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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21화 (121/187)

37장. 상처(1)

동해 용궁의 정전(正殿).

나는 용상에 앉은 동해 용왕을 마주했다.

그의 옆에는 우리 대왕님의 탈을 쓴 서해 용왕이 함께였으며,

내 곁에는 삼차사와 바리, 그리고 멍군이 서 있었다.

“지옥의 권능을 품은 자들이 청공에 잠복해 있었다고…….”

이야기를 들은 동해 용왕이 낮게 침음했다.

스스로 몸을 잘라 분열하는 힘을 썼다는 말에는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이나 되묻기도 했다.

“본래도 흑암지옥이 그런 힘을 품고 있나, 염라?”

그의 물음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흑암지옥은 어둠으로 눈을 가리고 환상으로 고통을 주는 지옥이었다.

문어 용신들이 재생하고 분열하던 힘의 근원은 분명 흑암지옥의 어둠이 맞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흑암지옥만의 힘은 아닐 겁니다.”

나는 서해 용궁에서 쓰러트린 다섯 그루의 지옥수를 떠올렸다.

그 불길한 나무들에는 징악의 권능 대신 수많은 권능이 깃들어 있었다.

“서해의 터를 빼앗고 자라던 지옥수에는 여러 권능이 얽혀 있었습니다. 문어 용신들이 품은 지옥수에도 본래의 권능 외에 다른 권능이 깃들었을 테죠.”

동해 용왕의 눈이 더욱 깊게 침잠했다.

“서해를 침략한 것은 인간 도사였지.”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3만 년의 세월을 바다에서만 살았네. 그러니 오윤 그놈이 제힘만으로 저승의 나무를 그리 사특하게 키울 수는 없었을 터.”

오윤.

남쪽 바다를 지배하는 남방적룡 광리왕의 이름이었다.

“분명 삿된 주술을 부리는 협력자가 있을 걸세.”

동해 용왕은 죽은 흑탑주 외에도 남해 용왕과 손을 잡은 이가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런데 염라, 인간이 정말 그런 힘을 부릴 수 있는 겐가?”

그 물음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무엇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여느 신들이 그러했듯, 3만 년간 바다의 신으로 군림한 그 또한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게 된 것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동해 용왕의 질문에 긍정했다.

“허…….”

그가 다른 말 없이 깊이 탄식했다.

“그놈들은 왜 거기 숨어 있었던 게야?”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서해 용왕이 입을 열었다.

“놈들이 청공의 정기는 손대지 못했다면서. 그럼 대체 무엇을 노리고 그곳에 있었던 게지?”

서해 용왕의 물음에 나는 문어 용신들에게서 읽었던 기억을 되짚었다.

“처음에는 정기를 노리고 온 것이 맞습니다. 한데 청공이 품은 바다의 정기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깊고 정순하여 어쩌지 못한 것이죠.”

그들은 청공의 정기를 지옥수의 양분으로 쓰려 했다.

그러나 정기가 되레 지옥수의 어둠과 충돌하자 도로 뱉어 낼 수밖에 없었다.

차선으로 택한 것이 청공의 정기를 더럽혀 다른 용신들이 흡수하지 못하게 막는 방법이었으나, 그 역시 망망대해에 오수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이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럼 왜 빨리 꺼지지 않고 쓸데없이 죽치고 있던 건데?”

서해 용왕이 계속해서 물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입술을 달싹였다.

검은 두루마기 자락이 악몽처럼 머릿속을 스치며 불완전하게 아문 상처가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저를 기다린 듯합니다.”

일부러 차사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이전에 서해를 침략한 도사가 그랬듯이 제가 가진 지옥의 권능을 탐내었겠죠.”

그저 흑탑주와 함께 저승 던전의 권능을 가져간 자라는 것만을 추측할 뿐.

안타깝게도 문어 용신들의 기억 속에는 딱히 흑막의 정체랄 만한 것이 담겨 있지 않았다.

“흠…….”

말을 들은 서해 용왕이 턱을 괴었다.

“이거야 원. 바다에 온 것이 너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구나.”

그가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쯧쯧 혀를 찼다.

서해 용왕을 바라보며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괜히 바다에 왔다가 변고를 당할 뻔했다는 걱정과 함께, 용왕의 영역에 온 나를 지켜주겠다는 마음이 업경의 권능으로 전해져 왔다.

“늦든 빠르든 저승에도 손을 뻗었을 자들입니다. 그 전에 바다와 힘을 합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두 용왕이 잠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렇게 되었으니 끝까지 함께하지, 염라.”

동해 용왕이 말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동서의 바다는 그대를 우리와 똑같은 권한을 지닌 왕으로 대우할 것이네.”

이어지는 말은 다소 파격적이었다.

“이 바다의 모든 용신들이 그대의 명도 내 명과 똑같이 따라야 할 것이야.”

그 말은 곧 내게도 용궁의 병력을 움직일 권한을 주겠다는 의미였다.

바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실제로 그들을 부릴 수는 없겠지만, 과분한 대우인 것은 분명한지라 나는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그들이 다시금 움직이는 시기는 약 보름 후가 될 것입니다.”

문어 용신들의 기억에서 취한 정보였다.

흑막 관련이라면 몰라도 당장 그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읽었다.

“청공의 정기를 채취해 왔습니다.”

말을 이으며 인벤토리에서 청공의 정기를 담은 여의주를 꺼냈다.

“보름 동안 서해 용왕께서는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시고 용궁의 병력을 정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두 용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독기를 다스리느라 쇠약해진 서해 용왕도 괜찮아지겠지.

전해야 할 것은 다 전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곁에 서 있던 강림 형이 내게 살짝 고개를 숙여 왔다.

“대왕님.”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제 팔을 마저 돌보셔야 합니다.”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다친 팔을 움찔했다.

의식한 순간 재차 통증이 밀려왔다.

서천의 꽃에 휘감긴 팔뚝을 내려다봤다.

사라의 조치 덕에 견딜 만해서 두 용왕을 먼저 찾은 것이었는데.

형은 또 내내 신경 쓰고 있었을까.

“그래, 우리가 그대를 너무 붙잡아 두고 있었군. 어서 쉬어야 할 것을…….”

동해 용왕이 바로 형의 말을 받았다.

“의관들을 보내주겠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게.”

그는 그리 말하며 지체 없이 자리를 파했다.

서해 용왕은 곧바로 정기를 흡수하기 위해 내게서 건네받은 여의주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동해 용왕은 그의 곁을 지키며 우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가 머무는 곳은 용왕의 침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내 방은 가장 안쪽에 자리했는데, 복도 끝자락에 이르러 사라가 걸음을 멈추었다.

“너희는 이제 그만 들어가 쉬어라.”

그리 말하는 사라의 시선이 호구별성과 바리를 지나 강림 형에게 아주 조금 더 머물렀다.

“왕의 몸은 내가 책임지고 돌볼 터이니, 어서.”

그에 강림 형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했지만 사라가 먼저 퉁명스럽게 말을 더했다.

“왕의 상처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너희가 쓸데없이 모여 있으면 정신 사납다.”

“으음, 하긴 진료하는 데 우리가 뭐 필요하겠어.”

팔짱을 낀 호구별성이 분위기를 살피며 사라를 거들었다.

“…….”

강림 형은 서늘한 눈으로 사라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면서도 결국 어떤 말도 얹지 않았다.

-멍! 멍멍!

그런데 그때, 줄곧 옆을 지키던 멍군이 돌연 내게 폴짝 뛰어들더니 나와 떨어지기 싫다는 듯 내 안으로 쏙 들어와 버렸다.

“어…….”

갑작스러운 행동에 괜히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토닥이며 멋쩍게 일행을 돌아보았다.

“밖에 나와 있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냥 두었는데, 음, 이제는 쉬고 싶은가 보네요.”

호구별성이 잘 걸렸다는 얼굴로 강림 형을 향해 이죽거렸다.

“어휴, 그러게 너도 왕한테 쏘옥 들어가는 방법이나 배워 두지 그랬냐.”

잔뜩 비꼬는 말에 한층 날카로워진 형의 눈이 호구별성을 향했다.

형은 잠시간 그녀를 노려보다가 끝내 한숨을 삼키며 나를 보았다.

“저 돌팔이한테만 맡기지 마시고 동해 용왕께서 보내주신다는 의관들에게도 필요한 첨언을 들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거, 설마 내 눈이 물고기보다 못하겠느냐.”

사라는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 쏘아붙이고는, 돌아서서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들어가자꾸나, 대왕.”

내가 차사들의 눈을 신경 쓰는 걸 알고 배려해준 그를 뒤따랐다.

방에 들어서 방문을 닫았지만 문 너머에서는 시간이 지나도록 떠나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혹시 이대로 문 앞에서 계속 기다리기라도 할까 걱정스레 멈춰 섰는데, 다행히 호구별성이 몇 마디 더하는 소리에 이어 다들 물러가는 기척이 들렸다.

“……그래.”

바깥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사라는 입을 열었다.

“너도 이미 그 상처가 어떤 상처인지 알 테지?”

앞서 차사들에게 한 말과 달리, 그는 이미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흑암지옥의 어둠이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 상처는 육체보다 영혼을 건드리는 상처야.”

팔뚝을 곁눈질하며 조용히 대답하자 사라가 가라앉은 눈으로 수긍했다.

“해서 내 힘으로는 당장 치료할 수 없다.”

그가 내 팔뚝에 다시 한번 꽃을 피우며 말했다.

“혼살이꽃이 없는 이상 다른 꽃으로는 그저 육체의 손상을 고치는 것에 불과해. 그래서야 밑 빠진 독에 계속 물을 붓는 것과 다름없지.”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뭐, 그리 다친 것이 어찌 네 잘못이겠느냐.”

사라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은…… 용궁의 의관들과 네 개의 꽃으로 약을 달여 볼 생각이다. 내가 가능한 한 곁에서 꽃을 피워주겠지만 만약을 대비해 둬서 나쁠 것은 없겠지.”

이어지는 말에는 한층 고개가 수그러졌다.

아껴야 할 서천꽃밭의 신성을 나 때문에 계속 소모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의관들과 혼살이꽃을 대신할 방법을 찾을 터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신의 혼은 곧 신의 신성과도 같으니, 바다의 신성이 담긴 재료들로 네 신성을 보충할 수 있을 거야. 아니면 천계에서 감정꽃이라도 얻어 오면 된다.”

나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 그의 어투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독은 반드시 고치마. 너는 그때까지 버텨주기만 하면 된다.”

“……네, 도령님.”

“한데 대체 무엇이 독이 되었는지는 나도 알아야겠구나.”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 네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말이다.”

신의 눈이 나를 살피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시선과 마주한 나는 끝내 숨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발설지옥의 차사들을 봤습니다.”

내 대답에도 사라의 표정은 딱히 변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의 무심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그것에 안정감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아직 왕으로서의 마음가짐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제 병이 되고 만 것이겠죠.”

눈을 가리는 지옥에서 마주친 검은 두루마기 자락과 서늘한 눈을 곱씹으면서.

“왕이 부족하면 그의 신하들이 해를 입는 법이니까.”

또한 왕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불사른 형제들을 떠올리면서.

“다른 차사들에게는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덧붙였다.

내 말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침묵하던 사라는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너는 나한테만 꼭 그런 명을 내리더구나.”

다소 불퉁한 어투였지만, 나는 여느 때처럼 고마움을 담아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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