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71화 (171/187)

48장. 종말이 찾아올 땅으로(1)

“으음…….”

코에 무언가 닿는 느낌에 살며시 눈을 떴다.

너무 가까워서 초점이 흐릿했지만 내 작은 친구를 알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잠결에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다가 따끈한 이불에 좀 더 파고들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왕자님.”

내 인사에 코를 맞대었던 막내 왕자가 지느러미를 활짝 폈다.

-좋은 아침이오, 염라!

들뜬 목소리로 마주 인사해 온 고등어는 동그란 눈으로 이불에 파묻힌 나를 바라보다가, 내 주변을 뱅글뱅글 헤엄치기 시작했다.

-피곤하시면 더 주무시오. 식사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나를 깨우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을 터였다.

그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기에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보드에 기대앉았다.

작은 고등어는 구애의 춤이라도 추는 양 내 곁을 빙글빙글 돌며 지느러미를 팔랑였다.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왕자의 모습에 다시 한번 웃음이 샜다.

“오늘도 아침 식사 후에 서해 용왕님의 수염 속에서 숨바꼭질을 할까요?”

그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체하며 물었다.

고등어는 그제야 원을 그리던 움직임을 멈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으응? 또 하고 싶소? 어제도 했는데?

막내 왕자가 모르는 척 소심하게 지느러미를 접었다.

“어제도, 그제도 저는 무척 즐거웠거든요.”

용궁에 돌아온 후.

본체로 돌아간 서해 용왕의 수염 속에서 오전마다 고등어 왕자와 시간을 보냈다.

용왕의 풍성한 수염은 몹시 부드러운 데다 무척이나 길었다.

그 안에 있으면 마치 작은 해류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결 하나하나가 은빛으로 빛나는 해류 안에서 나는 자그마한 고등어 왕자를 찾는 술래가 되었다.

사실 업경의 권능을 사용하면 어딨는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래도 작은 고등어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이 물결을 타고 전해지는 게 귀여워서, 나는 적당히 헤매는 척하다 그가 방심한 사이 단숨에 찾아내는 연출을 펼치곤 했다.

그때마다 왕자는 빠짐없이 깜짝 놀랐으니, 내 연기가 나름 괜찮았다는 거겠지?

옛날에 동생들과 놀아줄 때도 못된 괴수 역할을 잘 해냈으니까.

-그대가 좋으면 나도 좋소, 염라!

수염 숨바꼭질을 할 생각에 신이 난 고등어가 한층 빠르게 지느러미를 팔랑였다.

저기서 조금만 더 빨라지면 벌처럼 붕붕 소리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놀려면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지! 그럼 이따가 식당에서 뵙겠소, 염라!

목적을 달성하고 기쁘게 내 방을 나서는 고등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슬슬 침대에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동해 용궁으로 돌아온 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물거품으로 남해 용왕을 물리침으로써 유해교반 퀘스트는 끝이 났고, 내게는 바다의 신화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전설이 생겼다.

한반도의 모든 바다를 지배한다는 효과를 지녔음에도…… 결코 사용하고 싶지 않은 전설이.

***

용궁의 왕족들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

길고 거대한 식탁의 오른편에는 그간 익숙해진 대로 나를 비롯한 왕족들의 자리가, 반대편에는 차사들과 왕족 아닌 이들의 자리가 지정되어 있었다.

“전하, 잘 잤어?”

먼저 앉아 있던 호구별성이 숟가락으로 접시를 긁으며 말했다.

식당에 내려오는 게 조금 늦었다 싶었는데, 아직 음식은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째 일어나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지는구나. 모처럼의 여유이니 푹 쉬고 싶은 것이라면 상관없다만 혹시 피로감이 지나치다면 말하거라.”

사라는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기울이며 말을 건넸다.

남해 용왕이 내 혼을 한 번 들쑤신 이후 그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줄곧 내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피로감이라.

그런가?

아직은 잘 모르겠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내 자리에 앉았다.

바로 맞은편에 앉은 강림 형은 서늘한 눈으로 나를 짧게 살피고는 고개를 숙이며 내 몫의 차를 따라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형.”

형은 내 인사에 거듭 묵례한 후 무표정한 얼굴로 내 주변의 식기를 훑어보았다.

내게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찾는 듯했다.

“하루 종일 밥 먹을 시간만 기다린다니까.”

강림 형의 옆에 앉은 그림 리퍼가 쾌활하게 말했다.

유해교반 퀘스트가 끝난 뒤 그는 우리와 함께 동해 용궁으로 왔고, 동서의 용왕들은 그를 귀빈의 귀빈으로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는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용궁의 왕족들과도 금세 친해져서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요 며칠은 조선에서 눈뜬 이후 가장 훌륭한 식사를 즐기고 있어서 말이지.”

그림 리퍼가 익살스럽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하긴 한반도에 오고나서 줄곧 던전을 지키는 일만 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이러다 유럽으로 돌아가면 바다 친구들과 바다의 밥상이 그리워서 어떻게 살지가 걱정이라고.”

유럽으로 돌아간다.

가벼이 넘길 수만은 없는 말에 비어 있는 자리들을 돌아보았다.

내 옆에 앉아야 할 동서해의 용왕, 바리와 단군, 그리고 무조신 바리공주의 자리였다.

“용왕님들과 다른 분들은 아직 오지 않으셨군요.”

“이른 아침부터 주술을 제어하시더니, 쉽지 않으신 것 같소.”

대답한 것은 오혜였다.

그녀가 말한 주술이란 우리가 북유럽으로 이동하기 위한 준비일 터.

유해교반 퀘스트가 우리의 승리로 끝나고, 우리는 족히 수백에 이르는 뱀 인간…… 아니, 나가에 둘러싸였다.

그들은 통솔자였던 남해 용왕, 즉 아수라의 왕 브리트라를 잃고 금방이라도 미쳐 날뛸 듯 흥분해 있었다.

그들을 제어한 것이 유해교반 퀘스트의 보상인 바다의 신화였다.

[ ‘하나의 바다.’ ]

- 분류 : 전설(L)

- 권능 : 사해(四海)의 왕(王)

- 내용 : 갈라졌베꼐됩흐 물줄기가 하나로 베레땍긍룐렷뤠빎, 모든 바다는 결국 하나의 바다벨덱몄깃됩흐흐흐니.

-효과 : 바다벨덮됩흐 용신들과 하나로 연결베뀐띄받듬흐흐흐다.

유해교반 퀘스트가 정상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어서였을까?

겨우 얻은 바다의 신화는 전설 등급이었음에도 설명에 오류가 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당장 수백의 나가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어 사해의 왕이라는 권능만 믿고 그 전설을 사용했을 때.

나는 바다의 용신들과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실감했다.

수백의 나가들을…… 마치 내 몸의 일부처럼 움직일 수 있었으므로.

“…….”

그 순간을 떠올리자 손끝이 차게 식었다.

수백에 이르는 산 자와 연결된다는 것은 무척 섬뜩한 감각이었다.

말하자면 돌연 손가락이 수백 개로 늘어난 것만 같았다.

그 모든 걸 내 의지대로 움직이면서도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나가들의 의식이 그대로 전해진다는 사실이었다.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그들의 의식은 수백이었으나 동시에 하나였다.

같은 염원을 품은 거대한 의식의 집합체였다.

결국 나는 우리를 공격하지 말고 멈춰서 기다리라는 하나의 명령만을 전하고서 연결을 끊어버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연결을 끊었음에도 그들은 내 명령에 따라 계속 가만히 멈춰 있었다.

잔뜩 흥분했던 수백의 나가가 망부석처럼 변한 것도 결코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으나, 나는 더 이상 그들과 연결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전부 검은 액체가 되어 녹아내렸다.

검은 액체는 한데 고여 단 하나의 늪이 되었고, 이내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것으로 변했다.

비어 있되 비어 있지 않은 것.

나가로 변한 모든 용신들의 세월이 하나로 얽힌 거대한 우주퇴적물이었다.

또한 발생할 수 없는 사건을 불러오는 그 힘이 한반도의 바다 전체를 뒤흔들며 기묘한 소용돌이들을 만들었다.

만물의 인과를 읽는 단군의 말에 따르면, 허물 수 없는 벽을 허무는 소용돌이였다.

한데 그 무수한 소용돌이 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고생이 많으셨소, 염라.

무조신 바리공주.

이동 주술이라도 쓴 것인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소용돌이 앞에 선 그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양 검고 깊은 눈에 나를 담았다.

-무엇을 상심하고 있을지 알아. 하지만 그대는 해야 할 일을 잘해주었소.

우주퇴적물로 변해버린 남해의 용신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날 위로하듯이 말을 이었다.

-다음은 우리의 몫이오. 나와 단군, 그리고 저 아이가 그대가 가야 할 길을 열 것이오.

그래, 북유럽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겠다고.

……거기까지 기억을 더듬어 간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드르륵.

식당 문이 열리면서 앞치마를 한 용신들이 저마다 요리를 들고 들어왔다.

그중에는 서해 용왕을 시해하려고 했던 붕어 어의도 있었다.

붕어 어의를 비롯하여 동서의 용왕들에게 잡힌 열댓 명의 첩자들.

그들은 이제 최후로 남은 남해의 용신들이었다.

-언젠가부터 남해의 용신들이 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더군.

우리가 유해교반 퀘스트를 수행하는 사이 남해의 첩자들을 심문했던 동해 용왕은 말했다.

-문제의 원인을 찾던 끝에 오윤이 내린 답은 균형이었네.

남해 용왕이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이용당했다가 죽었다는 소식에 깊은 한숨을 쉬면서.

-강철이…… 우리는 처음부터 막내를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되었다고. 네 개의 축으로 태어났음에도 한 축을 무너뜨렸으니 모든 것이 무너진 것이라고.

그렇게 결론 내린 남해 용왕은 모든 축을 무너뜨려야만 새로이 건강한 바다가 열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동서해를 멸망시키고 자신의 존재마저 끝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놈의 생각이 맞았을까? 하지만 나와 오흠은 기어이 살아남았지.

동해 용왕은 그에 대해서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형제를 친 것부터 잘못이었을지도 몰라. 그렇다 하여도 우리는 계속 함께 살아갈 걸세.

그저 옆에 앉은 서해 용왕을 돌아보며 마무리했을 뿐이다.

-이제 형제라곤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형제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말에 서글픈 유대를 느끼면서도, 두 용왕은 분명 최선을 다해 살아가리라는 생각을 했다.

둘만 남았다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지만, 혼자가 되어버린 것보다는 조금 덜 괴로울 테니까.

서로를 보면서 버틸 수 있으니까.

긴 식탁 위에 차근차근 요리가 놓였다.

앞치마를 한 용신들이 물러가고, 우리가 마침내 식사를 시작하려 할 때였다.

드르륵.

다시 한번 문이 열리며 이 자리에 없던 다섯이 차례로 들어왔다.

“이런, 보아하니 지금 막 차려진 모양이구만.”

“이렇게 된 거 빨리 먹기는 해야겠군.”

먼저 들어온 동서의 용왕이 다소 급한 기색으로 내 옆으로 오며 말했다.

“좋은 아침이오, 새 염라.”

양옆에 바리와 단군을 대동한 바리공주가 두 사람을 대신해서 말을 건넸다.

이른 아침부터 무언가 중요한 일을 했음을 증명하듯, 셋 모두는 지금도 기묘한 문자열에 둘러싸여 있었다.

“식사를 마치면 서둘러 소용돌이로 가는 것이 좋겠소.”

바리공주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으며 마저 말했다.

“북유럽으로 가는 길을 여는 데 문제가 조금 생겼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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