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장. 영겁의 시간이 고이면(1)
이런 곳에서 바리공주라니.
내가 그녀를 본 것은 저승에 오고도 49년이 지나도록 지금이 처음이었다.
워낙에 유명하여 인간일 적부터 이름을 알았음에도, 정작 그녀는 신화가 현실이 된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제대로 말도 못 꺼내는 얼빠진 모양새였지만 그녀는 웃음을 띤 얼굴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무언가 궁금한 게 있소?”
바리공주가 내게 물었다.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안다고 말하는 듯한 깊은 눈빛에 나는 결국 주저하던 말을 꺼냈다.
“……당신은, 제가 아는 바리십니까?”
필연적으로 머릿속을 스치는, 그녀와 똑같이 깊은 눈을 가진 소녀를 떠올리면서.
“글쎄?”
내 물음에 그녀의 두 눈이 가벼이 반원을 그렸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 모습이 장난스러우면서도 신비로웠다.
“…….”
나는 되돌아온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차사들이 그러했듯, 나도 내가 아는 소녀가 무조신 바리공주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바리공주는 내가 아는 바리와 하나도 닮지 않았다.
시원스럽게 뻗은 이목구비는 성인임에도 어딘가 천진한 느낌이 있어, 되레 나이보다 조숙해 보이는 바리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다.
그저 깊고 신비한 눈빛만이 어딘가 그녀를 떠올리게 할 뿐.
겉모습만으로는 같은 사람은커녕 자매나 친척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아닌 것 같습니다.”
때문에 나는 내가 느끼는 바를 대답했다.
“당신은 제가 아는 바리가 아닙니다.”
그녀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내 답을 부정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눈을 맞추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그대로를.
“그런데 제가 아는 바리는, 당신이 맞습니다.”
그것은 업경의 권능이 읽어 낸 그녀의 본질이었다.
무조신 바리공주는 분명 저승의 바리가 아닌데, 저승의 바리는 무조신 바리공주였다.
나 자신도 그 의미를 명확히 해석하지 못해서 그저 눈앞의 바리공주를 다소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신비로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대는 존재란 과연 무엇이라 생각하시오?”
나로서는…… 아직 무어라 대답하기 버거운 질문이었다.
“그대를 둘러싼 모든 인과를 걷어낼지라도, 그대는 존재한다고 생각하시오?”
뜻을 알 수 없는 질문 앞에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꽤나 멍청한 얼굴이 되었을 텐데도 그녀는 너그럽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
나는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계속 보기만 하다가, 끝내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목소리를 죽였다.
“그게 제가 당신께 드린 질문과 관계가 있는 건가요?”
겨우 그렇게 물었더니 그녀는 부드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관계가 있지.”
검고 깊은 눈에 나를 담아내며.
“그대는 이 우주의 중심이니까.”
그렇게만 말하고, 바리공주는 내게 해야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내 옆에 있는 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비로소 그대와 나의 시간이 맞닿는군, 단군.”
그녀의 말에 나는 새삼 신과 인간을 하나로 엮어 바라보았다.
잠시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에게선 처음 만난 것 같으면서도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그런 모순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단군과 바리공주.
그들은 똑같이 시공간을 초월한 눈을 가졌으니까.
그러니 그들은 수천 년의 세월을 넘어 서로를 알고 있었으리라고.
단군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훨씬 전, 머나먼 과거에서부터 다가올 미래를 살펴 왔던 바리공주가, 먼 훗날 그녀와 똑같이 미래를 살피게 될 단군과 시선이 얽혔던 것이라고.
“내 언젠가 그대와 시간이 닿는다면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대는 나와 눈이 겹치는 유일한 인간이었으니까.”
영겁의 시간이 담긴 듯 검은 눈은 마치 심연 같았다.
“유일한 것은 고독하기 마련이야. 그래서 그대를 만나면 꼭 말하고 싶었어.”
아이처럼 장난스럽던 웃음은 어느새 가신 채였다.
“그대가 고독한 것은 시간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야.”
애써 위엄 있는 표정을 지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온화한 눈으로 바라볼 뿐임에도 바리공주의 얼굴은 분명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그것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존재의 전부로 여겨서야.”
말을 마친 그녀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단군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대답 없이 듣고만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느끼기에 그것은, 전혀 명심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적대감을 보인다거나 오만함이 드러난다거나 하는 얼굴 또한 아니었다.
내가 느낀 것을 바리공주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건만, 그녀는 그 대답에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마치 그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둘의 대화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단군은 신들의 권위를 보통의 인간들처럼 크게 여기지 않는다고.
그가 신들을 내려다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신의 말이라고 새겨들을 만큼 신을 경외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반도의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신과 가까운 자리에 머무는 그였다.
신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기실 당연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염라여.”
바리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꼭 해주어야 할 일이 있소.”
단군과 같은 말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녀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만 전할 뿐 자세한 사정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거나,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물론 그 전에 그 몸을 풀어줘야겠지?”
바리공주가 손에 석장을 꺼내 쥐었다.
끝에 오방색 매듭과 방울이 달린 석장이었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손에 쥔 석장으로 발밑에 원을 그렸다.
처음에는 단순한 원이었던 그것은 이내 원 모양으로 둥글게 쓰인 어떤 문자열이 되었고, 어느 순간 더욱더 많은 문자들로 변해 하얗게 산개했다.
“……아.”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끼며 바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 이제연 (염라) ]
* 권능 – 권선, 징악, 죽음, 사후세계
* 스킬 – [L]업경, [L]명부, [L]도산지옥(lv.1), [L]화탕지옥(lv.1), [L]한빙지옥(lv.1) ……
* 체력 100/100
* 근력 100/100
* 마력 100/100
* ……
한순간에 형편없던 몸이 모든 스탯이 최고치를 찍은 몸으로 바뀌었다.
이전에는 저승 던전을 클리어하고서야 최대 스탯을 찍었는데.
스탯이란 게 이렇게 쉽게 올릴 수 있는 거였나?
“우주는 이미 그대에게 그만큼의 육체를 허락했으니까.”
바리공주가 덧붙였다.
“그대가 새로운 몸을 쓰게 되더라도 즉시 그만큼의 능력을 회복할 거야. 그 몸에 걸려 있던 주술은 그 회복을 막는 주술이었으니.”
즉 어떤 가짜 몸에 들어가도 스탯은 자동적으로 100에 맞춰지는데, 그걸 주술이 막고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는 걸까.
“한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말을 잇던 바리공주가 문득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는 깊고 검은 눈으로 잠시 나를 바라본 끝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확실해지면 말하도록 하겠소.”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는 듯했으나, 그녀는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자, 이제 우리가 그대와 함께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만.”
바리공주가 안쪽을 가리켰다.
땅굴처럼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모르긴 해도 일대를 잠식한 북방의 한기는 그쪽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우선 그대의 신하들에게 인사를 해야겠군.”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대왕님!”
익숙한 목소리에 이어 크고 검은 것이 시야를 가렸다.
거대한 파도처럼 차갑게 몸을 적시는 묵직한 감정들과 함께였다.
“무사하십니까.”
“……형.”
강림 형이었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걸까.
내 어깨를 잡은 형이 가늘게 흔들리는 눈으로 내 몸을 훑었다.
언제나 서늘한 얼굴로 중심을 잡던 평소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내가 사라진 동안 걱정이 컸던 모양이었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형, 저 괜찮아요.”
도무지 불안을 숨기지 못하는 눈을 올려다보며 나는 그의 팔뚝을 잡고 작게 토닥였다.
“갑자기 모르는 곳에 떨어져서 조금 당황하긴 했는데, 곧바로 도움을 받았어요.”
이 이상 쓸데없이 형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몸에 갇혔었다는 말을 구태여 할 필요는 없었다.
영체가 되기 직전 온몸이 봉제 인형처럼 터져 나가던 거라도 떠올린 걸까.
몇 번이고 내 몸이 멀쩡한 것을 확인하던 그는 도움을 받았다는 말에 그제야 내게서 시선을 떼었다.
“……바리공주님?”
형은 그녀가 있는 줄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불안에 잠겨 있던 검푸른 눈에 비로소 의문이 드리웠다.
“그리고…….”
또한 그 시선이 뒤쪽에 선 단군에게 닿은 순간, 내 어깨를 잡은 그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바리공주야 그렇다 쳐도, 인간인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을 터였다.
나도 그의 도움을 그저 고맙게만 받아들이지 못했으니까.
“오랜만이오, 강림.”
바리공주가 형을 보며 반갑게 웃었다.
“그대가 걱정이 컸겠지.”
그녀를 뒤늦게 발견한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이미 한 번을 잃었으니, 잠깐의 헤어짐도 용납 못 하지 않겠소.”
바리공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한번 형의 감정이 밀려들었다.
겨울 파도처럼 내 심장마저 시리게 적셔 오는 감정이었다.
왕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직 서툰 권능이었건만, 업경은 형의 그 감정만은 유독 선명하게 읽곤 했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감정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형이 그 감정을 정말로 ‘자신의 업’이라고 여기기 때문일까.
나는 점점 더 선명해지려는 권능을 갈무리하며, 형에게서 조금 몸을 물렸다.
“형, 근데 여기는 어떻게 온 거예요?”
나조차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데, 어떻게 이리도 금세 나를 찾아낸 걸까.
어느새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형이 내 양어깨를 감싸듯 붙잡았던 손을 거두었다.
“저승의 바리가 깨어났습니다, 대왕님.”
말을 잇는 그의 눈이 다시 바리공주를 향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으나, 아마 그도 같은 이름의 소녀와 무조신 바리공주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럼에도 그 의문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 아이가 이곳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깨어난 바리가 나를 찾은 거구나.
그렇게 납득하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형의 어깨 너머로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전하!”
“대왕!”
두 차사의 목소리였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먼저였고, 이어서 다급한 발소리가 뒤따랐다.
이윽고 멀찍이서 황급히 달려오는 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삼 기척도 없이 달려와서 대뜸 나부터 붙잡은 형이 새롭게 보였다.
“형, 얼마나 빨리 온 거예요.”
내 말에 형은 뒤쪽을 곁눈질하더니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저들이 느려터진 겁니다.”
몹시 못마땅하다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 태도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돌아왔다는 기분이었다.
“……어어?”
곧 다른 두 차사 또한 내 앞에 다다랐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바리공주와 단군을 발견한 호구별성이 영문 몰라 하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옆에 선 사라도 생각지 못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둘을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보다 몇 발 뒤처져 있던 바리마저도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소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신이,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소녀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