 세월을 싸워 온 전장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끔찍한 환상이었고, 가급적 느끼고 싶지 않은 어둠이었지만 더 큰 위험을 피하기 위해 감수할 만큼은 되었다.

“한 번 어둠을 전개한 뒤로는 추가적인 마력 소모도 없고요. 공략법을 찾을 때까지 유지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염려 마세요.”

나는 병사들이 보는 환상에 이입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리 말했음에도 사라는 나를 한참 더 주의 깊게 살핀 후에야 한숨을 내쉬며 눈을 뗐다.

“병사들을 움직이는 것은 비단 저주만이 아니었군요. 저들을 둘러싼 또 하나의 인과가 느껴집니다.”

조금 전보다 더욱 늘어난 문자열.

그 가운데서 단군이 양측에 자리한 성을 하나씩 가리켰다.

“인과의 근원은 두 성 모두이고요.”

파아아앙!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검푸른 신성이 맹렬한 기세로 오른쪽 성벽을 덮쳤다.

강림 형이었다.

“아니, 그걸 무식하게 냅다 들이박는다고?”

호구별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

“이야, 여전히 화끈한 친구로군!”

그림 리퍼는 반갑게 외치며 밝게 웃었다.

형은 이백 년 전 동서양의 자존심을 걸고 다투었을 때도 저랬나 보다.

파아아앙!

파아아아앙!

파아앙!

발설지옥의 신성이 연거푸 성벽을 두들겼다.

성의 파편들이 먼지와 뒤섞여 아무렇게나 튀었다.

쩌어어억!

마침내 성벽에 기다란 금이 갔다.

거대한 성벽과 비교하면 나뭇가지 수준의 틈이었지만, 그 사이에서 무엇이 흘러나오는지는 분명하게 보였다.

언뜻 피처럼 보이는 붉고 질척한 액체였다.

부서진 성벽이나 갑옷 따위의 조각이 붉은 액체를 따라 벽을 타고 떨어져 내리며 바닥에 웅덩이를 그렸다.

마치 상처에서 피와 살점이 함께 흐르는 듯 보일 만큼 가혹한 모습이었다.

“오, 뭔진 몰라도 정답인 것 같군. 딱 봐도 불길하잖아?”

그림 리퍼가 그 광경을 가리키며 능청스럽게 손을 떨었다.

“왼쪽 성은 제가 맡을게요!”

바리가 곧바로 몸을 틀고 두 팔을 뻗으며 외쳤다.

“뒤를 대비해 오빠와 단군은 힘을 비축해 두시는 게 좋겠어요!”

콰르르르!

다리 위에 흩어진 돌 조각들이 끓어오르듯 하나둘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파편들은 금세 우리의 키를 훌쩍 넘는 곳까지 올라가서는 대량의 탄환처럼 왼쪽 성벽을 향해 강하게 쏘아졌다.

콰르르르르!

처음부터 힘을 아끼지 않은 바리의 권능으로 성벽에 수많은 구멍이 뚫렸다.

오른쪽 성과 같았다.

왼쪽 성 역시 구멍 하나하나에서 핏빛 액체를 쏟아 내며 하나의 웅덩이로 모였다.

[ (!) 마검 다인슬라이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

팝업창이 떴다.

점점 커져 가는 두 개의 수렁에서 무언가가 각각 출렁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조금씩 갖춰지는 형상으로 짐작건대 로브를 뒤집어쓴 수도사 같았다.

얼굴은 후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길게 흘러내린 소매와 로브 자락이 느릿하게 바닥을 쓸었다.

그것의 움직임은 걷는다기보다는 유령같이 떠다니는 것에 가까웠다.

양측에서 동시에 모습을 갖춘 두 존재는 거울을 맞댄 양 똑같았다.

“저게 마검이야?”

호구별성이 인상을 썼다.

“검으로는 전혀 안 보이는데?”

그녀가 그렇게 평했을 때였다.

두 존재가 서로의 앞에 마주 서는 찰나.

한쪽이 녹아내리며 피로 빚은 듯 붉디붉은 검으로 변했다.

검은 두둥실 떠올라 다른 한쪽의 손에 쥐어졌다.

짙붉은 로브를 두른 채 핏빛 검을 쥔 수도사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휘오오오오.

인간의 형태로 현신한 마검을 중심으로 싸늘한 바람이 불길하게 휘몰아쳤다.

로브 안에서 한 쌍의 적안이 빛을 발하는 순간.

촤아아아악!

눈 깜짝할 새 휘둘러진 검에서 흉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악!

사나운 검기가 다리 위로 선명한 검흔을 새겼다.

“염병! 저게 마법사야, 검사야!”

검기가 할퀸 흔적을 쏘아보며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었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검기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콰가가각!

콰가가가각!

다리가 깎여 나가는 한편 파편이 쉴 새 없이 튀었다.

“표적이 분명하니 편하군.”

검기를 피해 뛰어오른 강림 형이 두 팔에 신성을 둘렀다.

파아앙!

파아아아앙!

파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몇 번이고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폭격 그 자체나 다름없는 발설지옥의 신성에 마검의 현신은 형편없이 짓뭉개졌다.

로브를 쓴 수도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어느새 피 웅덩이뿐이었다.

“해치운 거야? 의외로 간단…… 뭐야?!”

지켜보던 호구별성이 눈을 부릅떴다.

-그으…… 그으으으.

끓어오르는 듯한 숨소리가 기괴하게 울려 퍼지며 다시금 수도사의 로브가 핏빛 수렁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촤아아아악!

가공할 속도로 휘둘러진 검격으로부터 모두가 다급하게 몸을 물렸다.

“Fucking! 죽여도 되살아나는 건 저 친구도 마찬가지잖아!”

그림 리퍼가 허탈하게 외쳤다.

“아, 이런.”

곧이어 단군이 나지막이 탄식했다.

읽어야 할 것을 모두 읽었는지 그를 둘러싼 문자열이 천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마검에 하나 이상의 목을 내놓을 것. 그것이 부활의 저주를 멈추는 조건입니다.”

“뭐?!”

이어진 설명에 호구별성이 경악했다.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저걸 죽이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희생해야 한다는 거야?”

“피를 보아야만 갈무리된다는 마검 다인슬라이프. 그 전설이 그대로 실현된 시험입니다.”

단군의 설명 뒤로 낭패감 어린 침묵이 깔렸다.

촤아아아아악!

그 와중에도 수도사가 휘두른 마검에서는 막대한 검기가 불어닥쳤다.

콰가가각!

검기가 스쳐 지나간 자리가 재차 부서져 나가며 다리가 약하게 진동했다.

“그렇다면 저것을 계속 공격해 봤자 소용없겠구나.”

사라가 침음했다.

“흑암의 힘으로 눈을 가린다 한들 이 공간을 빠져나갈 수는 없을 테지.”

“염병! 그렇다고 진짜 목을 바칠 수도 없잖아!”

호구별성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촤아아아악!

멈추지 않는 마검의 압박.

그것이 발하는 사악한 검기는 직접 베이지 않아도 위협적이었다.

저 정도면 가까이에서 검을 맞대는 것만으로 온몸이 너덜너덜해질지도 몰랐다.

그러니 마검과의 근접전은 무모한 행위가 분명한데…….

“……마검에 하나 이상의 목을 내놓을 것.”

단군이 언급한 조건을 곱씹었다.

-조금 전 기도를 드리면서 당신과 헬이 독대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앞서 그가 건넨 예언이 잇달아 머릿속을 스쳤다.

“단군.”

나는 선연한 핏빛으로 이어진 길을 응시하며 그의 이름을 주문처럼 읊었다.

“당신은 나와 헬이 만나는 것을 봤어요. 즉, 나는 마검에게 죽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뭐어?!”

단군이 답하기도 전에 반응한 것은 호구별성이었다.

“잠깐, 전하, 너 설마……!”

“대왕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대왕, 쓸데없는 생각 말거라.”

직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날 돌아본 강림 형과 사라의 목소리가 호구별성 위로 겹쳐졌다.

“걱정 마세요.”

별다른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단군과 짧게 눈을 맞춘 후 그대로 돌아섰다.

“정말로 목을 바치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마검을 향해 짓쳐 들었다.

채애애앵!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눈부신 빛무리를 일으켰다.

채애애앵!

채애애애앵!

‘죽음’과 마검이 사정없이 뒤엉켰다.

우리를 중심으로 흉포한 기가 폭풍같이 휘몰아쳤다.

파아아아악!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그어지는 자상에 몸은 금세 피로 뒤덮였다.

검을 섞을 때마다 검과 검의 공방(攻防)과 상관없이 살갗이 터져 나갔다.

하나 이상의 목을 바쳐야만 없앨 수 있는 검.

마검에 직접 맞서는 자는 혹시 이런 식으로 끝없이 베여 죽는다는 의미였을까.

뭐든 상관없었다.

“크윽……!”

고통을 삼켰다.

공방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죽지 않는다.

그리 확신하는 이상 고통 따윈 물러설 이유가 되지 못했다.

파아아앙!

그때 피로 물든 살갗 위로 하얀 꽃잎이 피어올랐다.

“…….”

서천의 신성이었다.

【내가 엄호할 테니.】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서천꽃감관의 신언이 들려왔다.

【왕께서 뜻대로 하시도록 지켜보아라.】

붉은 핏방울 사이로 번지는 색색의 꽃잎.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신하가 나에게 바치는 신뢰.

나를 가호하고,

내 무모한 싸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차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힘.

멋대로 미소가 새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두 팔과 다리에 더욱 힘을 실었다.

채애애애앵!

거듭 검이 부딪치는 찰나.

파아아아악!

재차 갈라진 살갗에서 피가 터지는 것을 무시한 채 나 또한 스킬을 시전했다.

[ 흑암지옥(L) ]

‘죽음’에 휘감긴 흑암의 어둠이 두툼한 넝쿨을 내뻗으며 마검의 현신을 덮쳤다.

수도사는 로브째 몸이 옥죄이고 혈기 짙은 마검까지 움직임이 멎었다.

흑암지옥의 어둠이 사로잡은 대상의 기억을 파고든다.

대상이 영겁의 세월 동안 빨아들여 온 피의 전장을 빚어낸다.

-그으으…… 그으으으.

구속당한 채 보고 싶지 않은 환상이 강제된 마검은 괴로운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나는 마검의 끔찍한 환상으로부터 눈을 돌리며 현신이 쥔 붉은 검을 빼앗았다.

“목을 바치는 것이 꼭 우리일 필요는 없겠지.”

촤아아아악!

손에 쥔 붉은 검으로 주저 없이 현신의 목을 갈랐다.

출러어엉!

마검은 제 현신의 목을 잘라 낸 즉시 질척한 핏물로 화했다.

온몸으로 튄 피에 검을 쥐었던 내 손은 물론이고 시야마저 붉게 젖었다.

[ (!) 마검 다인슬라이프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

[ (!) 당신의 카르마에 따라 ‘무용담(E)’이 완성되었습니다. ]

새로운 무용담을 알리는 팝업창이었다.

52장. 마검의 시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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