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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2) (76/187)

25장. 가려졌던 것들(2)

대부분의 시설이 철거된 저승의 터.

모래만 날리는 폐허에 용광로와 거푸집, 모루, 연장 따위가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정리되지 않아 어수선한 광경이었지만 가운데 선 세 개의 거울만큼은 그 어디에서도 빛바래지 않을 위용을 품고 있었다.

도깨비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업경이었다.

심연을 담은 것처럼 검은 표면.

테두리는 화려한 연꽃 문양으로 장식됐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우리 대왕님께서 쓰시던 것과 유사했지만, 조금 더 작고 선이 얇은 대신 보다 정교하고 세밀한 장식이 돋보였다.

똑같은 업경임에도 디테일이 조금씩 다른 것은 아마 왕도깨비들의 솜씨나 취향, 주인 될 자의 특징도 다르기 때문이겠지.

“말씀드렸다시피 이 거울의 마지막 재료는…….”

거울 앞에 선 탈해가 입을 열었다.

“대왕님의, 업경의 주인인 염라의 혼입니다.”

나를 담은 두 눈에는 어느새 검붉은 귀기가 깃들어 있었고,

“제게 혼을 맡기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평소와 달리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두 눈과 마찬가지로 홧홧한 귀기를 발하는 탈해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그 기세는 무엇이든 벼리고 다듬을 수 있을 만큼 날카롭고 예리했다.

저 손으로 그는 매일 밤낮 신의 힘이 담긴 재료들을 제련했으리라.

“……네.”

탈해에게서 피어오르는 짙은 귀기를 마주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내 혼을 다른 이에게 맡긴다는 사실 앞에 조금이지만 어쩔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부탁합니다, 탈해.”

내 말에 탈해가 부드럽게 웃는 얼굴 그대로 천천히 다가왔다.

“……!”

귀기가 맺힌 그의 손가락이 내 목에 닿았다.

불현듯 심장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서늘한 감각에 살짝 몸을 떨었다.

그 생소한 감각은 이윽고 내 몸 전체로 번졌는데, 모든 재료를 빚어낼 수 있는 도깨비의 손이 내 혼도 재료로 삼아 몸에서 끄집어내는 모양이었다.

“……이거.”

그때 진중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탈해가 침을 삼켰다.

“생각보다 좀 떨리네요. 저도 신의 혼을 만져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솜씨 좋게 온갖 발명품을 만들어 내던 왕도깨비도 신의 혼을 재료로 쥐려니 긴장하는구나.

나만 괜히 긴장한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나는 오히려 조금 마음이 놓였다.

“혹시 혼도 망가지면 AS가 될까요?”

“……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실없는 농담 앞에서 탈해가 난감하게 미간을 좁혔다.

나는 농담이었는데 탈해는 혼을 망가뜨릴까 봐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워낙 연장을 능숙하게 다뤄서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제야 이쪽도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왕도깨비라는 걸 실감했다.

……이것 참, 새 왕이 새 왕의 도구를 만들어주고 있구나.

그런 실없는 말장난을 떠올리고 있자니.

화아아악.

문득 탈해의 손에 새까만 그림자가 휘감겼다.

나는 그림자로 보이는 그것이 내 혼의 일부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처음에는 그림자의 형태였지만 탈해가 능숙한 솜씨로 손을 휘저을수록 실타래처럼 변하여 그의 팔에 얽혀 들었다.

흡사 숙련된 재봉사가 바늘에 실을 꿰는 듯한 손짓이었고, 일류 지휘자가 경쾌하게 지휘봉을 휘두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런 화려한 움직임 끝에, 내게서 흘러나온 혼은 탈해의 손을 거쳐 업경에 감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순간.

파아아앙!

빛이 눈부시게 산개하면서 혼의 타래와 업경이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어.”

갑자기 사라져버린 업경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눈 깜짝할 새에 커다란 업경이 사라지는 것을 보니 새삼 도깨비한테 홀린 기분이었다.

“다 되었군요.”

탈해가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긴장이 풀려 상기된 얼굴은 정말로 작업이 전부 끝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 (!) 시스템이 당신의 새로운 권능을 감지합니다. ]

그때 팝업창이 떴다.

[ (!) 잠재된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

[ 업경(L) ]

놀랍게도 새로운 레전더리 스킬이었다.

권능이란 신성을 바탕으로 하고, 업경은 본래 염라의 힘이니, 이처럼 새로운 권능을 손에 넣으면 곧바로 스킬의 형태로 정제되는 듯했다.

“업경은 대상의 업을 비춰 그 업만큼 당신의 신성을 증폭시키는 힘이죠.”

탈해가 설명을 이었다.

“그 힘을 발휘하실 때는 대왕님의 혼과 연결된 업경을 꺼내어 사용하게 되시겠지만.”

음, 스킬을 사용하면 내 혼과 이어진 업경이 소환된다는 뜻이구나.

“아마 업경과 혼이 연결되시면서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으실 겁니다.”

“달라진 것?”

“업경은 본디 대상의 본질을 비추는 거울이니까요.”

“아.”

떠오르는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2만 년의 세월이 깃든 깊은 눈으로 만물을 내려다보시던 우리 대왕님.

그분은 업경을 따로 세워 두지 않고도 죄인의 업은 물론 평생의 속내까지 한 번에 들여다보시곤 했다.

“저승왕의 신성이 완전히 돌아오면 그냥 바라보시는 것만으로도 대상의 본질을 보실 수 있을 테지만.”

탈해가 마저 말했다.

“아직 불완전한 지금도 당신의 혼에 깃든 업경의 힘으로 대상의 인과를 얼추 꿰뚫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대상의 인과를 본다니.

다소 생소한 표현에 나는 설명을 더 부탁하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봤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촉이 좋아지시는 거죠.”

“촉이요?”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미 알고 계시는 정보를 조합해서 현재의 상황이 이럴 것이라 파악하는 감이 좋아지실 겁니다. 누군가 힘을 감추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에도 남들보다 민감하게 느끼실 수 있겠죠.”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본래 염라에게 거짓말 따위는 절대 통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우리 발설지옥은 ‘혀로 지은 죄’를 심판하는 지옥이었고.

다만 나는 아직 힘이 부족해서,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그것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것만 조금 느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분명 예전과 조금 다르실 텐데요.”

탈해가 나와 눈을 맞추며 다시 물었다.

“……분명히, 이전과 달리 보이는 것이 있으실 겁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탈해를 응시했다.

대상의 본질을 꿰뚫게 되는 능력이기 때문일까?

그를 자세히 보려고 할수록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눈앞의 탈해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본질’을 보려 하면 할수록,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무언가가 점점 더 선연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분명 눈으로 보고 있되…… 보인다기보다는 느끼는 것에 가까운, 그런 낯선 감각이.

그 감각에 집중하던 끝에, 나는 탈해에게 물었다.

“혹시 저한테…… 뭔가를 감추고 있어요?”

지금까지 줄곧 잘 지내 왔던 그에게서, 어쩐지 이전에는 몰랐던 무언가가 보여서.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가벼운 미소를 띤 그의 얼굴에서, 문득 안개처럼 그를 휘감은 짙고 어두운 기운이 느껴져서.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서.

“…….”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탈해의 미소가 짙어졌다.

“정말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대왕님.”

또한 어째서인지 그를 에워싼 어두운 기운이 묵직하게 주위를 잠식했다.

마치 그를 가두는 무형의 감옥처럼.

“당신을 처음 뵈었을 때 청하였죠.”

그가 말을 이었다.

“죄인의 업을 비추는 업경을 만들어드릴 테니, 당신께서는 그것으로 제 아버지를 살해한 자를 벌하여 주시기를.”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직감했다.

“……설마.”

죄인의 업을 비추는 업경의 권능이, 그 순간 나를 그대로 짓눌렀기 때문에.

“징악의 신이시여,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어느새 고개를 숙인 탈해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선대 왕도깨비 함달파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바뀝니다. ]

필드의 전개.

[ 도깨비 ‘석탈해’가 자신의 업으로 필드를 전개합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카르마(K)’입니다.

- 해체 조건 : 시전자의 카르마 완전 해체

각성자가 시전할 수 있는 수많은 필드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필드로 손꼽히는 필드의 전개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탈해.”

조금도 고려한 적 없던 상황에 나는 황급히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대왕이시여.”

그러나 어깨를 붙잡힌 탈해는 고개를 들며 어떠한 동요도 없이 재차 말할 뿐이었다.

“제가 선대 왕도깨비 함달파를 살해하였으니, 약조해주신 대로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차분히 가라앉은 두 눈에서 검붉은 귀기가 일렁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사이에도 탈해의 주위를 잠식한 어두운 기운은 계속해서 짙어지고 있었다.

업경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알았다.

무겁고 질척한 기운은 탈해가 저지른 업이었다.

그의 업이 안개처럼 그를 잠식한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의 업에 휘감긴 탈해의 모습은 그의 이야기가 진실임을 의미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아버지 함달파를 살해했다.

“……왜.”

하지만 나는 그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아버지를 살해하는 업을 저지른 그는, 동시에 아버지의 죽음에 끔찍이도 비통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탈해가 선선히 대답했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었겠습니까.”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에 냉소가 흘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간 그를 바라봤다.

보이는 것은 낯설게 식어버린 그의 차가운 얼굴뿐이었지만, 내 혼에 연결된 업경은 그 이상을 읽어 내고 있었다.

“……아.”

눈앞에 아른거리는 희미한 잔상에 나는 작게 신음했다.

“그가…… 가신들을 해쳤군요.”

그렇게 말을 내뱉었을 때였다.

[ (!) 당신의 권능이 필드의 카르마와 충돌합니다. ]

팝업창이 뜨고, 탈해의 주변을 잠식하던 검은 기운이 점토처럼 늘어지며 어떤 형상으로 변했다.

모자를 쓴 큰 키의 사내와 그를 피하듯 퍼져 있는 남녀노소의 실루엣이었다.

-아아아악!

-왕이, 왕이 미쳤다……!

-도, 도망, 도망쳐……! 왕이 미쳐버렸다!

강렬한 비명들이 필드 전체를 뒤흔들었다.

큰 키의 사내가 움직였다.

비명과 함께 주위에 있던 이들이 도망쳤다.

흡사 그림자극과 비슷한 형상이었으나 나는 그것이 뜻하는 바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선대 왕도깨비 함달파와 그의 가신들.

미쳐버린 함달파가 그의 가신들을 해치는 장면이었다.

내가 가진 업경의 권능이 탈해가 시전한 필드의 카르마를 통해 읽어 낸 것이었다.

“함달파로부터 다른 도깨비들을 지켜내기 위해 그를 살해한 거였어.”

생각지 못한 사정에 탈해를 바라볼 때였다.

내 업경의 권능이 그의 과거를 그대로 읽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여전히 냉담하게 식어 있었다.

“아까 분명 제게 혼을 맡기신다고 하셨죠.”

그가 다시 말했다.

“이 필드는 시전자의 카르마로 쌓아 올리는 필드입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카르마(K) 등급의 필드는 자신의 업, 살아온 삶 전체를 기반으로 만들어 내는 필드였다.

필드의 해체 조건은 시전자의 카르마를 완전히 해체하는 것.

즉, 시전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시전자를 죽이거나, 혹은 시전자에게 갇힌 자가 죽어야만 해체되는 생사결의 필드.”

흑염을 닮은 귀기가 타오르는 눈으로 탈해는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업경이 저를 벌하지 않는다면, 당신께서는 이곳에서 살아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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