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장. 당신의 눈을 가리는(5)
기괴한 광경이었다.
문어 용신들이 잡아 뜯은 팔이 새로운 문어 용신들로 자라났다.
꿈틀거리는 팔은 가장 먼저 몸통을 만들어 냈고, 그다음에는 머리, 마지막으로 팔다리까지 뻗으며 완벽하게 재생했다.
“쟤들 저거 문어가 아니라 플라나리아잖아!”
별 해괴한 것을 다 본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었다.
나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애써 주먹 쥐며 용신들을 살폈다.
새로이 증식한 자들이 기존의 용신들처럼 온전한 상태인 것은 아니었다.
문어를 닮은 머리와 몸통, 꿈틀거리는 팔다리를 가진 것까지는 동일했으나 모두 그림자로 빚은 것처럼 온몸이 검었다.
그러면서도 눈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기묘한 붉은 점이 형형했다.
그들 전부가 이쪽을 보고 있었지만 살아 있는 것을 마주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스스로 팔다리를 뜯어낸 용신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팔다리는 그새 새로 돋아 있었는데, 재생된 팔다리는 앞서 팔에서 증식한 이들의 몸처럼 검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하나 재생된 팔다리만큼은 증식된 용신들과 같이 이질적인 기운을 띠었다.
“……아.”
자연스레 업경의 권능이 발동하며 그것들의 본질이 흘러들었다.
지독하게 불쾌하면서도 불길한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그 기시감을 곱씹으며 권능에 집중했다.
의식이 권능을 파고들수록 흐릿했던 기억이 점차 선명해졌다.
“서해 용궁의…… 지옥수.”
흑탑주가 서해 용궁의 터를 빼앗아 길렀던 불경한 지옥수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문어 용신들의 본질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업경의 권능이 그려내는 그들은 문어가 아니라 나무에 가까웠다.
본래의 권능과 다른, 불경하게 왜곡된 힘을 품은 지옥의 나무와 흡사했다.
서해 용궁의 터를 빼앗아 자라던 지옥수.
그것이 여기서는 문어 용신들을 살아 있는 화분으로 삼아 그들의 생명력을 먹고 자라나고 있었다.
문어 용신들은 제 생명력을 바쳐 몸속에 흑암지옥의 지옥수를 키웠으므로, 직접 주술로 흑암지옥의 환상을 만들고 그 육신마저 일렁이는 어둠으로 새로이 빚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당신들에게 지옥의 권능을 심었어.”
그들의 뒤에 있는 누군가의 존재감이 선연했다.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각이 그 존재를 향해 곤두섰다.
“쳐라!”
지독하게 불쾌한 감각 속에서 대장 격 문어 용신의 명령이 들렸다.
수백으로 불어난 용신들이 썰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그래! 해보자, 이놈들아!”
호구별성이 용신 못지않게 크게 소리치며 암녹색 신성을 번쩍였다.
촤아아아악!
병마를 품은 신성에 닿은 용신들은 강한 산을 맞은 것처럼 녹아내렸고, 점액질을 떨어뜨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파아아앙!
그런 그들 위로 이번에는 검푸른 발설지옥의 신성이 번쩍였다.
보이지 않는 물리력에 짓이겨진 용신들이 괴성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그 또한 잠시뿐.
곤죽이 된 용신들의 몸에서 다시금 새로운 문어 용신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몸 안에 품은 지옥의 권능을 이용해 재생하고 또 재생했다.
“……그런.”
몸이 부서질수록 파편으로부터 더 많이 증식되는 적들을 보며 나는 침음했다.
용신들을 양분 삼은 지옥수는 숙주의 몸이 상할수록 더욱 집요하게 생명력을 뽑아냈다.
지옥수가 더 많은 생명력을 뽑아낼수록 용신들은 더 강해진 지옥수의 권능으로 새롭게 재생했다.
저 순환을 끊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재생할 조각조차 남기지 않고 한 번에 쓸어버려야 했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차사들을 바라보았다.
짙은 독기와 검푸른 신성이 계속해서 용신들을 녹이고 짓이겼다.
끊임없이 막대한 신성을 쏟아내며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어떻게…….”
이미 최대 화력이었다.
조금씩 숨이 거칠어지는 차사들의 모습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이대로는 그저 용신들을 더 많이 증식시킬 뿐이었다.
그렇다고 적들이 계속해서 달려드는 상황에 공격을 멈출 수도 없었다.
파아아아악!
정신이 흔들려서였을까.
팔과 어깨가 찢기는 통증과 동시에 다시 한번 검붉은 피가 터졌다.
“……크윽.”
고통에 이를 악물자마자 앞서 사라가 꽃피운 신성이 희게 빛나며 상처를 치료했다.
파아앙!
꽃과 상처가 모두 사라진 팔을 또 한 번 새하얀 신성이 감쌌다.
“대왕, 지금 너는 물러서야 할 때다.”
빛이 사그라들며 그 자리에 언제든 다시 나를 고칠 수 있는 꽃이 피어났다.
“그래야만 나도 다른 차사들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생겨.”
사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분명히…… 왕의 의무는 자기 목숨의 무게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두 차사는 제대로 싸울 수 없는 나를 보호하며 용신들에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을 돌봐야 할 사라마저도 내 상처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차사들이 시시각각 사력을 다해서 싸우고 있는 지금.
머리로는 사라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거부감이 치밀었다.
내 목숨이나 아끼라는 말 앞에 나는 이 순간 내 몸을 파고드는 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해했다.
왕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불사른 나의 형제들.
가장 끔찍한 환상을 불러내는 흑암지옥의 어둠이 차사들의 뒤에 숨어버린 내 몸과 마음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파아아아악!
거듭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터졌다.
“윽……!”
본능적인 거부감에 참담한 심정이 되면서도, 내 차사들을 살펴야 할 사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이대로 끝내버려!”
커다란 문어 용신의 외침.
곧이어 적들이 사방에서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이런 젠장! 이 새끼들은 죽여도 줄지를 않네!”
호구별성이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용신들 사이로 거칠게 독기를 내뿜었다.
머리칼을 흩날리는 역신의 기세는 여전히 사납고 맹렬했지만, 그녀를 감싼 암녹색 신성은 처음보다 확연히 옅어져 있었다.
상당한 힘을 소모한 그녀는 이제 최대 화력조차 내기 힘들어진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두 차사들은 끊임없이 적을 쓰러트렸으나, 쓰러트린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적이 돌아오는 악순환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방법이 있을 터인데 무언가 꽉 막혀버린 것처럼 사고가 원활하지 못했다.
힘을 쓸수록 빠져나오기 힘들어지는 수렁에 갇힌 채로 스스로의 무력함을, 그로 인한 상처를 키우지 않기 위해 입술만 짓씹고 있을 때였다.
-멍멍멍!
멍군이 재차 허공에 달려들었다.
파아아아앙!
호흡이 맞물리듯 번쩍인 검푸른 신성이 허공에 숨어 있던 술사들을 짓이겼다.
“지금껏 계속 싸우고 계셨소, 염라?”
그리고 이때껏 어둠에 가려져 있던 또 한 명의 전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
나를 바라보는 황금빛 용의 눈과 마주한 순간, 나는 비로소 이 상황을 타파할 해결책을 깨달았다.
“저들은 몸을 재생하며 증식하는 자들입니다, 오혜!”
바다의 지배자.
저들을 쓸어버릴 막강한 화력을 지닌 존재에게 나는 외쳤다.
“압도적인 힘으로 단번에 없애버려야 합니다!”
내 말에 오혜의 굳은 눈이 일순 날카로운 빛을 냈다.
“압도적인 힘이라. 용궁의 성역이라면 가능하지.”
아직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을 텐데도, 그녀는 내 요청에 따라 주저 없이 청옥색 신성을 발했다.
파아아아앙!
오혜를 중심으로 눈부신 빛이 번졌다.
길고 늘씬한 몸이 부드럽게 녹아내리며 전혀 다른 형태로 변모했다.
강인한 전사의 팔은 발톱을 기른 단단한 앞발이 되었다.
하얀 갈기 위로 크고 아름다운 뿔이 돋아났다.
서방백룡 광순왕의 딸이 광휘를 휘감은 순백의 용이 되어 강림했다.
고개를 치켜든 바다의 지배자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효후했다.
-성역을 더럽힌 죄를 벌하겠다.
일대를 울리는 포효는 천둥 번개와도 같았다.
콰아아앙!
백룡을 중심으로 우레가 쳤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청옥색 신성이 용신들을 사정없이 헤집었다.
신성한 해구에 고인 바다의 정기가 푸른빛을 뿜으며 백룡을 가호했다.
이곳은 용궁의 성역.
바닷물처럼 끊이지 않는 용의 신성은 범접할 수 없는 재앙과 다를 바 없었다.
빠른 속도로 재생하던 용신들이 몰아치는 신성에 계속해서 끊임없이 갈려 나갔다.
무한히 재생한다 한들, 신성한 해구가 있는 한 그들을 휩쓰는 오혜의 신성 역시 무한하게 힘을 발휘할 터였다.
“미친!”
날뛰는 백룡을 돌아보며 호구별성이 욕설을 내뱉었다.
“필살기 냅두고 맨손으로 평타만 치고 있었네!”
지금껏 강림 형과 애를 쓴 것을 다소 허탈하게 여기는 목소리였다.
“틀렸다! 용이 풀려났어!”
승산이 없다고 느낀 것은 문어 용신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작전은 실패야! 어서 철수해야 해!”
이곳의 키 플레이어는 오혜.
그만큼 작정하고 고립시켰기에 멍군이 그녀를 찾아내는 게 늦어졌으리라.
“철수해라!”
대장 격 문어 용신의 명령이 울리자 우리에게 달려들던 용신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시체도 남겨선 안 된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어 용신의 외침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파아아악!
스스로 목을 쥐어뜯은 문어 용신이 왈칵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퍼어어엉!
직후 쓰러진 문어 용신의 시신 위로 붉은빛을 발하는 기묘한 문자들이 모래처럼 어지러이 뒤덮였고,
화르르륵!
손을 쓰기도 전에 화염이 되어 빠르게 시신을 불태워버렸다.
시체도 남겨선 안 된다는 마지막 말처럼 그는 순식간에 재로 화했다.
“이런……!”
그의 뒤를 따르듯 수백의 다른 용신들이 똑같이 불타 사라져 갔다.
“내가 그들의 육신에서 기억을 읽지 못하도록……!”
그들이 알려져선 안 될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나는 스스로 시체를 불태우는 그들을 그저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이대로 끝내선 안 되는데.
저들의 뒤에 선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내야 하는데.
끝없이 덤벼들던 적들이 어떤 미련도 없이 제 몸을 지워버리는 것이 기괴하면서도, 끝내 그들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울분이 차올랐다.
“제가 다시 모을 수 있어요, 오빠……!”
그 순간 허공을 뚫고 마지막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흩어진 백을 모으면 필요한 기억을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어둠에서 빠져나온 바리가 즉시 땅에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모았다.
[ (!) 무당의 ‘천도(薦度)’가 시작됩니다. ]
불길이 태워버렸던 용신들의 몸이 거뭇거뭇한 모래의 형태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부모의 백을 붙잡아 두고 혼의 기억을 모았던 바리가 이번에는 죽음으로 도망친 용신들을 뒤쫓고 있었다.
“바리…….”
나는 어둠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천도를 시작하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가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요.
길을 나설 때부터 바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혼과 백의 흔적을 복원하는 바리의 천도.
망자의 기억을 읽는 나의 권능.
그 둘을 합치면 미지의 적들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
나는 바리가 천도를 끝내기를 기다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신성한 해구는 더럽혀지지 않았다.
정기를 채취해 가면 서해 용왕은 조금이나마 기력을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문어 용신들의 기억을 통해 그들이 꾸미는 음모의 실마리 또한 잡게 될 것이다.
“돌아가면 상처부터 다시 돌보자꾸나.”
그때 사라가 옆에서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으나, 다른 두 차사는 무언가를 느낀 듯 가라앉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눈을 피해 고개를 조금 떨구며 대답했다.
흑암지옥의 환상을 부리던 용신은 사라졌다.
다만 팔과 어깨에 난 상처에서는 여전히 검고 삿된 기운이 풍겼다.
형제들의 환상 역시 계속해서 뇌리에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이 아직도 흑암지옥의 어둠처럼 내 눈을 가리는 것 같아서 나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36장. 눈을 가리는 것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