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장. 가라앉은 업(1)
남해 용왕과의 신화전이 끝났다.
신화전 필드가 휩쓸고 지나간 동해 용궁에는 어수선한 흔적이 남았다.
내가 머물던 침소를 비롯하여 몇몇 전각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남해 용왕이 도망친 자리에는 용이 흘린 피가 선연했다.
쓰러졌던 용신들이 하나둘씩 의식을 되찾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천공에서처럼 흑암지옥의 독에 완전히 당한 것은 아니었던 터라 모두 후유증 없이 깨어날 수 있었다.
습격을 앞두고 미리 대피시켜 두었던 의관들도 금세 돌아와 부상자들을 돌봤다.
-새 염라야, 너 주려고 붕어 낚아 왔다.
혼신의 힘을 다해 쓰러진 연기를 펼쳤던 서해 용왕도 무사히 돌아왔다.
그가 짐짝처럼 둘러멘 붕어 용신은 오랏줄에 묶인 채로 기절한 상태였는데,
서해 용왕은 다 깨우는 수가 있다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붕어를 들고 수라간으로 들어갔다.
-이 괘씸한 놈! 이놈을 아주 붕어빵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붕어빵에는 하필 붕어가 안 들어가는구먼!
그 모습을 보니 과연 저승 삼신의 할아버지가 맞다 싶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뭐, 용왕에게 감히 독을 먹였으니 나름 앙갚음을 하려는 것이겠지.
그렇게 얼추 난리를 수습할 분위기가 잡혔을 때였다.
가신들에게 이것저것 명을 내린 동해 용왕은 마지막으로 나와 일행들에게 정전으로 와줄 것을 청했다.
습격은 막아 냈으나 남해 용왕을 놓쳐버렸으니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야 할 터였다.
어수선한 가운데 정전으로 향하는 길.
사라와 호구별성이 훌쩍 앞서 걷고, 그 뒤로 단군과 바리가 천천히 뒤따랐다.
일부러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의 뒷모습만 바라보던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옆에서 걷는 강림 형을 올려다봤다.
형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을 지켰다.
여느 때와 같은 걱정 어린 말도, 귀철 던전 때와 같은 책망의 말도 없었다.
그러한 침묵에서 나는 더더욱 내가 먼저 말을 꺼낼 필요성을 느꼈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흑암지옥의 독을 치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형의 걱정은 언제나 무거웠다.
결국 조금 전에도 동해 용왕을 핑계 삼아 피하고 말았던 것처럼.
말도 없이 남해 용왕을 상대로 카르마 등급 필드를 전개했으니 그사이 형은 또 얼마나 불안했을까.
알고 있었다.
잘 알아서 더 무거운 것이었지만, 그렇기에 나는 이대로 넘어가선 안 되었다.
애써 한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형, 아까 하려던 말이요.”
묵묵히 걷던 형의 검푸른 눈이 나를 향했다.
“……죄송해요.”
사과의 말부터 다시 꺼냈다.
나를 바라보는 형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는 변명처럼 들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당장 떠오르는 방법 중에 효과적인 건 그것뿐이었어요. 저는 카르마 등급 필드를 펼칠 수 있었고, 그럼 일단 남해 용왕을 막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저자와는 언제 말씀을 나누신 겁니까.”
한데 형이 내 말을 자르고 꺼낸 질문은 다소 예상 밖이었다.
“……네?”
나는 멍하니 형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걱정도 책망도 없는 무심한 얼굴.
내가 불편해하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그 무엇도 드러내지 않는 태도였으나,
“당신께서 직접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의 판단이었습니까.”
그럼에도 이어지는 말에서 나는 귀철 던전에서 보았던 선연한 분노를 느꼈다.
-대왕님, 앞서 드린 질문에 답해주십시오.
-왜 이런 방식이라고 제게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저와 달리 저치는 당신의 뜻을 알고 있었는데.
걱정은 물론이고, 그때처럼 형은 내가 다른 이와 다소 무모한 방식을 공모한 것에 화가 나 있었다.
“…….”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사라와는 달랐다.
잔뜩 감정을 억누른 눈을 마주하자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군이 내게 위험을 감수하는 방식을 제안했다고 하면, 형은 안 그래도 아니꼽게 보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게…… 단군이랑 따로 말을 나눈 것은 아니었어요.”
다만 그 가정은 사실이 아니어서,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일단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필드부터 펼쳤고, 뒤이어 시간을 끌면 그가 다시 마력을 제공하는 꽃을 피우겠구나 하는 판단이 들었던 거예요.”
그래,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길 수 있습니다.
단군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가 이미 무언가 예지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혹시 몰라 절반은 남겨 두려고 합니다.
-14분 20초쯤 걸릴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알고 있는 정보를 하나로 규합해서 필요한 결론을 내리는 업경의 통찰이 단군의 뜻을 이해한 시점은 분명 그때였으니.
“다행히…… 단군과 제 생각이 용케 통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단군이 내게 직접적으로 시간을 끌어달라 말한 적은 없었다.
하여 나는 그렇게 말을 맺었다.
형은 서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저자는 당신께서 사라지시고 당황하는 우리에게 미래가 보인다고 하더군요.”
아니, 정확히는 앞서 걷는 단군을 보았다.
“도산지옥의 힘을 쓰는 염라의 모습이 보이니, 대왕님께서 시간을 벌어주시는 동안 다시 꽃을 피워야겠다고.”
단군 또한 내가 필드에 들어감으로써 그러한 미래를 보았다고 말한 것이다.
“당신께서 필드를 전개한 후 그리 판단하셨기 때문에 그자에게도 때맞춰 미래가 보였다는 뜻이로군요.”
“…….”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확인하는 듯한 말에 나는 형이 단군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저기, 형.”
형이 단군을 믿지 않는 것은 줄곧 단군을 경계해 왔기 때문이다.
“그 사람……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단군을 향해 있던 눈이 다시금 나를 보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아 아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눈이었다.
그 눈과 마주친 나는 아주 잠깐 입술을 달싹이곤 부러 얼굴을 조금 굳혔다.
“적어도 저한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저는 환생할 겁니다.
-가장 이상적인 신이 돌보는 한반도에.
그의 속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으나, 단군이 내게 그렇게 말했던 것만은 진심이었음을 되새기면서.
형은 대답 없이 나를 보았다.
나는 더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바로 했다.
“저는 당신의 눈이…… 인간을 향해 있을 때가 두렵습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형이 드물게도 몹시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에 옆을 돌아보자, 그는 괜한 말을 했다는 듯 짙푸른 눈빛을 흐리며 성큼 나를 앞서갔다.
“어…….”
너무나도 의외였던 말에 순간 멈춰버린 사고와 함께 그 자리에 못 박힌 나는 점차 멀어지는 크고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내가 단군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걸 형이 불편해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한데 그것을 설마 두렵다고 말할 줄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해서,
멍하니 형의 말을 곱씹던 끝에 그제야 뒤늦게 내가 품은 마음에 생각이 미쳤다.
여전히 내게 남아 있는 인간의 마음.
그 마음이 신에 대한 어떤 불경한 전복을 꿈꿨는지가.
다만 그것을 거듭 짚기에는 당장 눈앞을 가린 검은 벽이 너무 크고 높게 느껴져서, 나는 그냥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동해 용왕의 정전.
무슨 일을 당한 건지 그새 수염이 다 뽑힌 붕어 용신 앞에서 서해 용왕이 턱을 치켜들고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붕어 네가 정말로 3천 년 전부터 남해의 첩자로 들어왔단 말이냐?”
그의 추궁에 오랏줄에 묶인 붕어 용신이 파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오윤이 그놈은 3천 년 전부터 나한테 독이 든 토끼 간을 먹일 생각을 했고?”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다는 듯 그가 헛웃음 치듯 콧김을 불었다.
“거기다 네놈들은 제일 늦게 들어온 놈마저 벌써 천 년이 넘었더라?”
붕어 용신을 추궁하던 서해 용왕이 고개를 홱 돌려 또 다른 용신들을 쏘아봤다.
붕어 용신의 자백에 따라 새로이 잡아 구속한 이들이었다.
붕어 용신과 같은 어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오랫동안 법무대신을 맡았던 갈치 용신에 문지기로 용궁문을 지키던 꽃게 용신까지 한패였다.
“아니, 형님. 이 정도면 이거 동해 용궁이 아니라 남해 용궁 아니야?”
열 손가락이 넘는 첩자들의 수에 서해 용왕이 동해 용왕을 돌아보며 혀를 쯧쯧 찼다.
심지어 그중에는 나와 강림 형을 위해 새벽부터 연무장을 청소하던 해파리 용신도 있었다.
또 다른 첩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서해 용왕이 작정하고 쓰러지는 연기를 한 건 훌륭한 한 수였다.
“그래서, 요놈들이 오윤이랑 대체 무슨 일을 꾸몄는지 한번 찬찬히 들어볼까?”
서해 용왕이 첩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물어볼 때 대답하는 게 좋을 게야.”
비릿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가리키면서.
“네놈들이 의리를 지키려 해도 소용없다. 입 다물어 봤자 어차피 새 염라는 시체의 기억을 읽을 수 있거든.”
“…….”
“흐흐흐. 난 상관없으니 다물고 싶으면 다물거라. 한 놈, 한 놈 좋은 구경을 시켜 주마.”
“…….”
이상하다.
분명 첩자인 저들이 나쁜 놈들이고,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심문을 하는 건데.
왜 우리가…… 아니, 서해 용왕이 악당처럼 보이는 걸까.
-여의주를 잃은 나는, 용궁으로 돌아갈 수 없소.
-여의주가 없으면 나는…….
-나는, 아바마마한테 아주 혼쭐이 날 거요!
문득 고등어 왕자와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나한테 밥을 엄청 먹이던 건…… 조금 애매하지만, 대체적으로 잘해줘서 잘 몰랐는데.
우리 고등어 친구가 아빠를 떠올리며 벌벌 떨었던 이유가 혹시 이런 면모 때문인가?
“자, 그럼 용왕의 심장을 가지고 뭘 하려고 했는지부터 시작해 보자고. 말해 봐라. 나와 형님의 심장을 가져다 어쩔 셈이었냐?”
첩자들에게 한바탕 겁을 준 서해 용왕이 막 심문을 시작한 그때였다.
콰앙!
굉음이 울리며 정전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 사이로 불쑥 모습을 드러낸 키 큰 누군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전에 잠깐 이쪽부터 봐줬으면 좋겠는데.”
뒤이어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는 몹시도 익숙했다.
“한 달 내내 비를 맞아서 겨우 한마디 얻어 왔으니까.”
한라산 백록담에서 천기를 읽는다던 저승 삼신이었다.
서해의 백발에 동해의 푸른빛이 섞인 긴 머리가 파도처럼 휘날렸다.
그녀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다가왔다.
“이야, 우리 손녀님이 오셨나?”
서해 용왕이 먼저 저승 삼신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오, 저승 할망 오랜만이네!”
호구별성도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나란히 선 사라와 강림 형은 가볍게 목례만 할 뿐이었지만.
“흐음…….”
신들의 인사에 저승 삼신이 시큰둥하게 팔짱을 꼈다.
“뭐, 이제 와서 쓸데없이 길게 인사할 건 없고.”
그녀는 곧바로 두 용왕을 돌아봤다.
“내가 백록담에서 하늘이 비친 물을 열심히 들여다봤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딱 이 한마디만 나온단 말이지.”
신들마저도 천기를 읽기 힘들어진 지 오래인지라, 그녀는 백록담에서 따로 공을 들여 천기를 읽는다는 이야기였는데.
“가라앉은 업.”
황금빛 눈동자로 두 용왕을 직시하며 그녀가 물었다.
“영감탱이들, 댁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