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가려졌던 것들(1)
닷새가 지났다.
저승에 돌아온 이후 나는 업경을 만드는 데 집중했고, 흑탑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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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근ㄷㅔ 신이 인간이랑 싸우는것도 웃기지안나(22)
커뮤니티는 닷새가 되도록 같은 화제가 반복되고 있었다.
조금씩 말이 바뀌긴 했지만 결국 주된 화제는 세 가지였다.
끔찍하게 죽은 시신들은 과연 흑탑이 벌인 짓이 맞는가.
진짜 염라가 등장했는가.
흑탑과 염라가 싸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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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진지하게 단군 입지가 좀 애매해질 것 같네요. (1008)
각성한지 20년 좀 넘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아마 여기 계시는 분들 대부분보다 나이가 많을거예요.
요즘 젊은 분들은 모르시겠지만, 단군이 나타나서 정리하기 전의 한반도는 그야말로 지옥도였죠..
던전이 문제가 아니라 각성자들끼리 계속 전쟁을 벌이는게 문제였어요.
전쟁 막바지에 제가 7,8년차였는데 저만큼 오래 살아남은 동기들이 없었습니다.
약한 각성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고기방패로 세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대였어요.
그러다가.. 아시다시피 그 오랜 막장을 단군이 정리했죠..
요즘 부쩍 단군의 업적을 폄훼하는 선동이 많은데요.. 사실 그 시절을 살아보신 분들은 아마 지금 선동하는 자들이 누군지 아실거예요. 단군이 무너지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정해져있거든요.
요즘 젊은 분들은 단군이 한반도의 절반을 차지하고도 가만히만 있는게 답답하다고 하시는데.. 안타깝지만 그게 단군이 한반도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이제 와서 단군이 한반도를 평정하겠다고 나서면 그대로 한반도 2차 대전쟁 시작이에요. 이러면 그냥 전쟁 하자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그냥.. 전쟁이 뭔지 모르시는거죠. 철이 없다고 해야하나.. 어떤 의미에선 부럽기도 하네요..
그런데 염라가 나타나면서 단군이 좀 애매해졌어요..
아마 단군도 흑탑이 성역에서 이상한 짓 하는걸 모르진 않았을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군이 나서면 바로 2차 대전쟁 시작이에요.
흑탑이 무슨 짓을 했든 다른 전설급 각성자들이 탄압 프레임을 씌우면 곧장 여론이 들끓었겠죠. 혼자 고고한 척 다 하더니 사실 다른 각성자들 견제하고 한반도 집어삼키려고 했었다고.. 여기도 그 말에 넘어갈 분들 많으실걸요?
그런데 염라는 다르죠.. 신이잖아요..
신이 인간을 벌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그러겠어요.. 신이 나쁜놈들 지옥 보낸다는데 싫다는 놈들은 지옥 가야할 나쁜놈들 뿐이겠죠..
좀 말이 길어졌는데.. 요점은 이거예요.. 그동안 단군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지켜내던 한반도의 균형이 염라가 움직이면서 깨지게 되었다는것.
그렇게 되면 한때 단군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결국 염라한테 옮겨가게 될겁니다.. 대중은 항상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법이잖아요.. 신선한 뉴페이스인데다가 무려 진짜 신이라니.. 모두가 선망할만하죠..
전 그래서 염라라는 신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가 궁금하네요.. 인세가 한창 막장일 때는 그냥 두더니.. 이제 와서 무슨 이유로 한반도에 관여하려는지.. 당신의 뜻은 대체 무엇인지... 하긴 뭐 인간이 신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겠어요?
아무튼.. 다들 흑탑이 어떻게 될지만 궁금해 하시는것 같은데... 야밤에 생각이 복잡해져서 한번 길게 적어봤습니다.
시대의 격변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래도 단군을 너무 퇴물이라고 욕하지는 마세요. 정점의 위치에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따라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인간이 원래 그래요.
〔익명1〕 3줄 요약점
↳〔작성자〕 흑탑vs염라는 서막.
↳〔작성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결국 단군vs염라가 진짜가 될 것.
↳〔작성자〕 개인적으로 단군이 좀 안타깝네요.
〔익명2〕 정성글ㅊㅊㅊ
〔익명3〕 와 20년ㄷㄷㄷ 아직 현역이세요?
〔익명4〕 그럼 단군이 알면서 흑탑 봐준거? ㅈㄴ 배신감드네
↳〔익명5〕 글게 진짜 암것도 안한 거면 실망인데ㅉ
↳↳〔익명12〕 에휴.. 작성자가 말한 게 바로 이런 거임..
〔익명6〕 막줄보니 걍 단빠네
↳〔익명13〕 ㅇㄱㄹㅇ 아닌척하다 단군 찬양으로 끝나는 거 ㄹㅇ 단빠들 특징
↳↳〔익명97〕 아ㄹㅇㅋㅋㅋㅋㅋㅋ 천부인 요즘 알바 푼다며? ㅋㅋㅋㅋㅋㅋ ㅅㅂ 관리 오지는듯ㅋㅋㅋㅋㅋㅋ
↳↳↳〔익명132〕 천벌 이후로 똥줄 ㅈㄴ탔나보네ㅋㅋㅋㅋㅋㅋㅋ
〔익명7〕 좋은글.. 근데 나 슴둘인디 전쟁 끝날때 울엄마가 쫌만 더 빨리 끝났으면 삼촌 안죽었다고 막 운거 기억남요... ㅠ
↳〔익명24〕 ㅁㅈ.. 20대도 전쟁 모르진 않음.. 울이모도 그때 세뇌당해서 아직도 병자임ㅠㅠㅜ
〔익명8〕 나랑 연식이 비슷한갑네ㅎ.. 나도 요즘 단군 보면 맘이 안좋더라고
↳〔작성자〕 아무래도 너무 맑은 물엔 고기가 못사는 법이니까요..
↳↳〔익명8〕 그러게 사람들이 좀 관대해지면 좋을텐데 깨끗할수록 조금의 티끌도 놔두질 못해.. 씁쓸하지
↳↳↳〔작성자〕 동감합니다. 힘든 길이에요.
↳↳↳↳〔익명132〕 맑은물ㅇㅈㄹㅋㅋㅋ 천부인 알바들 글 하나에 얼마 받음????ㅋㅋㅋㅋㅋㅋㅋ
〔익명882〕 이거 왜 핫게임? 정주행할만함?
↳〔익명132〕 ㄴㄴ 걍 천부인 알바랑 단빠들 공작임
“……벌써 이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건가.”
내 생각과 비슷한 부분이 많은 글이었다.
단군이 15년의 세월을 한반도의 일인자로 군림할 수 있던 것은 다른 전설까지 제패하겠다는 야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단군이 다른 각성자의 성역에 관여한다면 그것은 곧 선전포고가 되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그의 영웅성이 훼손되고 만다.
따라서 그는 흑탑의 이번 행태를 알고도 쉬이 나설 수 없었을 것이다.
설령 정의를 위해서라 할지라도, 그의 정적들은 그가 야망 때문에 움직였다고 몰아갈 테니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평화도 마찬가지다.
단군이 전쟁을 멈추면서 바친 대가는 한반도의 정세 변화 그 자체였다.
한반도 절반의 지지를 받는 그가 직접 변화의 물결을 가로막는 벽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그가 이룩한 평화는 이제 새롭게 변화할 동력을 잃은 채로 곳곳에서 부식되고 있었다.
그는 한반도에서 다시 한번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각성자들끼리 성역에 관여하지 못하는 법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바로 그 법에 숨어, 흑탑은 그들의 성역에서 온갖 사악한 짓을 저질렀을 터였다.
때문에 우주는 염라의 존재를 안배했다.
그가 이뤄 낸 평화가 이제는 실효를 다했기 때문에.
단군이 만들어 낸 고착을 깨버릴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것이, 나와 단군에게 세 번째 천벌을 나누어준 우주의 뜻일 것이다.
“…….”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단군이 걸렸다.
시공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그 남자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사력을 다해 15년간 유지해 온 평화는 결국 끝이 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렇다면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이른 아침.
평소라면 여기저기서 망치를 두드리는 소리가 한창이었겠지만, 오늘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귀목을 가져온 이후 왕도깨비 탈해와 모든 가신 도깨비들은 업경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업경을 만들기 위해선 철을 녹이고 재료를 다듬는 작업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들은 서천꽃밭과 사라수대왕 저택 너머, 텅 빈 저승의 터에 새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탈해가 딱 닷새쯤 걸린다고 했던가.
“새 왕, 일어났느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자청비가 인사를 해 왔다.
그녀는 지옥수를 심은 땅에 권능을 불어넣어준 후에도 바로 떠나지 않았다.
사라의 말대로 큰 문제는 아니어서, 지옥수는 그녀의 손길에 금세 활력을 찾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자청비의 맞은편에서는 사라가 느긋한 얼굴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두 신은 벌써 아침 식사를 마친 듯 보였다.
“내 이제 슬슬 돌아갈까 한단다, 얘야.”
옆에 가서 앉았더니 자청비가 말을 꺼냈다.
“꽃나무도 제대로 돌아온 것 같고, 나도 서천의 꽃씨를 얻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품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꽃감관의 권능이 좀 아쉽다만, 천상의 화원이면 그럭저럭 쓸 만큼은 피워 내겠지.”
“그럼 천계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래, 지상에서 볼 일은 얼추 끝났으니까.”
그 말에 그녀가 단군의 신단수를 봐준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천계로 돌아가기 전, 그에게 귀목을 키우던 흙을 전해주는 걸까 싶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아까 본 글 때문일까.
단군이 신경 쓰였으나 궁금해하고 싶지 않았다.
벌써 여러 신들과 연을 맺고 있는 그가, 사람들이 한데 엮어 떠드는 염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같은 건.
“다들 나와 있네!”
그때 호구별성이 테이블로 걸어왔다.
“엥? 강림 이놈은 또 없잖아?”
그러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아직도 나무만 쳐다보고 있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녀가 내 앞에 앉으며 말했다.
“전하, 걔 저러다 나무 또 죽이는 거 아니냐?”
“에이, 이제는 안 그러겠죠.”
나는 평소처럼 웃으면서 그녀의 말을 받았지만, 사실은 어쩔 수 없이 곱씹게 되었다.
나무를 돌보는 형을 홀로 찾아갔던 사흘 전 일을.
자청비는 저승을 방문한 그날 바로 흙에 권능을 불어넣었다.
그 뒤로 형이 나무들의 회복을 기다리며 대부분의 시간을 서천꽃밭에서 머무른다고 들어, 결국 짧은 고민 끝에 발걸음을 옮겼었다.
서천꽃밭 한구석에서, 형은 뻣뻣하게 선 채 아직 잎새가 다 펴지지 않은 발설지옥의 나무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 발설이 곧 일어난대요.
나는 그런 형을 지켜보다 충동적으로 말했다.
-발설이 일어나면…… 이제 그냥 물은 한 번씩만 주세요.
-……형이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분명 잘 자랄 거예요.
형은 끝까지 대답이랄 만한 것을 하지 않았다.
그게 귀목 던전에서 돌아온 뒤 우리가 단둘이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 후로 아예 대화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기실 겉핥기나 마찬가지여서 대화다운 대화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형이 내내 나무들하고만 있다 보니까.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음? 저기 오는구나.”
커피를 마시던 사라가 불쑥 앞쪽을 가리켰다.
“도깨비들도 함께야.”
고개를 돌려 그들의 모습의 눈에 담았다.
그의 말대로 왕도깨비 탈해와 가신들 몇몇 그리고 강림 형이 함께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왜 저렇게 모여서 오고 있는 건지 생각하다 형과 눈이 마주쳤다.
형의 얼굴에는 여느 때처럼 별다른 표정 없이 서늘한 기운만이 서려 있었다.
발설이를 앞에 두고 묵묵부답이던 그를 떠올려서일까.
익숙한 시선과 마주하면서도 괜한 어색함이 느껴졌다.
나는 결국 형한테 인사를 건네지 못한 채 시선을 돌려 탈해를 바라보았다.
“업경이 완성되었습니다, 대왕님.”
때마침 들려온 탈해의 첫 마디는 충분히 관심을 돌릴 만한 화두를 담고 있었다.
“업경은 본디 염라의 혼과 연결되는 물건이지요. 시간을 내주시면 제가 마무리를 지어드리려고 합니다.”
그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마침 대왕님께 드릴 말씀도 있으니, 독대를 청하고 싶습니다.”
나는 탈해의 청을 수락하기 전, 나도 모르게 형의 반응을 살폈다.
형이라면 ‘독대’를 내켜 하지 않을 게 뻔하니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또 안 된다고 나설 것 같아서였다.
형은 예상대로 미간을 좁힌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할 말이 있었느냐는 듯 굳게 입을 다물고서 그저 가만히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물은 이제 한 번만 주고 있는 걸까.
어쩐지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매를 보며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다가, 이내 탈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바로 갈게요.”
뭐, 어쨌든 지금은 새 업경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