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08화 (108/187)

34장. 업신을 모셔라(1)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뭐야, 갑자기?!”

“적인가?!”

난데없는 습격에 모두가 무너져버린 무덤을 돌아봤다.

희뿌연 먼지 속에서 괴한들이 몸을 일으켰다.

거리가 있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얼핏 보이는 실루엣으로는 키가 큰 남녀였다.

“이런……!”

그런데 뜻밖에도 왕도깨비 탈해가 제일 먼저 그들의 정체를 알아봤다.

“특급 위험 경보 대상입니다, 여러분!”

사색이 된 그가 스물네 명의 가신도깨비들을 향해 명령했다.

“모두 보호슈트를 착용하세요!”

보호슈트?

당황스러운 와중 거듭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도깨비들을 쳐다보았다.

파아아앙!

탈해와 도깨비들이 일제히 검붉은 귀기를 발하더니, 장례식을 위해 입었던 검은 정장 대신…… 무슨 우주복 같은 차림새로 변했다.

“으응?”

그게 보호슈트인가?

멍하니 도깨비들을 둘러보며 눈만 끔뻑이고 있자니 탈해가 몹시 비장하게 고개를 돌렸다.

“저들은 서해 용왕의 장남과 차녀입니다, 대왕님.”

반투명한 헬멧 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은 어째서인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현대 문명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고약한 생선들이지요!”

“……아.”

그 순간 활짝 열린 업경의 권능이 탈해의 두려움을 읽어 내었다.

-음? 이건 뭐지?

-뭔진 모르겠지만 제법 튼튼하군.

큰 키의 두 남녀가 얇은 노트북으로 벽이며 가구를 퍽퍽 때리는 장면이었다.

“……그러고 보니 노트북이 뭔지도 모르는 용신들 사이에서 고생했다고 했지.”

용신의 손아귀에서 종잇장처럼 팔랑이던 탈해의 아픈 기억이 계속해서 흘러들었다.

-노트북? 그런 북도 있나?

-퍽퍽퍽!

-흐음. 딱히 소리는 좋지 않군…….

워낙 강렬해서 그런 걸까.

필드가 아닌데도 탈해의 기억들은 내게 가감 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헛기침했다.

수모를 겪은 것은 스물네 명의 가신도깨비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두터운 보호슈트로 갈아입은 가신들에게서도 각각 기억이 밀려들었다.

핸드폰 형태의 가신으로 제기차기를 한다든가, TV 형태의 가신으로 썰매를 탄다든가 하는 참혹한 기억들이었다.

당연하게도 용신이면 아주 치를 떨게 된 탈해가 괴한들을 삿대질하며 말했다.

“워낙에 무식한 자들인지라 무덤도 못 알아보고 다 부숴버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주관적인 편견이 다소 섞인 듯하지만, 나는 탈해의 분석에 어느 정도 수긍하며 다시금 괴한들을 보았다.

누구인지 알게 되자 그들의 모습이 제법 뚜렷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 그들은 분명 낯익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해 용궁의 남매가 맞군요.”

2미터를 훌쩍 넘는 큰 키에 새하얀 머리카락.

황금빛으로 빛나는 차가운 용의 눈까지.

별장군의 기억에서 봤던 서해 용왕의 장남과 차녀가 당시와 똑같이 용맹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용신들이 왜 갑자기 깽판이야?”

눈이 휘둥그레진 호구별성이 황당하다는 투로 말했다.

“글쎄,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기는 하다만.”

사라도 턱을 매만지며 그들을 주시했다.

“이리 무례를 저질렀으니, 곡직불문하고 그냥 둘 수는 없겠습니다.”

강림 형은 반장갑을 낀 손에 검푸른 신성을 발하며 버릇처럼 내 앞을 막아섰다.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달려들 것 같은 모양새였다.

“왕자님께서 먼저 대화를 해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때 바리가 조용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형제분들이시니까요.”

-어어?

그 말에 봉투에 담겨 있던 고등어가 반갑게 지느러미를 흔들었다.

-그게 좋겠소, 염라. 나를 형님과 누님께 데려다 주시겠소?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게 가장 원만한 대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리네 조부에게서 왕자를 건네받았다.

【감히 우리 막내를 고등어에 가둬 놓다니!】

【용서할 수 없다, 파렴치한 무뢰배들!】

그런데 용신들을 향해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신성이 실린 목소리가 일대를 휩쓸었다.

쏴아아아악!

느닷없이 사방에서 높은 파도가 휘몰아쳤다.

물을 지배하는 용신의 권능이었다.

순식간에 솟아오른 파도가 나를 덮치려 들었다.

마른 땅에서 파도가 치다니!

“아니, 잠깐만요! 뭔가 오해가 있는……!”

당황한 나머지 고등어 봉투만 달랑거리며 멈춰 섰을 때였다.

파아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빛을 발하며 발설지옥의 권능이 내 주변의 파도를 일시에 날려버렸다.

“감히 이 땅에서 왕을 노리다니, 당장 목이 떨어져도 불만은 없겠군.”

강림 형이 낮은 목소리로 살기를 내비쳤다.

“그래, 이 새끼들아! 남의 집에서 이게 뭔 행패야!”

호구별성도 독기를 뿜으며 으르렁거렸다.

사납기로는 한반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신이 금방이라도 출수할 기세여서, 나는 황급히 그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잠깐만요, 진정하고 다들 대화부터 좀……!”

일촉즉발.

용신과 차사들 사이에서 한바탕 큰 싸움이 벌어지려는 순간.

【그만들 하시오……!】

신성이 실렸으되, 어딘가 가냘픈 소년의 목소리가 울렸다.

퐁퐁.

퐁퐁퐁.

신들을 둘러싸고 비눗방울처럼 얇은 물방울들이 피어올랐다.

휘몰아치던 파도에 비하면 온화하기 짝이 없는, 고등어 왕자의 권능이었다.

퐁퐁퐁.

왕자가 불러낸 물방울들은 차사들과 용신들에게 부딪쳐 하찮게 터져 나갔다.

서로에게 달려들려던 신들이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퐁퐁퐁퐁.

나는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물방울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등어가 담긴 봉투를 쓰다듬었다.

역시 우리 고등어가 할 때는 한다니까.

***

잠시 뒤.

우리는 사라수대왕 저택 앞마당에서 두 용신들과 함께 자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다만 용신 트라우마가 극심한 탈해와 도깨비들은 우주복 같은 보호슈트로 여전히 온몸을 방비한 상태로, 테이블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모여 있었다.

“우리가 오해를 했소, 염라.”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시오.”

고등어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장남과 차녀가 엄숙하게 사과했다.

막내를 찾아 저승까지 왔는데 오자마자 본 게 형편없는 몸에 갇힌 막내라서 공격한 것이라나.

막내 왕자는 300년 전에도 인간한테 잡혀갔던 적이 있으니까 그렇게 앞뒤 안 가리고 덤빈 것도 이해가 되었다.

“괜찮아요. 형제간에 우애가 좋으셔서 그렇게 된 거죠.”

그들의 사과를 받아주며 새삼 그들을 눈에 담았다.

서해 용궁 최고의 전사라던 장남과 차녀는 과연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고등어 왕자를 바라볼 때만큼은 그 차가운 용의 눈에도 따스한 애정이 묻어났다.

나는 그들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우리 현이를 보호해주어 고맙소, 염라.”

장남이 내게 말했다.

그런데 현이라니.

왕자의 이름이 현이었구나.

……계속 고등어라고 부르느라 신경을 못 썼네.

그, 미안합니다, 현 왕자님.

“나는 위대하신 서방백룡 광순왕의 두 번째 자식 오휼이오.”

“나는 위대하신 서방백룡 광순왕의 세 번째 자식 오혜요.”

장남이 오휼, 차녀가 오혜였다.

이름을 소개한 그들이 다시 봉투 속의 고등어…… 막내 오현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대로는 현이 너를 품에 안아줄 수 없겠구나.”

오혜가 봉투 속의 오현에게 말했다.

“그래, 우리가 막내에게 맞춰주어야겠다.”

오휼도 동의하고는 나를 돌아봤다.

“잠시 모습을 바꿔서 대화를 이어가도 되겠소, 염라?”

그들로 막내처럼 물고기로 변하겠다는 걸까?

형과 누나가 막내를 안아주고 싶다는데 내가 뭐라 할 게 있나.

나는 그냥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아앙!

자리에 앉은 그들의 몸에서 청옥색의 신성이 번쩍였다.

두 용신의 몸은 빛에 완전히 감싸이더니 한순간 수많은 물거품에 뒤덮였다.

그리고 물거품이 흘러내리듯 꺼지며 나타난 것은…….

“호오.”

지켜보던 사라가 눈을 빛냈다.

“이건 마치 아름다움이 고등어의 모습으로 현신한 것 같군.”

“…….”

저게 뭔 소린가 싶지만 진짜로 그랬다.

그들이 한 쌍의 고등어로 변모한 순간, 나는 둥글고 푸르스름한 등줄기에 잠시 넋을 잃었다.

“우와…….”

나도 내가 고등어의 미추를 구분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단언컨대 그들은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등어들이었다.

“이게 진짜 용왕의 자식이구나.”

용왕의 자식은 비늘 하나마저 보석처럼 빛을 발한다는 소문은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

영롱하기 그지없는 모습은 분명 누가 봐도 영물이었다.

“……그런데.”

넋을 잃고 고등어들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뭐 하시는 거예요?”

고등어로 변한 그들의 아름다운 몸이, 어째서인지 그 우아한 풍모와는 달리 하찮게 퍼덕이고 있었다.

퍼덕.

퍼덕퍼덕.

“……?”

나는 퍼덕대는 고등어들을 내려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퍼덕퍼덕.

퍼덕퍼덕퍼덕.

모습을 바꿔 막내를 안아줄 거라던 남매는 똑같은 고등어가 되고도 그저 옆으로 몸을 누인 채로 계속 꼬리만 퍼덕거렸다.

퍼덕퍼덕.

나와 차사들은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적 사이로 고등어 퍼덕이는 소리만 한참 울리던 그때, 용신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물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을 깜빡…… 했소.

-봉투에…… 넣어……주시겠소?

여전히 고상하고 품위 있었으나, 지친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슬슬 숨이…… 막히는…데.

하찮게 퍼덕이는 두 고등어를 내려다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 바…… 휴우.”

“그대로 말씀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대왕님.”

그래도 차마 왕족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말꼬리를 흐리자, 옆에 앉은 강림 형이 내게 조용히 간언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왕이 돼서 남의 나라 왕족을 모욕할 수는 없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얼버무렸다.

“……바다의 보배들이시군요.”

-음? 칭찬……고맙소.

-그리 말해…주다니…… 기쁘오, 염…라.

고등어들이 퍼덕이며 내 말을 받았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조심히 두 고등어를 막내 고등어의 봉투 안에 넣어주었다.

“그런데 너무 좁지 않으세요?”

다만 넣으면서도 이게 맞나 싶어 물었다.

애초에 그리 큰 봉투는 아니었던지라, 고등어가 셋이나 들어가니 꽉 끼어서 지느러미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어 보였다.

-괜찮소. 떨어져 있는 것보단 붙어 있는 게 낫소.

그새 좀 더 납작해진 오휼이 근엄하게 대꾸했다.

-나도 형님 누님들이 좋소!

사이에 낀 막내 오현도 기쁘게 들썩였다.

……그래, 용궁 형제들이 우애가 좋긴 좋구나.

보고 있는 나도 마음이 훈훈해져서 괜히 내 큰형님을 돌아봤다.

우리 저승의 큰형님도 분명 이백 년 만에 생긴 막냇동생을 참 많이 아껴주셨는데 말이지.

-제연아, 갓이 비뚤어졌다.

-이제연, 너는 왕의 차사가 꼴이 그게 무어냐.

-내 너를 가르치려고 서천꽃밭까지 다녀왔지 않느냐. 자, 꽃이 이만큼 있으니 오늘은 더 힘을 낼 수 있겠구나.

-허. 발설지옥의 차사가 겨우 그거 맞았다고 쓰러지면 되겠느냐. 어서 일어나라.

-차는 무슨.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한 시진이면 된다. 뛰어라.

“…….”

어째 떠올릴수록 이게 추억인지 트라우마인지 헷갈리는데.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대왕님?”

눈이 마주친 강림 형이 물었다.

“아뇨, 그냥 서해 용궁 형제들의 우애 좋은 모습에 저도 잠시 옛 생각이 나서요.”

나는 형과의 추억인지 뭔지를 되씹으며 대답했다.

“옛 생각이요?”

놀랍게도 형은 난생처음 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뭘 또 그런 것을 그리워하고 그러십니까.”

안 그리워, 형!

양심 있어? 대체 뭘 어떻게 미화했길래 그렇게 온화하게 웃는 거야!

“그런데 여기는 그럼 막내 왕자님을 찾아오신 건가요?”

문득 바리가 고등어들에게 물었다.

-음?

한창 동생과 지느러미를 맞대던 남매가 멈칫했다.

-아니, 꼭 그것만은 아니오.

-육지에 나와야 할 일이 생겨 막내도 찾으러 온 것이오.

고등어들이 금세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바마마의 병세가 하루가 다르게 깊어지고 있소.

그에 나는 서해 용왕이 얼마 전에 토끼 간을 먹고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바마마께서 기력을 되찾으시려면 업신이 필요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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