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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45화 (145/187)

42장. 가라앉은 업(2)

가라앉은 업이라니.

쉬이 해석할 수 없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두 용왕에게 집중되었다.

말을 전한 저승 삼신은 팔짱을 낀 채 그들의 답을 기다렸다.

오랏줄에 묶여 무릎 꿇려진 남해의 첩자들도 눈을 끔뻑이며 용왕들을 올려다보았다.

“허…….”

잠깐의 침묵.

그 끝에 서해 용왕이 먼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승 삼신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한 듯 하얀 눈썹 아래로 용의 눈이 깊이 침잠해 있었다.

“형님, 저 소리 듣고 찔릴 건 역시 하나밖에 없지?”

서해 용왕이 동해 용왕을 돌아보며 물었다.

용상에 앉은 동해 용왕은 무거운 낯으로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가라앉았다는 것은 아마 가장 깊은 바다를 말하는 것일 테지.”

“흐음?”

그의 말에 저승 삼신이 고개를 기울였다.

“가장 깊은 바다라면 북해 말인가?”

“북해?”

뜻밖의 말에 나와 차사들이 의문을 표했다.

북해라면 한반도를 둘러싼 다른 세 바다와 달리 특별한 방법으로만 갈 수 있다는 바다였다.

그에 더해 북해의 용왕 북방흑룡 광택왕은 신들조차 그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알려진 용이었고.

“뭐, 북해라면 가라앉았다고 표현한 게 이해가 되는군.”

고개를 끄덕인 저승 삼신이 나와 차사들을 돌아보며 설명했다.

“거긴 저 밑바닥이거든. 세 바다의 가장 밑바닥. 우린 그곳을 네 번째 바다 북해라고 불러 왔다. 더 이상 천계의 빛이 닿지 않아서 사시사철 얼어붙어 있는 어두운 극음의 바다지.”

그렇다면 바닷속의 용궁보다도 더 깊은 심해를 말하는 걸까.

어둡고 추운 극음의 바다.

그 말을 들으니 그곳을 왜 북해라고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전에 상대했던 북방의 신 현무가 그랬듯, 북쪽은 본디 극음의 방향으로서 칠흑처럼 어둡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법이니까.

“그럼 업은 무슨 뜻이지?”

저승 삼신이 다시 두 용왕에게 물었다.

“…….”

그녀의 물음에 두 용왕은 재차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각각 노인과 중년의 모습이었고, 딱히 얼굴 생김새가 유사한 게 아니었음에도 이 순간만큼은 마치 거울을 맞댄 것처럼 닮아 있었다.

“손녀야, 네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형제에게서 시선을 거둔 서해 용왕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세 바다의 밑바닥에 우리의 네 번째 형제를 묻었다.”

“음?”

정말로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저승 삼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영감들 네 번째 형제라면?”

“그래, 북방흑룡 광택왕. 북해는 녀석을 묻어 둔 바다야.”

“허.”

“으응? 여태까지 아무도 북해 용왕을 본 적이 없다더니, 그게 그래서였어?”

이어진 말에 사라와 호구별성이 곧바로 반응했다.

내 옆에 선 강림 형도 눈을 가늘게 뜨며 두 용왕을 주시했다.

재차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서해 용왕은 아주 오랫동안 삭여 온 이야기를 느릿하게 풀어 내기 시작했다.

“그 녀석은…… 용이 아니다.”

“뭐? 용왕인데 용이 아니라고?”

“강철이. 그것이 녀석의 정체야.”

강철이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로, 불을 내뿜고 일대를 말라버리게 한다는 요괴일 텐데.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서해 용왕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해 용왕의 네 번째였던 오순.

그는 바다를 다스릴 마지막 왕으로서 백두산 천지에서 허물을 벗었지만, 어째서인지 도중에 탁기가 배어 용이 되지 못했다.

모든 짐승을 다스릴 용의 천명을 타고났으나 한낱 이무기로 남게 되어버린 북방의 흑룡은, 결국 끓어오르는 울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화기를 내뿜는 강철이가 되고 말았다고.

“와, 그럼 그 유명한 백두산 천지 흑룡이 영감네 형제였어?”

호구별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짐승의 시대에 태양을 삼켰다던 그 미친 흑룡 말이야!”

그녀의 반응을 보며 새삼 신화적 존재들에게조차도 아득한 옛날이야기라는 것을 실감했다.

2세대 신으로서 인간의 시대를 연 이승 삼신과 우리 대왕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시기 전.

짐승의 시대라는 것은 인간도 짐승과 다를 바 없던 그때를 일컬음이니.

“태양을 삼킨 흑룡이 백두산은 물론이고 한반도 전체를 불태울 기세였다고 하지.”

이야기를 듣던 사라도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그래, 그 흑룡이 우리 넷째 놈이야.”

서해 용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긍정했다.

“나와 형님이 그놈의 머리를 잘라 천신들의 금줄로 봉인했는데, 그러고도 놈의 화기가 꺼지지 않아서 사흘 밤낮 아주 하늘을 찌를 기세로 불기둥이 치솟았지.”

그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 그들은 기어이 머리를 잘라 봉인한 형제를 가장 깊은 바다로 가라앉혔다고 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화기를 춥고 어두운 극음의 기운으로 제어하기 위해서.

“그럼 제 손으로 형제의 목을 베고 바다 깊은 곳에 봉인했기에 업이라 칭하는 것인가?”

이야기를 듣던 저승 삼신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도 그 의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으나 잠시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동해 용왕이었다.

“글쎄…… 화를 가라앉히지 못해 태양까지 삼켰던 그놈이 그저 업보 덩어리일 수도 있겠지.”

“음, 그것도 맞는 말이군.”

저승 삼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라 한들 태양을 삼키고 온 땅을 불태우던 요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업이라면, 요괴로 변모한 형제의 목을 벤 것보다는 요괴가 일으킨 재앙이 더욱 그 이치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다면 오윤 그놈이 왜 용의 심장을 원했는지도 짐작이 되는구나.”

동해 용왕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두 용왕이 산천을 불태우는 강철이에게 폭우를 뿌리고 그 몸을 베어 천신에게 받아 온 금줄로 묶은 함에 봉하려고 하니, 머리가 잘려도 독기를 잃지 않은 강철이는 이렇게 말했다.

-내 언젠가 용의 심장을 씹어 삼키고 다시 하나의 용이 되리라.

“남해 용왕은 두 분의 심장으로 강철이를 깨우려고 했던 거군요.”

“그래, 그놈은 우리가 강철이를 봉인하는 걸 막으려고 했거든.”

내 조심스러운 추측에 서해 용왕이 코웃음을 쳤다.

“하나 벌써 만 년도 두 번이나 지난 일이야. 짐승의 시대가 끝나고 인간의 시대가 시작된 지 한참이거늘 이제 와서 다시 들추다니.”

봉인을 업이라고 칭하는 점괘를 듣고도 그는 강철이를 되살리려는 남해 용왕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다가.”

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두 분은 어쩌다가 강철이를 봉인하시게 된 건가요?”

두 용왕의 황금빛 눈동자가 모두 나를 향했다.

나는 두 쌍의 용의 눈을 번갈아 보며 계속해서 물었다.

“그냥 형제라서 두 분이 나서신 거예요?”

이번에도 두 용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깊이 가라앉은 눈이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지만, 기실 시선의 끝에 있는 것이 내가 아님은 업경의 권능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여워서…….”

동해 용왕은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돌렸고,

“살려달라고 비는 그것들이, 그냥 가여워서 그랬지, 뭐.”

서해 용왕은 형제의 말에 덧붙이며 혀를 찼다.

두 용왕이 차례로 내놓은 대답은 그것이 전부였다.

무엇을 가여워한 것인지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것이 결국 인간임을 나는 바로 알았다.

짐승의 시대에는 인간도 그저 짐승이었던지라, 인간들 또한 짐승의 신인 용에게 빌었을 테지.

“아…….”

두 용왕에게서 연민을 이끌어 낸 인간들에 대해 생각하자 자연스레 단군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동해 용왕이 인간이 문명을 통해 길들인 자연이라면, 남해 용왕은 반대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재해로서의 자연이라는 뜻인가요?

어쩌면 그것은 몹시 오만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두 용왕은 인간이 가여워서 나섰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인간이 문명을 통해 길들인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문명을 이루어 발전해 나가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그리하여 인간이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가호하는 자연에 더 근접한 게 아닐까.

“어쨌든 점괘가 북해를 가리킨다면 북해에 가 봐야 한다는 것인데.”

이야기를 들은 저승 삼신이 말했다.

“어떡할 거야? 용은 북해에 못 가잖아.”

“응? 용들은 거기 못 가? 왜?”

그녀의 말에 호구별성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우린 북해에 가면 그 끔찍한 한기에 심장이 얼어붙기 시작하거든. 깊이 들어가지도, 오래 머물 수도 없어.”

아, 그래서 북해의 한랭한 기운이 담긴 산호로 용의 심장을 얼릴 수 있던 거구나.

뒤늦게 깨닫는 사이 저승 삼신이 조금 냉소적인 얼굴로 덧붙였다.

“지금까지는 그냥 한기 때문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심장을 노리던 강철이의 저주였구만. 어쩐지 북해의 한기에만 얼어붙는 게 이상하다 했지.”

그게 그렇게 이어지는 거였나.

그녀의 말대로라면 용왕과 다른 용들 대신 누군가 북해에 다녀와야 할 터였다.

“그럼, 제가 다녀올게요.”

구태여 시간을 끌 이유가 없어 곧바로 자원했다.

“어차피 두 용왕님 대신 바다의 신화에 도전하기로 했으니까요. 태초의 바다를 열려면 네 개 바다의 보물이 필요하잖아요.”

용도 아닌 내가 바다의 왕이 되려는 것이니 그 정도의 수고는 마땅히 감수해야 했다.

두 용왕은 찬성도 반대도 하지 못한 채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내게 또 험한 일을 맡기는 게 내키지 않는 것이다.

나는 작게 미소 지어 보였고, 이어서 저승 삼신이 코웃음 쳤다.

“거 영감탱이들 다른 수도 없으면서 망설이는 척은 왜 해?”

팔짱을 낀 그녀가 비뚤게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돌아봤다.

“새 염라, 가기 전에 두 영감한테 동서 용궁의 보물을 받아 가라. 그러면 네가 거기 들르는 것만으로 세 개의 보물이 모이게 된다.”

그녀는 어쩌면 북해에서 남해 용왕과 다시 부딪칠 가능성도 염두에 둔 듯했다.

단순히 북해를 다녀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곳에서 태초의 바다를 열게 될지도 모른다고.

저승 삼신이 먼저 운을 띄우자 두 용왕도 나란히 한숨을 쉬었다.

“북해로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겠네, 염라. 안 그래도 고생이 많았으니 적어도 하룻밤은 푹 쉬고 가게나.”

“그래, 쉬는 동안 밥도 많이 먹고. 내가 영약도 챙겨줄 테니까 잘 준비해서 가자고.”

이로써 다음 할 일이 결정되었다.

나는 두 용왕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의논 없이 내린 결정이었지만 차사들과 바리는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단군은 조금 새삼스럽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북해로 가시는 길에 동행하고 싶습니다, 염라.”

그러면서도 언제나와 같이 내가 거절할 것은 생각지 않는 얼굴이었다.

“바다의 신화를 얻을 수 있게 도와드린다고 말씀드렸지요. 뜻하시는 일에 폐가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가 한반도 최강의 도사인 것을 생각하면 폐가 되지 않겠다는 말은 지나치게 겸손한 말이었다.

“네, 당분간 잘 부탁드립니다. 단군.”

그야 전력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물론 천벌을 두고 함께 겨뤘던 바리와 신으로서 인간에게 도전받는 다른 차사들이 그를 어떻게 여길지는 또 모르는 일이었지만.

나는 여섯 명이 동행하는 길이 과연 어떤 분위기일지 한번 상상해 보다가 살짝 피곤해져서 먼저 등을 돌렸다.

해야 할 일은 정해졌으니 우선 조금 쉬고 싶었다.

42장. 가라앉은 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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