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70화 (170/187)

47장. 물이 걷히고 드러난(6)

“항복하라?”

남해 용왕이자 브리트라인 존재가 코웃음 쳤다.

“내 손짓에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르던 순간을 벌써 잊었느냐?”

파아아악!

그를 중심으로 검은 파도가 휘몰아쳤다.

재해의 현신이 부리는 난폭한 바다의 신성이었다.

화르르륵!

동시에 여섯 개의 팔에서 새빨간 불꽃이 일었다.

가뭄을 일으키고 모든 것을 까맣게 태워버리는 또 다른 재해가 지독하리만치 위압적이었다.

나는 홍수와 가뭄, 두 재해를 두른 막대한 힘에 절로 떨리는 몸을 곧추세웠다.

자연에는 선악이 없다.

업경으로 신성을 증폭시킬 수 없는 상대였으니, 그는 본디 내게 가장 위협적인 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우습게도 이 유해교반에서 선한 신 데바의 왕은 나이고, 악한 신 아수라의 왕이 그이기 때문이다.

“어디 한번 와보거라.”

여섯 개의 팔에서 일렁이는 가뭄의 불꽃을 더욱 키우며 그가 말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은 아주 하찮은 것을 대하듯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숨 하나로 아랫것들을 지키려 드는 무력한 왕이 아니냐. 네가 죽으면 이 같잖은 전쟁 놀음도 끝나겠지.”

그는 내가 홀로 희생함으로써 내 일행들을 구하려 한다고 여겼다.

스스로 카르마 등급 필드에 갇혀 일격몰살을 막았던 것처럼.

파아아악!

드높이 솟은 검은 파도가 온갖 방향에서 덮쳐왔다.

“……크윽!”

나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그를 직시했다.

-염라, 처음 유해교반 퀘스트가 시작되었을 때 우리가 추측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길을 안내하기 위한 붉은 나비를 소환하면서 단군은 물었다.

-그들이 인드라 던전을 안배한 이유는 애초에 인드라와 아수라 모두를 맡을 셈이었기 때문이라고요.

-기억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없으니까요.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단군은 마침내 그들이 인드라 던전을 안배한 이유를 밝혀 냈다.

-그들은 처음부터 아수라로 변한 남해 용왕을 처리할 생각이었더군요.

파아아아악!

사방에서 밀려오는 검은 파도 속.

나는 이 싸움이 안배된 그 순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던 정답을 시전했다.

[ 한빙지옥(L) ]

연푸른 신성이 퍼지며 한기가 불어닥쳤다.

시바의 힘이 깃든 찬드라 덕에 공격력이 두 배 증폭된 혹한의 지옥이었다.

파장창!

파장창창!

가시로 이루어진 꽃처럼 뾰족하게 솟은 얼음 기둥이 그의 몸을 하나하나 꿰뚫었다.

“……허?”

그러나 그뿐.

치솟은 얼음에 똬리를 튼 꼬리와 여섯 개의 팔이 모조리 꿰뚫렸음에도 그는 가소롭다는 듯 조소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고작 이따위 것을 믿고 그리 자신만만했더냐?”

치이익.

치이이익.

끓어오르는 열기에 아지렁이마저 일어난 검은 몸에서 희뿌연 수증기가 피었다.

한빙지옥이 만든 얼음 감옥은 태양을 삼키고 온 땅을 불태웠던 재앙의 힘에 덧없이 녹아내렸다.

파아아악!

열기를 뿜어내는 그를 중심으로 검은 파도가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파아아악!

파아아아악!

내게로 떨어지는 파도를 보며 나는 재차 마력을 끌어 올렸고,

[ 한빙지옥(L) ]

남은 마력을 전부 밀어 넣었다.

파장창!

파장창창!

찬드라의 힘으로 더욱 증폭된 한기가 드넓게 퍼져 나갔다.

끊임없이 열기를 발하던 그의 몸뿐만 아니라 벽처럼 치솟았던 검은 파도마저 한기에 닿는 족족 얼어붙었다.

쩌어어어억.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던 파도는 말 그대로 얼음벽이 되었다.

그 거대한 벽은 노린 것처럼 반으로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허어…… 발을 묶겠다는 것이냐?”

희게 얼붙은 그의 몸은 무너져 내린 얼음 조각들 사이에서 곧바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치이익!

치이이익!

거듭 그의 몸에서 열기가 들끓었다.

얼음이 빠르게 녹아내렸다.

한기 위로 뿌연 수증기가 안개와 같이 피어올랐다.

찬드라로 증폭된 한빙지옥이라 한들 가뭄의 신성 앞에선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다만 나는 인벤토리에서 바즈라와 칼파브릭샤의 묘목을 꺼내 들고 땅을 박찼다.

애당초 내겐 그 잠깐의 틈이면 충분했으니.

치이익!

치이이익!

쉴 새 없이 뿜어지는 수증기로 자욱해진 주변은 안개 그 자체의 중심이나 다름없었다.

“데바와 아수라의 전쟁에서 브리트라가 무엇에 죽는지 당신도 알 테죠.”

얼어붙은 왕을 향해 높이 치켜든 바즈라를 내려쳤다.

우르르릉!

콰아아아앙!

벼락을 형상화한 신의 무기가 낙뢰 그 자체가 되어 내리꽂혔다.

“커흑!”

그가 검은 피를 토하며 꿈틀거렸다.

얼음송곳에 이어 벼락이 꽂힌 몸은 본래의 윤기를 잃고 형편없이 그을린 채 비늘마저 벗겨지고 있었다.

“크……크흐, 크흐흐흐!”

하나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치이이익!

더욱 짙어진 수증기와 함께 그의 한쪽 팔이 두꺼운 얼음을 뚫고 나왔다.

콰아아악!

비늘을 후두둑 떨어뜨리며 두꺼운 팔이 그대로 내 목을 잡아챘다.

“……끅.”

신음을 삼키며 그를 직시했다.

아직 얼음 감옥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그는 그럼에도 몹시 여유로운 얼굴로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목을 틀어쥔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힘주어 터트릴 수 있는데 느리게 숨통을 조이는 것은 그저 날 농락하기 위함이리라.

“한기와 낙뢰. 고작 이것이 너의 전부더냐?”

오만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자의 진한 비웃음이었다.

모든 마력을 소진해 한빙지옥을 열고, 인드라의 바즈라를 사용했음에도 저를 쓰러트리지 못했으니 기실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끄윽…….”

점차 숨이 막혀 오는 고통은 애써 무시했다.

정신력을 그러모아 아직 내가 쥐고 있는 칼파브릭샤에 집중했다.

갖춰야 할 것은 모두 갖추었다.

이제 소원을 들어준다는 신성한 나무의 힘을 쓸 차례였다.

그래, 처음부터 아수라의 왕 브리트라를 처단하기 위해 설계된 그 힘을.

“……얼음을, 물거품으로 바꿔줘.”

그리하여 그 효과가 발휘된 순간.

파아아앙!

왕을 구속한 얼음 송곳과 얼어붙은 검은 파도가 삽시간에 물거품이 되어 그를 덮쳤다.

“……커헉!”

물거품에 뒤덮인 그는 나를 내팽개치고는 산성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지독한 연기를 뿜으며 온몸을 뒤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부릅뜬 그를 지켜보며 인드라와 브리트라의 신화를 상기했다.

인드라와의 전투를 앞둔 브리트라는 제힘을 강화하기 위해 제약을 걸었다.

나무나 돌, 쇠로 만든 무기로는 절대 자신을 죽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마르거나 젖은 무기로도 자신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제약은 치명적인 약점까지 안배하게 될지니.

데바의 왕 인드라는 나무도, 돌도, 쇠도 아니며 마르거나 젖지도 않은 물거품으로 브리트라를 상대한다.

파아아아앙!

가뭄을 불러왔던 재해의 신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거품을 뒤집어쓴 채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인드라와 브리트라의 신화 그대로였다.

물거품과 함께 사라져 가는 브리트라를 내려다보며 나는 단군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인드라를 안배해서 남해 용왕을 처리할 생각이었다면, 대체 그렇게 설계한 이유는 뭐였을까요?

단군이 나비를 통해 안내한 길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길이었다.

던전을 조작하던 그들도 처음부터 곧장 아수라의 왕을 쳐서 유해교반을 끝낼 셈이었으리라.

애초에 남해 용왕을 아수라의 왕 브리트라의 모습으로 변하게 한 것은 그들이었으니, 치명적인 약점을 심어두는 것도 가능했을 터였다.

-두 가지로 생각됩니다.

내 물음에 단군은 대답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유해교반 던전에 할당된 인과율.

-다른 하나는 남해의 용신들을 나가로 만들어 본인들의 군대로 부리는 것.

요컨대 그들은 남해 용왕을 이용해 남해의 용신들을 나가로 만든 뒤, 통제권을 쥔 남해 용왕을 처리함으로써 그들을 취할 생각이었다고.

그래서 뱀 인간들을 최대한 보존하고자 처음부터 왕 하나만 처리할 수 있는 길과 수단을 만들어 둔 것이라고.

결국 남해 용왕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장기말로 이용당한 셈이다.

단군과의 대화를 곱씹으면서 나는 그에게 표했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런 짓을 준비한 자들의 정체는 대체 뭘까요?

***

연꽃 벽화로 가득한 동굴.

다섯 개의 머리를 가진 코끼리는 네 다리가 기이하게 꺾인 채 엎드려 있었다.

데바의 왕 인드라를 태우던 아이라바타였다.

쓰러진 신수의 주변에는 볏이 달린 나가가 넷 있었다.

셋은 무릎을 꿇은 채로 코끼리를 숭배하듯 절을 올렸고, 나머지 하나는 온몸에 붉은 문자를 새기고서 큰 칼을 들고 아이라바타의 앞에 섰다.

“गणेश.”

칼을 든 나가가 쉭쉭 바람 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신의 이름을 읊조렸다.

“गणेश.”

“गणेश.”

“गणेश.”

그를 따라 나머지 나가들도 절을 올리며 신의 이름을 읊었다.

“गणेश.”

한 번 더 신의 이름을 부른 나가가 코끼리를 향해 높이 들어 올린 칼을 내려쳤다.

서거억.

코끼리의 가운데 머리가 잘려나갔다.

그 몸에서는 피 대신 붉은 문자들이 흘렀다.

코끼리의 머리를 자른 나가는 삽시간에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 칼을 내던진 뒤 잘린 머리를 집어 높이 쳐들었다.

직후 코끼리를 향해 절을 올리던 세 명의 나가는 검은 액체가 되어 녹아내렸다.

흘러내린 액체는 한데로 모이더니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에 반죽되듯 찬찬히 형태를 바꾸었다.

머리가 없고 배가 불룩 튀어나온 남성의 몸이었다.

상체는 벌거벗었으며 하체는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네 개의 팔이 제각각 다른 손 모양을 하고 있었다.

코끼리 머리를 든 나가가 남성의 목 위에 잘린 머리를 올리며 무릎을 꿇었다.

“지혜의 신이시여.”

마지막 나가마저 그 말을 끝으로 검게 녹아내리면서 붉은 문자열을 흘렸다.

파아앙!

나가로부터 흘러나온 문자열이 잘린 머리에 깃들었다.

이윽고 인간의 몸에 붙은 코끼리 머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개의 팔에 코끼리 머리가 달린 배불뚝이 신.

지혜의 신 가네샤는 마침내 눈을 떴다.

“흐음…….”

눈을 뜬 그는 찬찬히 상황을 곱씹었다.

“이거 생각보다 꽤 많은 게 흐트러졌는데.”

코끼리의 얼굴이되 어린 소년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8천 년 전쯤 계산이 틀어졌을 때부터 불길하더라니…… 결국 이렇게 됐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배가 불룩 나온 몸을 움직여 천천히 걸었다.

“어쩔 수 없군. 일단은 이 정도로 끝낼까.”

걸음이 멈춘 것은 동굴 깊은 곳에 놓인 제단 앞이었다.

북아프리카의 괴수 암무트가 놓인 제단이었다.

제단 앞에 선 가네샤는 네 개의 팔을 움직였다.

각각의 팔이 허공에 붉은 문자들을 써내자, 그것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제단에 놓인 암무트에게 스며들었다.

파아앙!

붉은 글자들을 머금은 괴수의 시체가 일순 검은 신성을 발했다.

검은 신성은 거대한 연꽃의 형태를 이루었고, 이내 꽃잎을 활짝 만개하면서 아름다운 남성의 형태를 품었다.

그을린 피부에 거친 장발을 휘날리는 남자였다.

황금빛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몸에는 붉은 옷을 걸쳤으며, 공을 들여 빚어낸 듯 완벽한 근육이 잡힌 팔은 가네샤처럼 두 쌍이 더 있었다.

검은 연꽃 속에서 눈을 뜬 그에게 가네샤는 네 개의 손을 모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주 오랜만입니다, 야마.”

죽음의 신 야마라자.

한반도의 바다 밑바닥에서 눈을 뜬 저승의 왕이 황금빛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며 가네샤를 훑었다.

【이게 누구야, 우리 코쟁이 아니야?】

지혜의 신을 알아본 그가 어둠 속에서 재밌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47장. 물이 걷히고 드러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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