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하늘과 땅의 왕(1)
한반도의 서쪽.
어느새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다다랐다.
메말라서 바닥을 드러낸 삼도천 앞에 차를 세웠다.
모래밭처럼 황량한 땅에는 세 사람이 돌장승처럼 서 있었다.
“바리잖아?”
차에서 내린 호구별성이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
기도를 끝낸 바리가 우리를 마중 나온 모양이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차분한 눈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한 차례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 달리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늘 곱게 땋고 있던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 흰 한복 자락에 맞춰 나부끼고 있었다.
노인처럼 세어 버린 머리카락 아래 여전히 앳된 소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문득 그녀를 둘러싼 무언가가 여상하지 않다고 느꼈다.
마치 그녀를 중심으로 어떤 이질적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엉킨 것 같구나.”
옆에 선 사라가 말했다.
사흘 밤낮 동안 이어진 천벌 기도가 범상치 않았음을 그 또한 짐작한 듯.
바리가 풍기는 묘한 기운이 기도의 여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우주의 시작과 끝을 헤매는 기도였구나.”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바리에게 집중되었다.
도대체 그녀가…… 무엇을 보고 왔는지.
대체 무엇을 말할 것인지.
“……제가 졌어요, 오빠.”
이윽고 바리가 입을 열었다.
“단군, 그는 89시간 후 찾아올 천벌에게서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구해 낼 거예요.”
방송에서 단군이 했던 말과 다르지 않은 결론이었다.
“그 사람의 눈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어요. 세상 누구도 그 사람보다 많은 것을 볼 수는 없을 거예요.”
듣고 있던 삼차사가 작게 신음했다.
설마 바리가 단군을 그토록 고평가할 줄은 몰랐겠지.
무조신 바리공주가 인간을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것에 놀랐을 테고.
“……덕분에 깨달았어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 눈이 아직 인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검게 침잠한 두 눈이 흔들림 없이 나를 보았다.
“…….”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나는 그녀가 이겼다고 확신했으나 바리는 스스로 패배를 말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내 믿음은 여전히 굳건했다.
서해에서 천기를 가장 잘 읽었다는 별장군의 예지, 그리고 치열했던 바리와 단군의 기도가 분명 모두 얽혀 있을 거란 확신이 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빠, 앞서가는 사람은 돌아보지 않는 이상 등 뒤를 볼 수 없으니까요.”
바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단군, 그는 모를 거예요.”
내 확신에 응하듯이.
“세 번째 천벌이 발생하고 꼬박 한 시간 뒤, 다시 한번 천벌이 발생할 것이며…… 그 천벌은 반드시 염라가 막아낼 것임을.”
결국 그녀가 내게 천벌을 가져다주리라는 내 확신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번 천벌은 연달아 두 번이에요.”
바리가 예언을 마무리했다.
“우주가 하늘과 땅의 왕에게 모두 천벌을 맡겼어요.”
***
2071년 3월.
예고된 천벌의 날.
한반도 전체가 극도의 긴장에 휩싸였다.
상점가는 일찍부터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족, 친구, 연인 등 소중한 이들과 함께 모였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순간을 어떻게든 후회 없이 보내기 위해서.
세 번째 천벌.
20,443명을 죽이기 위해 안배된 재난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서 벌어질지 모르는 재난을, 모두가 제발 이곳만은 아니기를 바라며 제가 아닌 다른 자들의 불행을 빌고 있을 터였다.
결국 천벌은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단지 제 자신의 안위를 바랄 뿐인데, 그것이 결국 타인의 불행을 바라게 되는 부조리로부터.
“이제 곧 자시(子時)예요.”
시간을 확인하고 말을 꺼냈다.
자리를 잡은 곳은 어느 인적 없는 공원.
밤이라서 그런지 살갗에 닿는 바람이 제법 찼다.
그늘진 수풀 사이로 풀벌레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예언을 끝낸 바리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내 곁에는 차사들뿐이었다.
바리의 예언대로라면, 우리는 이곳에서 또 다른 천벌을 막게 될 것이다.
“곧 생중계가 시작될 겁니다.”
허공에는 이미 단말기를 조작해 커다란 창을 띄운 채였다.
수신 중인 채널에서는 본래 편성된 프로그램 대신 시계만 덩그러니 보여주고 있었다.
이 채널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채널이 마찬가지였다.
천벌이 시작되면 전부 천벌의 생중계로 변할 터였다.
첫 번째 천벌 당시 그러했던 것처럼.
23년 전, 예고 없이 벌어진 천벌의 때.
불현듯 모든 방송이 끊기더니, 똑같은 화면이 순식간에 모든 매체를 점령했었다.
TV, 인터넷, 심지어는 소리만 들리는 라디오까지.
24시간 가까이 18,000명이 실시간으로 죽어 나가는 참극을 강제로 지켜볼 수밖에 없던 첫 번째 천벌은, 한반도 전체의 트라우마였다.
뒤이어 1,100명이 넘게 죽어간 두 번째 천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어김없이 모든 사람이 천벌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두 번째 천벌에 맞춰 나타난 영웅, 스스로를 단군이라고 칭하는 그가 없었다면.
그랬다면 세 번째 천벌을 앞둔 지금 한반도는 더욱 압도적인 공포에 짓눌렸을 것이다.
“몹시 악의적이군.”
팔짱을 낀 강림 형이 한마디 했다.
“운이 좋아 천벌을 피해가더라도, 결국 그 대신 누가 죽는지 지켜볼 수밖에 없게 하다니.”
천벌의 중계를 기다리는 이 순간이 질린다는 듯이.
“……시간이 됐어요.”
나는 대답 대신 화면을 가리켰다.
23시 30분.
단군이 예고한 세 번째 천벌의 때가 왔다.
쿠웅!
허공에 띄운 화면에서 굉음이 울렸다.
“그래, 시작이구나.”
사라가 말을 받았다.
“하늘의 문이 열린다.”
화면 가득히 밤하늘이 펼쳐졌다.
검은 장막처럼 불길하게 요동치는 하늘이었다.
달조차 없는 하늘에 연기처럼 퍼진 구름 사이로 기묘한 문이 보였다.
문자인지 기호인지 모를 무늬를 새긴 둥근 형태의 문.
문 아래로는 붉은빛으로 숫자가 쓰여 있었다.
10,266.
이 숫자만큼의 인간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필드의 법칙이다.
필드의 법칙을 깨려면 하늘의 문이 불러올 몬스터를 쓰러트려야 한다.
“저기, 놈이 나온다.”
호구별성이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무언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머리 위에서 ‘10,266’의 숫자를 빛내는 몬스터였다.
“이번엔 인간을 닮았군.”
강림 형이 말했다.
“그때 봤던 것은 양의 머리를 했었지.”
형의 말대로 23년 전의 첫 번째 천벌은 양을 닮은 괴물이었다.
삼백 차사는 당시 모두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나 또한 그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와 달리 이번에 내려온 천벌은 평범한 인간의 형태였다.
몸에 붙는 가죽옷에 무기로는 커다란 몽둥이를 든 인간 남자.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만 빼면 인간 중에서도 그리 튀는 모습이 아니었다.
뻥 뚫린 구멍 사이로 번뜩이는 두 눈은 여느 사냥꾼의 눈과 비슷했다.
“……!”
그런데 그것이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모두의 눈에 경악이 담겼다.
“이런 미친, 저거 왜 저렇게 커?”
믿을 수 없다는 듯 호구별성이 화면을 가리켰다.
“저거 주차장 맞지? 야이씨, 차들 다 뽀각나겠다!”
천벌은 족히 20m는 되어 보이는 거인이었다.
주차장에 일렬로 늘어선 승용차들은 고작해야 그것의 발목 높이에 불과했다.
차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 꼭 괴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거인이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콰지직!
콰지지직!
거대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차들이 낙엽처럼 짓밟혔다.
멀쩡하게 주차돼 있던 차들이 순식간에 납작해지는 광경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이었다.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발걸음에 맞춰, 천벌이 내려온 곳이 완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강림 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거 단지인가.”
천벌이 내려온 곳은 평범한 아파트 단지였다.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와 주차장에 일렬로 늘어선 승용차들.
한눈에 봐도 수많은 세대가 살고 있을 대규모 단지.
“아니, 염병. 지금쯤 전부 다 집에 있을 텐데?”
호구별성도 욕설했다.
“다 똑같다지만 그래도 집이 제일 안전하다고 믿었을 거 아냐, 쟤들은.”
그때 주차장을 짓밟던 거인이 고개를 들었다.
가면 아래 두 눈이 번뜩인 찰나, 그 시선이 유독 아파트 한 채에 머물렀다.
그것이 거슬리기라도 한다는 듯.
휘이익!
직후 천벌이 주먹을 휘둘렀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땅이 요동칠 정도의 거인이었다.
육중한 팔다리는 그 자체로 거대병기였다.
그 주먹이 철퇴처럼 뻗어짐과 동시에.
-꺄아악!
-아아악!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건물에서 비명이 쇄도했다.
내부가 보이지 않아도 알았다.
이대로 안에 가만히 있을 수도, 그렇다고 천벌이 내려온 밖으로 나올 수도 없을 터였다.
코앞에 닥친 죽음을 보고도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공포에 질려 그저 비명만 지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때였다.
-으르르릉!
우레 같은 맹수의 울음이 울리더니 어둠 속에서 황금빛이 번쩍였다.
-크르르르릉!
몸길이가 족히 몇 미터는 될법한 대호(大虎)였다.
황금빛 가죽이 덮인 몸은 아름다웠지만 두 눈은 살기가 담겨 형형했다.
날렵하게 선 발톱과 이빨은 흡사 자연의 냉혹함이 짐승의 모습으로 현신한 것 같았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신수.
천벌에게 달려든 대호가 건물을 치려던 천벌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몹시 날렵한 움직임은 마치 번쩍이는 섬광이 천벌을 물어뜯는 것처럼 보였다.
-크아아아----!
매서운 이빨에 천벌이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터진 피가 빗물처럼 땅을 적셨다.
천벌이 한발 늦게 대호를 쳐내려 했지만, 날카로운 이빨에 팔이 완전히 뜯겨 나가는 게 더 빨랐다.
-그르르릉…….
입가를 피로 물들인 대호가 소름 끼치는 숨소리를 내며 천벌을 노려봤다.
-아아-아아아-!
팔이 뜯긴 천벌도 거친 사자후를 토해 내며 대호를 돌아봤다.
건물을 무너뜨리려던 팔은 이제 저를 물어뜯은 짐승을 향했다.
거인과 대호가 서로에게 달려드는 찰나.
파아앙!
이번에는 녹색 빛이 번쩍였다.
나뭇잎이 섞여 흩날리는 녹색의 신성이었다.
신성을 쏘아 올린 거대한 여인.
결이 사나운 머리카락을 엉덩이까지 드리우고 몸에는 짐승의 가죽을 걸쳤다.
문명의 흔적이 거의 없는 차림새였지만 몸짓만큼은 우아하게 정제되어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이 날 것의 살기를 품은 대호와 대조되었다.
여인과 호랑이.
두 신성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화면 속에서 보이지 않는 군중이 구세주의 이름을 외쳤다.
-단군!
-단군이다!
-단군이 왔어!
함성 속에서 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면류관에 늘어진 구슬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단단한 몸을 광휘처럼 휘감은 곤복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하늘의 화신.
천신의 후예로 불리는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양옆으로는 여인과 호랑이.
뒤로는 족히 수백 명에 달하는 헌터들을 거느리고.
단군과 천부인 길드였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강림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