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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장 (3) (91/187)

28장. 지금 그의 곁에는(3)

저승의 입구.

바퀴가 멈추며 거칠게 바닥을 긁었다.

시동을 끈 호구별성이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뛰다시피 한 걸음으로 서천꽃밭에 다다랐을 때, 먼저 와서 기다리던 시커먼 놈이 눈에 들어왔다.

“…….”

천천히 걸음을 멈추며 호구별성은 강림을 살폈다.

놈의 얼굴은 여전히 서늘하게 가라앉은 채였다.

서 있는 자세 또한 목석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항상 단정히 넘겼던 머리칼만이 다소 흐트러져 있다는 게 평소와 다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공기가 무거웠다.

건드리면 베일 듯 살벌한 눈빛이 깨지기 직전의 얼음장인 양 위태로웠다.

굳게 다물린 입매에서 오히려 놈이 애써 짓씹는 불안이 그대로 전해졌다.

‘꼭 주인 잃어버린 사나운 개 같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그에게 부러 조소를 지었다.

“뭐야, 그렇게 서둘러야 한다더니 너도 이제 막 왔냐?”

정리할 경황도 없어 뵈는 머리를 비웃었더니, 그제야 놈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한 점의 동요 없는 무표정이었지만 새파란 두 눈만은 뭐든 물어뜯으려는 맹견의 것처럼 사나웠다.

그런데도 시비를 받아친 것은 놈이 아니라 옆에 선 노친네였다.

“별성, 지금 쓸데없이 싸움을 걸 때더냐.”

뻔뻔한 핀잔에 호구별성은 기가 막혀서 그를 돌아보았다.

“염병, 그게 영감이 할 소리야?”

“…….”

그 말에는 저도 할 말이 없었는지 사라가 대꾸 없이 팔짱을 꼈다.

그 꼴에 강림도 굳이 더 보기도 싫다는 듯 그들에게서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두 노인이 바리를 깨우러 갔다.”

그렇게 내뱉고는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바리가 잠들어 있는 사라수대왕의 저택만을 응시했다.

그 말에 호구별성도 결국 별수 없이 시선을 돌렸다.

사라도, 강림도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왕에 대한 걱정의 말조차 이어지지 않는 그 불편한 침묵 속.

호구별성은 지금껏 그들의 결속이 핏덩이 새 왕에게 달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애초부터 하늘의 천신과 저승의 차사, 그리고 이승의 역신이었다.

태어난 자리도, 타고난 천명도 셋은 너무나 달랐다.

영원을 사는 동안에도 서로를 소 닭 보듯 대하는 게 당연했다.

함께 새 염라의 차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따금씩 마주치다 겨우 한 번쯤 ‘그래, 그러고 보니 저런 신도 있었지’ 했을 것이다.

‘이제 보니 생로병사라는 이름으로 콩가루를 뭉쳐 놨었구나.’

뒤늦은 깨달음에 호구별성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 어린 녀석을 딱히 왕이라고 추켜세워준 적도 없는데, 녀석이 돌아오면 이제라도 그 공을 한 번은 꼭 치사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되레 입맛이 썼다.

반대로 혹시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는 다른 두 차사와 영원히 서로를 볼 일이 없으리라는 생각도 뒤따랐기 때문이다.

녀석의 부재가 이제야 새삼 무거웠다.

천 년, 이천 년을 여상하게 넘겼던 인연이 사뭇 뼈아프게 조각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만큼.

그때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여럿의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오셨군요.”

왕도깨비를 위시한 도깨비들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가운데 선 왕도깨비 석탈해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왕 없이 차사들만 돌아온 것만으로도 벌써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알았으리라.

저승에 완전히 터를 잡은 이후로 부쩍 새 왕에게 의지하는 게 눈에 보이던 왕도깨비였다.

그럼에도 그는 제 쪽에서 먼저 염려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듯, 그렇게만 물어 오며 차사들의 안색을 살폈다.

“…….”

그러나 그 물음에마저 누구도 대답하는 차사가 없었다.

왕도깨비와 가신들의 낯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호구별성은 결코 입을 열지 않으려 하는 두 차사를 흘겨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들도 이제 저승의 가솔들이니 알 것은 알아야 했다.

한데 두 차사 모두 그걸 제 입으로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을 안 한다고 없는 일이 되는 것도 아닐진대, 구태여 입 밖에 내지 않으려는 저 하등 쓸모없는 고집이란…….

그래, 새 왕과의 인연이 호구별성 자신보다 그들 쪽이 더 깊은 만큼 이해는 되면서도, 동시에 아주 밉상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신이라는 것들이 저 모양이니 자기라도 나설 수밖에.

한숨을 내쉰 호구별성이 쓸모없는 두 차사 대신 입을 열 때였다.

“그게, 아무래도 우리 왕이…….”

“그분은 무사하세요.”

그때 불쑥 누군가 끼어들었다.

“무사하시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호구별성은 눈을 크게 뜨며 곧바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나이에 걸맞지 않게 차분한 눈빛의 소녀가 차사들과 도깨비들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소녀의 양옆으로 뼈만 남은 두 노인이 공손히 손을 모으고서 소녀를 따랐다.

긴 잠에서 깨어난 바리였다.

천벌 기도로 하얗게 세었던 머리칼은 다시 건강한 칠흑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보름이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했건만, 작은 몸에서는 오히려 근원을 알 수 없는 생기가 넘쳤다.

무릎 위로 나부끼는 하얀 치맛단마저도 신선의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게 정말이냐, 바리야?”

재차 확인하면서도 호구별성은 이미 소녀의 그 말만으로 갑갑함이 다소 가신 상태였다.

명치를 짓누르던 바위가 대번에 뽑혀 나가는 기분이었다.

신의 이름을 받은 소녀의 말에는 분명 그 정도의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달리 강림은 조금도 얼굴을 펴지 않은 채로 물었다.

“어디 계시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라는 듯.

침착함을 가장한 얼굴에서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 격양된 불안이 느껴졌다.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

강림을 돌아본 바리가 곧장 대답했다.

“틀림없이 늦지 않게 다시 뵐 수 있을 거예요.”

그 외에는 그 사나운 신을 달랠 말이 없다는 걸 충분히 아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강림을 진정시키고는, 소녀가 다시금 현현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그분 곁에는, 이 한반도에서 가장 깊은 눈을 갖추신 분들이 계시니까.”

***

창살의 바깥은 더욱이 기묘했다.

겉보기는 꼭 바위를 깎아 만든 지하 도시 같은 모양새였는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이며 벽이 점점 더 기이해졌다.

처음에는 그저 암벽에 가까운 형태였으나, 점차 이때껏 본 적 없는 광석의 형태가 되어 갔다.

말하자면 현무암처럼 검은 표면에 간혹 사금을 뿌린 듯 반짝거리는 광석이었다.

한데 자세히 보니 광석은 애초부터 검은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검게 물들어 보일 정도로 빼곡하게 적힌 무언가의 문자열이었다.

문자열로 이루어진 광석들로 채워진 공간.

약해진 몸 대신 활짝 열어놓은 업경의 권능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이곳이 이때까지 겪어본 적 없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업경의 권능에 동의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감각을 잡아챘다.

질척하게 살갗을 적셔 오는, 이 짙고 어두운 한기로부터.

“……혹시 여기가 흑탑의 공간인가요?”

그래, 흑탑.

공간 전체에 감도는 한기만은 내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흑탑주가 품고 있던 북방의 한기와 비슷하게 느껴집니다만.”

내 물음에 앞서 나가던 단군이 천천히 나와 걸음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흑탑의 전설이 만들어 낸 공간입니다.”

“전설이 만든 공간?”

나는 그 표현에 의문을 표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필드와는 다른 건가요?”

“그렇죠. 시스템보다는 주술이 만든 것에 가깝습니다.”

설명을 하면서 그가 피식 웃었다.

“기실 숙련된 도사들일수록 시스템과 주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합니다만.”

그의 이야길 들으며 다시금 검은 문자로 가득 찬 벽면을 보았다.

벽에 새겨진 문자들을 바라본다기보다는, 마치 거대한 문자열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이게 공간을 만든다는 주술인 건가?

어쨌든 이곳이 흑탑의 전설이 만든 공간이라는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흑탑주가 살아 있는 겁니까?”

사실 아직도 흑탑주가 어떻게 된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시체 속에 갇혀 있던 그녀의 모친이 모종의 주술을 펼쳐 그녀의 카르마 등급 필드를 무너뜨렸다는 것밖에는.

“그녀는 확실히 혼으로 돌아갔습니다.”

단군이 대답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모친이 20년을 품었던 저주가 끝내 그들 모녀를 함께 혼으로 돌려놓았죠.”

나와 흑탑주의 싸움을 지켜본 듯한 말이었다.

“지금은 흩어져서 우주의 일부가 되었겠지만…… 저승이 돌아온다면, 언젠가 지옥에서 그들을 다시 보게 되실 겁니다.”

설명을 잇던 그가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흑탑주의 죽음과 상관없이, 이곳은 흑탑의 주술과 현무의 핵이 만들어 낸 공간입니다.”

그 말에 불현듯 그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고 한 것이 떠올랐다.

“그럼 제가 해야 한다는 것이 그 핵을 부수는 건가요?”

“비슷합니다.”

비슷하되 정확하지는 않다는 두루뭉술한 대답.

그는 친절하게 답해주는 듯하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 모호한 태도에 거듭 이 상황이 불편해질 때쯤 단군이 웃음을 짙게 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미 만들어진 공간이라기보다는 지금도 시시각각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가까운 곳인데.”

그가 돌연 내 앞으로 팔을 뻗어 나를 막아섰다.

“아무래도 당신과 저를 벌써 공간의 일부로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화르르륵!

눈앞에서 새빨간 불꽃이 피었다.

갑자기 무엇을 태우는지 몰라 일렁이는 화염에 시선을 빼앗긴 찰나.

촤아악!

생각지 못하게 이번에는 옆에서 무언가가 내 팔뚝을 붙잡았다.

눈에 보이는 형체는 없었으나 감촉만은 소름 끼치게 차갑고 물컹했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화르르륵!

다시 한번 화염이 피어오르면서 정체 모를 그것을 불태웠다.

“……아.”

나는 불이 타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며 작게 신음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투명 인간에 불을 붙인 것 같다고 표현해야 할까.

분명 형체는 보이지 않건만, 그것에 붙은 불꽃은 반신만 남은 사람의 모양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반신의 형태마저 무수히 많은 글자로 흩어지며 꺼져버렸다.

“방금 그것도 주술이 만들어 낸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생각보다 대응이 빠르군요.”

단군은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르르륵!

또다시 순식간에 불길을 피워 냈다.

이번에 피워 낸 것은 그와 나를 중심으로 한 크고 화려한 불꽃의 장벽이었다.

천장을 찌를 듯 드높은 화염의 벽.

그 속에서 걸음을 멈춘 단군이 여전한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제 손을 꺼리시는 것 같아 몸의 금제를 푸는 일은 다른 분께 부탁드리려 했습니다만.”

화르륵!

단군이 말을 잇는 중에도 우리를 둘러싼 불의 장벽은 맹렬하게 타오르며 크고 작은 문자들을 불티처럼 흘렸다.

아무래도 그 투명한 것이 계속해서 불의 벽을 공격해 오는 모양이었다.

“지금 풀어드리는 것이 좋겠네요.”

“…….”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사이에도 화염은 잠깐의 틈도 없이 공격을 막아냈다.

단군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이 연약한 몸으로는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했다.

그 또한 그것을 알기에 굳이 말을 더하지 않는다는 것까지도.

그는 갑자기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면 정말 손을 쓸 생각이 없었다는 듯 무고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

재차 내 앞에 들이밀어진 하나뿐인 선택지를 응시하던 그때, 단군이 멈칫했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가 시원스레 웃어 보였다.

“마침 그분이 오셨군요.”

동시에 우리를 감싸던 불의 장벽이 걷히며 그가 말한 ‘그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길게 땋아 내린 머리에 중절모를 쓴 여성이었다.

큰 키와 잘 차려입은 바지 정장이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빛을 머금은 듯 하얀 얼굴과 검고 깊은 눈은 따스하면서도 신비로웠다.

나를 안다는 듯이 웃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내겐 낯선 얼굴이었다.

“……아.”

그럼에도 그녀가 누구인지는 한눈에 알았다.

“……바리공주님?”

비스듬하게 쓴 중절모를 우아하게 벗은 그녀가 입가를 부드러이 휘며 웃었다.

“무조신 바리데기가 새로운 저승의 왕을 뵙소.”

28장. 지금 그의 곁에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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