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07화 (107/187)

33장. 아니, 그거를 왜(2)

형의 손에 들린 내 가짜 몸을 바라봤다.

안에 혼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크게 다쳐서일까.

몸 곳곳을 붉게 물들인 핏자국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몹시도 창백해 보이는 안색이었다.

피부가 드러난 곳마다 생채기가 가득했지만 입고 있는 옷만은 아주 멀쩡했다.

원래 가짜 몸의 옷은 매일 한 번씩 자동으로 수복되는데, 혼이 없어도 그건 그대로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옅은 갈색 머리칼은 피에 젖어 얼룩덜룩했고, 평소보다 살짝 더 곱슬기가 돌았다.

감긴 눈 옆으로 길게 진 피딱지나 터진 입술과 달리 흰 셔츠와 베이지색 라운드 니트는 새것처럼 정갈했다.

내 모습을 한 가짜 몸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죽은 듯 늘어져 있는 모습을 코앞에서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아니, 너 아직도 그거 쥐고 있었냐?”

지켜보던 호구별성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형이 가짜 몸을 챙겼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흠, 그래도 우리 왕이 다쳐 있는 것을 보니 별로 기분은 좋지 않구나.”

그 옆에서 무심하게 한마디 한 사라도 퍽 언짢은 표정이었다.

파아앙!

눈 감은 가짜 몸 위로 오색 꽃잎이 피어났다.

빼곡히 자리했던 상처들이 빠르게 아물었고, 창백했던 안색 또한 생기를 되찾았다.

“으음, 멀쩡하면 그냥 여분으로 가지고 있어도 될 것 같긴 한데요.”

나는 상처가 사라져 그냥 편안히 잠든 것처럼 보이는 몸을 살피며 말했다.

위기 상황에 가짜 몸을 벗고 영체로 돌아가는 것은 나름 신의 특권이었다.

아무래도 영체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은 그냥 죽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몸이 지나치게 손상되면 새 몸을 써야 하기 때문에, 가짜 몸 여분은 많을수록 좋았다.

사라가 없었다면 벌써 여러 번 바꿔 썼을지도 모르고.

“으음, 갑자기 그 지경이 됐던 걸 그대로 쓰긴 좀 그렇지 않아?”

내 말에 호구별성이 영 찜찜하다는 듯이 말했다.

“뭐, 지금은 딱히 이상이 느껴지지 않는다만…… 아무래도 그렇지.”

사라도 썩 내키지 않는 듯 그녀의 말을 받았다.

가짜 몸 여분은 아직 있었고, 두 차사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서 나는 별다른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형은 어쩌다 그걸 가지고 있었어요?”

“대왕님께서 쓰시던 몸이니 처분을 명하실 때까지 품에 두었을 뿐입니다.”

형은 품에 안은 내 가짜 몸을 한번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명하시면 처분하겠습니다.”

형은 언제라도 그리하겠다는 듯 담담하게 덧붙였다.

가지고만 있었을 뿐, 내가 정말로 그 몸을 다시 쓰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는 기색으로.

그런 형을 보며 불쑥 짠한 마음이 들었다.

내 가짜 몸을 놓지 못한 형 위로, 삼백의 형제자매를 떠나보내던 때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혼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발설지옥의 차사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차사들은 그나마 조금씩 혼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헌터들과의 싸움이 끝난 뒤, 나와 형은 몇 년간 그 남은 혼들을 최대한 복원해서 환생시키는 일을 했다.

한 명, 한 명 그렇게 형제자매들을 이승에 돌려보낼 때마다…… 형은 한동안 환생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보이지 않는 너머를 바라보곤 했다.

당시 나는 그런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 영혼만 남아서 저승을 떠난 형제들이 약간의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형은 아마 그것을 움켜쥐고 하나하나 모아 두었을 거라고.

이번에도 형은 그런 마음으로 내 가짜 몸을 쥐고 있었던 게 아닐까.

때로는 무언가의 흔적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면서도 쉬이 놓을 수 없는 것처럼.

그래, 단지 소모품에 불과한 물건을 아직도 저리 품에 안고 있는 것처럼.

“그래도 저랑 똑같이 생긴 몸이잖아요.”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알 수 없는 저주에 걸렸던 몸을 그대로 쓰기는 찝찝하고, 그렇다고 그냥 없애버리자니 그것도 왠지 마음에 걸려서.

“그냥 장례 치러주면 안 될까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도 좀 엉뚱한 제안을 내놓았다.

“제가 사실, 던전에서 죽는 바람에 아직도 무덤이 없거든요.”

49년 전, 내가 죽던 날을 떠올리면서.

“제가 가장이라 저 죽고 네 명 있던 동생들도 줄줄이 굶어 죽어서요. 그렇다 보니 49년을 젯밥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는데…….”

말하자니 어째 머쓱해져서 말꼬리를 흐리는데 어느새 차사들 사이로 숙연한 침묵이 감돌았다.

“어휴, 불쌍한데 그냥 한번 해주자.”

결국 호구별성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산 사람 부탁도 들어주는데 죽은 사람 부탁을 못 들어주겠느냐.”

뒤이어 사라도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강림 형은 아무 말 없이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만 있어서 나는 그저 작게 웃어 보였다.

***

그리하여 객사하고 구천을 떠돈 지 49년.

인간 이제연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일반적인 장례는 아니고, 그냥 삼차사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제연.】

【이제연.】

【이제연.】

월직차사와 호구별성과 일직차사 사라도령 사이에 선 강림차사 강림도령이 법도에 따라 내 이름을 세 번 불렀다.

【하늘이 부여한 사명을 다하였으니, 그대는 이제 땅의 부름을 받으라.】

신성이 실린 목소리를 들으며 형이 날 찾아왔던 49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 나는 죄를 짓고 자살하여 차사가 되어야 했던 터라 형은 죄인을 끌고 가듯 오랏줄을 들고 찾아왔고,

지금 그의 손에는 오랏줄 대신 저승의 법도대로 내 수명이 적힌 명부가 들려 있었다.

이제연(李濟緣)

-생(生) 임오년(壬午年) 갑진월(甲辰月) 정미일(丁未日)

-사(死) 임인년(壬寅年) 임자월(壬子月) 병신일(丙申日)

-향년(享年) 이십일세(二十一歲)

좀 허접하지만, 저래 봬도 저승왕의 지장이 찍힌 진짜 명부였다.

내가 직접 찍었으니까.

내 장례가 열린다는 소식은 금세 퍼져 나갔다.

탈해와 도깨비들은 하던 일도 멈추고 잠깐 사이 아주 멋들어진 관을 짜주었다.

나는 그 관에 수의로 갈아입힌 가짜 몸을 곱게 눕혀 놓고 사라수대왕 저택의 뒷마당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영정 사진까지는 준비하지 못한 터라, 헌터 전용 단말기로 급하게 셀카를 찍은 뒤 액자 대신 세워 두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대왕님.”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왕도깨비 탈해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상주가 누구신지요.”

상주와 인사를 나눠야 하는데 막상 그 상주가 분명치 않았던 것이다.

“어, 그러게요……?”

나는 멍청히 서 있다가 말했다.

“제가 주인공이니까 그냥 제가 상주할까요?”

“…….”

그리하여 나는 내 장례식의 상주가 되어 왕도깨비 탈해와 그와 함께 조문을 온 스물네 명의 가신도깨비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어휴, 정장도 저렇게 단체로 입으니까 되게 수상하지 않냐.”

화려하게 수놓인 검은 저고리와 붉은 치마 대신 소복을 입은 호구별성이 도깨비들을 돌아보며 팔짱을 꼈다.

평소 도깨비들이 격자무늬 셔츠만 입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더니, 다 똑같이 갖춰 입은 검은 정장 차림 역시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몰몬교 같다.”

“…….”

“아니면 뭐냐, 다단계 사업체라든가.”

“…….”

나는 대답 없이 그린 듯한 미소만 지은 채 계속해서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차례로 향을 꽂고 맞절을 끝낸 도깨비들이 이후 곳곳에 앉아 삼삼오오 화투를 치기 시작하면서 썰렁하던 빈소도 제법 분위기가 좋아졌다.

-소식 들었소, 염라.

다음 조문객은 광천못에서 지내던 고등어 왕자였다.

-부디 극락왕생하시오.

물이 없으면 거동이 불편한지라 투명한 비닐 봉투에 담겨서 온 고등어가 동그란 눈에서 방울방울 물방울을 흘렸다.

가까이 지내던 내 장례 소식에 순박한 어린 왕자의 감정이 사무친 모양이었다.

“……!!……!!!”

“…!……!!…!”

왕자를 데려다준 바리네 조부모도 내게 묵례하고는 왕자의 몫까지 향을 피워주었다.

“저도 왔어요, 오빠.”

마지막 조문객은 바리였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린 바리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분명 좋은 곳으로 가실 거예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 제연아.

2022년 12월 9일.

그날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대설(大雪)도 이틀이나 지났던 때였지.

겨울바람에 세상을 저주하며 죽었지만, 놀랍게도 너는 정말 좋은 곳에서 눈을 뜨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언제나 괴롭고 슬픈 것이기에.

그곳에서 다시금 수많은 죽음을 목도한 너는, 그만큼 더 세상의 저편을 사랑하게 되겠지.

그 모든 불우한 죽음들과 함께.

***

짧은 장례가 끝났다.

어차피 조문을 올 사람들은 다 왔기 때문에, 지체할 것 없이 바로 발인으로 넘어갔다.

도깨비들이 만든 운구차에 실린 내 가짜 몸은 금세 우리 대왕님을 모신 자리에 도착했다.

이전에 우주강도단에 의해 철거당할 뻔했던 우리 대왕님의 묘였다.

그리하여 하관과 달구질까지 끝낸 직후.

커다란 선왕의 능 옆에 조그만 봉분이 하나 새로 생겼다.

근래 들어 충신을 넘어 간신을 자처하는 탈해와 몇몇 가신도깨비들은 기왕 짓는 것 선왕보다 크게 짓는 것은 어떻냐고 부추겼지만…… 나는 우리 대왕님 묘의 절반쯤 되는 크기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렇게 보니 무덤도 아빠랑 애기 같다, 야.”

큰 무덤과 작은 무덤을 번갈아 보며 호구별성이 말했다.

“흐음, 비석은 나중에 제가 좀 더 품격 있는 것으로 고쳐 놓겠습니다.”

강림 형은 대충 세운 비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좁혔다.

발설이와 형제들의 팻말도 손수 썼으니, 아마 내 비석도 조만간 더 멋들어지게 바뀔 것 같다.

“그래도 그냥 흙만 덮어 놓으니 좀 허전하긴 하구나.”

옆에선 사라가 말했다.

“나중에 꽃나무라도 심어 두어야겠다.”

꽃밭의 신이 직접 꽃도 심어준다니 절로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객사한 지 49년 만에 생긴 무덤이지 않나.

저기도 집이라면 집인데, 나름 별장이라도 생긴 기분이었다.

반백 년을 젯밥 한 번 얻어먹어 본 적 없지만, 그래도 돌아오는 추석에는 내가 직접 동그랑땡을 올릴 수도 있겠지.

그런 상상을 하며 나는 아직 해산하지 않은 조문객들을 돌아봤다.

“그러면 이제 다 같이 점심이나 먹죠.”

도깨비들은 하루 종일 공사를 하느라 바빠서 이렇게 다 같이 모여 밥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까 로봇 하인들한테 육개장을 끓여달라고 했거든요.”

저택 뒷마당에 빈소를 차려 놓은 대신 앞마당에는 재차 임시 주방이 설치되었는데, 벌써 고깃국 냄새가 진득하게 풍겨 왔다.

다섯 대의 로봇 하인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테이블마다 따끈한 수육에 술까지 차리고 있었다.

로봇들의 솜씨가 훌륭하니 분명 아주 맛있을 것이다.

“고인이 대접하는 거니까 다들 배불리 드셨으면 좋겠어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조문객들과 함께 마당으로 향했다.

장례식이라지만 그저 유쾌하기만 한 분위기에 나도 새삼 들떠서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콰아아아앙!

그런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바로 근처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어……?”

생각지 못한 사태에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았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굉음이 연달아 울리면서 희뿌옇게 먼지가 일었다.

“아니, 뭐야?!”

“뭐지?!”

“허?!”

갑작스러운 소란에 모두가 어리둥절하게 소리의 근원지를 돌아보았다.

“어어?!”

희뿌연 먼지 사이로…… 처참하게 무너진 봉분이 눈에 들어왔다.

“내 무덤!”

불과 몇 분 전에 흐뭇하게 다듬었던 봉분이, 그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무참히 망가져 있었다.

옆에 있던 우리 대왕님의 묘는 용케 변고를 피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만…….

마치 거인이 손가락으로 힘껏 튕기기라도 한 것처럼 하찮게 무너져버린 무덤을 보며 나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관 뚜껑 닫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연 능(陵).

세워진 지 10여 분 만에 반파(半破).

무너져버린 무덤 뒤.

난데없이 내 무덤을 폭격한 괴한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33장. 아니, 그거를 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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