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하늘과 땅의 왕(2)
천부인의 단군.
한반도 최강의 각성자.
바리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역대 최고의 도사.
나는 화면에 비친 단군에게서 23년 전의 그를 겹쳐 보았다.
차분히 가라앉은 검은 눈이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때도 그는 꼭 저런 눈으로 천벌을 마주했다.
만 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재앙의 모든 순간을 흔들림 없이 직시했다.
그것이 곧장 자신의 목까지 칠 수도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래를 보는 도사이기 때문일까.
그는 어딘가 보통 사람과 다른 초탈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표정을 지을 때 그의 수려한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겁의 세월이 빚어낸 무언가인 듯했다.
천벌에 대한 두려움도, 전투를 앞둔 고양감도 보이지 않는 그는 마치 불을 대어도 달궈지지 않는 칼날 같았다.
곧고 단단하되, 어떤 열기도 옮겨붙지 않는.
그 무엇에도 동요하지 않는.
그것은 세 번째 천벌을 마주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아-아아아---!
거인이 괴성을 지르며 거대한 팔로 단군을 내려쳤다.
사람만큼이나 거대한 주먹이 휘둘러지는 광경은 꼭 몸만 큰 아이가 난폭하게 인형을 망가트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콰아아아앙!
굉음이 울리며 단군이 서 있던 자리가 움푹 파였다.
그러나 그 주먹이 닿기 전에 단군은 이미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신선처럼 자연스러운 도약이었다.
몸에 걸친 곤복 자락이 날개처럼 휘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단군이 새까만 눈동자로 아래를 관조했다.
여유마저 느껴지는 자태는 천벌이 아니라 어느 높은 바위에 올라선 모양새였다.
“허.”
사라가 턱을 감싸 쥐었다.
“풍백의 권능이군.”
하늘의 핏줄답게 그는 곧장 천계의 힘을 알아봤다.
“움직임이 정말로 바람 같구나.”
그때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단군이 거인의 머리에 뭔가를 겨냥했다.
면류관과 곤복에 어울리지 않게, 뜻밖에도 그것은 날렵하게 빠진 권총이었다.
“아니, 쟤 무기가 총이었어?”
호구별성이 말했다.
“새끼 힙하네. 관 쓰고 총 쏘는 단군이라니.”
그런데 그 총이 발사된 순간.
뻐어어어어엉!
대포라도 쏜 것 같은 총성에 모두가 놀랐다.
권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화력이었다.
“미친!”
눈을 동그랗게 뜬 호구별성이 여느 때보다 큰 소리로 외쳤다.
“저게 총이냐, 미사일이지!”
총알 대신 운석이라도 박힌 모양새였다.
믿을 수 없게도 단 한 번의 총성에 집채만 했던 거인의 머리가 반이나 날아가버렸다.
정작 거인은 그것을 인식조차 못 했는지 반만 남은 눈을 멍청하게 끔뻑였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반만 남은 머리가 느리게 눈만 끔뻑이던 그때.
화르르륵!
이번에는 거인의 머리 전체에서 막대한 화염이 번졌다.
무엇이든 순식간에 새까만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만큼 강력한 불길이었다.
“주술이구나.”
사라가 말했다.
“저건 그냥 총이 아니다. 단군 본인의 주술을 담은 매개야. 저 매개로 주술에 필요한 치성과 제를 전부 생략했어.”
몹시 놀란 듯이.
“하지만 주술은 결국 거래다. 저만한 편리라면 하다못해 불꽃의 위력이라도 줄였어야 해.”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에는 작은 탄식마저 섞여 들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빠르고 자연스럽다니, 도대체 어떤 우주의 이치를 담았는지 짐작조차 안 되는구나. 내 눈으로도 말이다.”
천벌의 머리는 본래의 형태를 잃고 새카만 잿더미로 화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버린 천벌의 목에서 정체불명의 핏덩이가 불쑥 솟아올랐다.
녹아내린 뼈와 살덩이가 아무렇게나 덩어리진 무언가.
그것은 자꾸만 흘러내리려는 것을 말 그대로 그저 뭉쳐 놓기만 한 외형이었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엉겨 붙은 덩어리를 대충 쌓아 올린 살점들이 슬라임처럼 꿈틀거리며 새로이 머리를 조형해 냈다.
처음보다도 더욱 흉측해서 눈에 담은 순간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때문에 그만큼 더 위험해 보이는 모습으로.
“미친, 저거 대가리가 또 생기네?!”
별걸 다 본다는 듯 호구별성이 욕설을 내뱉었다.
기괴한 재생에 역신마저 불쾌감을 느끼는지 어느새 주변에는 축축하게 독기가 번졌다.
파아아앙!
그때 거인의 재생을 지켜보던 단군이 하늘 위로 불꽃을 쏘았다.
불은 허공을 빨갛게 태우곤 꼬리를 길게 그리며 숫자 8을 그렸다.
“이런, 설마 여덟 번 재생한다는 건가?”
강림 형이 말했다.
“그래, 저자라면 이미 천벌의 모든 반응 유형을 읽었겠군.”
뻐어어어엉!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렸다.
전과 똑같이 순식간에 집채만 한 불꽃을 피워 내는 화력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날아간 것은 거인의 머리 일부에 불과했다.
“저거 재생될 때마다 더 강해지나 본데?”
인상을 찌푸린 호구별성이 말을 보탰다.
뭐 저런 게 있냐는 듯.
뻐어어어어엉!
전보다 덜한 타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단군은 거듭 방아쇠를 당겼다.
또다시 머리가 거인의 머리가 일부 날아가더니.
화르르륵!
불길이 일면서 재생되었던 머리가 또 한 번 잿더미가 됐다.
파아아앙!
즉시 단군이 재차 하늘에 불꽃을 쏘아 올렸다.
불꽃이 그리던 숫자는 이제 8에서 7이 되었다.
앞으로 여덟 번 더 재생할 거라는 강림 형의 짐작이 맞는 듯했다.
“아니 근데.”
문득 호구별성이 다른 말을 꺼냈다.
“쟤네는 다 들러리냐?”
단군과 천벌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수백 명의 천부인 길드원들을 가리키면서.
“단군 쟤가 대장인 건 알겠는데. 저럴 거면 나머지는 왜 데려온 거야?”
그사이 새로운 머리를 재생한 거인이 주먹을 쥐며 포효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거인의 포효에 일대를 뒤흔드는 기파가 뒤따랐다.
천벌이 내지르는 사자후에 주변에 있던 천부인 길드원들이 스트라이크 된 볼링핀처럼 순식간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것은 천벌의 어깨에 위에 올라탄 단군뿐이었다.
“야씨, 진짜 쨉도 안 되네? 나머지는 천벌 근처에도 못 가겠다.”
형편없이 구르는 천부인 길드원들을 보며 호구별성이 혀를 찼다.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게 정말로 단군밖에 없나 보네요.”
나는 그녀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약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공격은커녕 천벌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들은 분명 한반도 1위 길드 천부인의 정예들이다.
그들이 약한 게 아니라 천벌이 터무니없이 강한 것이다.
화면에 비춰지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는 화면 속의 단군과 천벌, 천부인 길드원들을 주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만, 그렇다면 단군은 왜 굳이 저들을 데려왔냐는 건데.”
그때였다.
파아아아앙!
녹색의 신성이 번쩍이더니, 쓰러진 천부인 길드원들 사이에서 여인과 대호가 다시금 움직였다.
-으르르릉!
대호는 울부짖는 천벌을 향해 똑같이 우레 같은 울음을 내뱉고.
여인은 우아하게 팔을 뻗어 나뭇잎이 섞인 바람을 일으켰다.
“……!”
이윽고 두 화신을 중심으로 번지는 거대한 빛의 파장에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필드다……!”
신단수의 전설이 담긴 필드의 전개.
여인과 대호가 품은 빛이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로 자라났다.
나무가 다 자라자마자 천벌의 어깨 위에 서 있던 단군은 그 아래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푸른 잎이 무성한 아름다운 나무였다.
기둥과 가지가 새하얗게 물든 채 은은한 빛을 머금은 모습은 신성하게까지 보였다.
나무가 발하는 빛이 필드의 주인인 단군을 축복처럼 휘감았다.
“……저걸로 마력을 공급하는 거구나.”
나는 나무의 효과를 짐작했다.
저 단군조차도 마력 스탯 자체는 100이 끝일 터였다.
100의 마력으로 끊임없이 화력을 유지하려면 마력을 공급하는 풍문이 필요하다.
모르긴 해도 저 나무에는 그러한 기능도 있을 것이다.
신앙으로 강해질 수 없는 천벌의 필드에서는, 결국 저런 식으로 천벌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의 효과를 가진 풍문을 여럿 활용해야 했다.
……나의 경우에는, 아마 이번만큼은 요행으로 가능할 테지만.
“……!”
그런데 그 순간.
“저건 결계인가?”
지켜보던 강림 형이 의문을 표했다.
천벌과 단군을 중심으로 반투명한 결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왜 나머지는 결계에 들어가지 않는 거지?”
형의 말대로 길드원들은 단군의 결계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모두 결계 밖으로 빠져나와버려서, 결계는 마치 단군과 천벌만의 콜로세움 같은 형태가 되었다.
“그렇군.”
사라가 말했다.
“저자는 처음부터 결계 안에서 혼자 상대할 생각이었구나.”
퍼어어엉!
동시에 결계 안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새빨간 불꽃이며 바람, 낙뢰, 심지어는 폭우까지 한데 얽혀 몰아쳤다.
세상의 모든 천재지변을 저 좁은 결계 안에 다 때려 박은 것만 같았다.
“야씨, 설마!”
알았다는 듯 호구별성이 말했다.
“저놈 저거 자기 화력이 너무 세서 다른 데 피해 줄까 봐 저러는 거야?”
말하면서도 그녀가 어처구니없어했다.
그녀의 말처럼 단군의 필드는 아파트 단지를 보호하고 있었다.
온갖 격렬한 힘들이 재해처럼 휘몰아치는 와중이었다.
결계가 없었다면 일대는 진작 날아가버렸을 것이다.
“부하들은 저것 때문에 데려왔군.”
강림 형이 말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어.”
화면 속의 길드원들은, 단군이 천벌을 결계에 가두자마자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그러고는 가까운 건물에서부터 주민들을 하나둘 멀찍이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저자는 정말로…… 오롯이 혼자서 감당하려고 한 거야.”
그래, 23년 전부터 줄곧 천벌에서 사람을 구해 왔던 그는 기어이 깨닫고 만 것이다.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하려면 그냥 천벌을 가둬 놓고 혼자서 상대하면 된다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영웅이군.”
사라가 말했다.
“그야말로 영웅이야.”
부정할 수 없는 평가였다.
단군이 천벌에 맞서는 방법은 영웅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영웅 자신의 강함, 그리고 그 강함을 바쳐 더 많은 사람을 구해 내겠다는 의지를 함께 갖추지 못한다면.
그렇지 못한다면, 아무리 강한 자라도 저런 방식은 결코 택하지 못하리라.
“…….”
나는 말없이 화면의 단군을 바라봤다.
단군이 모든 화력을 집중했기 때문에 결계 안은 연기와 불꽃으로 가득 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하늘에 쏘아 올린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천벌의 머리가 또 한 번 터졌음을 알게 될 뿐이었다.
그것조차 천벌의 공략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알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으리라.
누구도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지 않았던 영웅의 전투.
그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정말이지 변한 게 없었으니까.
단군, 그는 23년 전에도 그러했다.
그때도 가진 힘을 온전히 다른 이들을 위해서 쓰고자 했다.
그래서였다.
그가 그런 인간이었기에.
23년 전, 한반도를 뒤집어 놓은 첫 번째 천벌의 때.
나는 12명을 살리고 죽을 운명이었던 스물일곱 살 청년의 명부를 찢었다.
헌터 주도혁을 살리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