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네가 왕좌에 오른다면(3)
화탕지옥.
이곳저곳 반파된 로비에 꺼지지 않은 열기가 가득했다.
사방에 희뿌연 수증기가 자욱한 가운데 쿠웅, 쿠웅, 굉음과 함께 공간이 무너지고 있었다.
호구별성은 사라, 바리와 등을 맞대며 독기를 뿌렸다.
“아주 다 박살나네!”
보석으로 화한 망자들 사이에서 그녀가 초조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 녀석은 왜 안 내려오는 건데?”
망자를 불태우던 초강의 불은 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의 왕이 이미 초강을 제압했다는 뜻이었다.
망자를 종으로 부리지 않는 성품답게, 지옥불이 꺼진 망자들은 모두 제 모습으로 돌아가 안식을 되찾았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왕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쿠우웅!
쿠우우웅!
건물은 계속해서 불길하게 진동했다.
꼭 금방이라도 폭삭 꺼져버릴 듯이.
“이러면 찾으러 갈 수도 없잖아!”
2층으로 올라가려 했으나 계단은 굳게 막혀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입구를 감싼 채 접근하는 모든 것을 튕겨 냈다.
보이지 않는 힘.
그 불길한 힘 때문에 혹시 모를 불안까지 들었다.
이 저승의 신화에서, 보이지 않고도 물리력을 발휘하는 권능은 얼마 없었으니까.
“……!”
그때였다.
콰앙!
귀청을 때리는 폭음에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새까만 두루마기 자락이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발걸음에 호구별성은 곧장 상대를 알아봤다.
“강림!”
인간일 적부터 신에게 도전했던 오만한 낯짝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호구별성은 경계 어린 눈으로 강림을 살폈다.
그녀는 왜곡된 신화와 함께 변해버린 탈의파와 현의옹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그런데 문득 강림이 들쳐 멘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전하!”
내내 소식이 없던 그녀의 왕이 정신을 잃은 채로 차사에게 업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제야 바리의 예언이 다시 떠올랐다.
피투성이가 된 염라를 강림이 내려다본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역시 강림도 현의옹과 탈의파처럼 변해버린 걸까.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가 사나운 독기를 뿜었다.
정말로 놈이 변해버렸다면 당장 저 손에서 녀석을 구해 와야 했다.
그래야 먼저 간 영감한테 조금이라도 빚을 갚지 않겠는가.
힘을 끌어올린 그녀의 두 눈에 새까맣게 어둠이 일렁였다.
닿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녹아내리는 암녹색의 신성이 안개처럼 축축하게 번져 나갔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가관이군.”
그때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재수 없게 턱 끝을 쳐올리면서.
“역병에 게으름뱅이라니. 내 막내한테 삿된 것들은 가까이하지 말라 누누이 일렀거늘.”
“……뭐?”
그 밉살맞은 언행에 호구별성은 되레 놈이 제정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족히 백 년 만에 보는데도 저따위 싸가지라니.
저게 진짜 강림차사가 아니면 뭣이겠는가.
호구별성과 사리를 업신여기듯 훑던 시선이 불현듯 멈추었다.
그 둘의 뒤에 서 있던 바리에게.
“……흥.”
그러나 아주 잠깐일 뿐.
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시선을 돌렸다.
‘하긴, 저놈도 병신이 아니면 저 여자애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겠지.’
팔짱을 낀 호구별성이 강림을 노려봤다.
어둡게 일렁이던 그녀의 눈은 다시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놈이 제정신이라는 것은 알았으니, 속셈이 무엇인지 더 지켜보고 판단할 생각이었다.
“그래, 뭐.”
사라를 훑어보던 강림이 입을 열었다.
“노괴가 있으니 죽지는 않겠지.”
‘……노괴?’
신경 쓰이는 호칭에 호구별성이 인상을 썼다.
‘저 시꺼먼 놈이 원래도 시왕이나 생불왕이 아니면 누구든 개똥으로 본다만…… 그래도 그렇지. 저놈이 사라를 저렇게 불렀던가?’
호구별성의 의문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
강림이 사라에게 왕을 넘겼다.
그 손길이 형제간의 애틋함 없이 거칠었다.
깜짝 놀란 호구별성이 돌아온 왕을 살폈다.
“야, 얘 왜 이래!”
가까이서 본 왕은 더욱 엉망이었다.
어디서 몽둥이세례라도 당했는지 온몸이 걸레짝이었다.
더군다나 왕의 상처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 발설지옥의 신성이었다.
모르긴 해도 발설지옥의 힘에 당한 게 틀림없다.
“야, 이거 다 네가 이랬냐?!”
“설마.”
그녀의 추궁에 강림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다 내가 한 건 아니다.”
몹시 뻔뻔하게.
“난 얼마 안 건드렸다.”
“또라이 새끼야, 그게 할 말이냐!”
어처구니없는 대꾸에 호구별성이 또 독기를 뿜을 때였다.
“……그냥 두거라, 별성.”
왕을 건네받은 사라가 새하얀 신성을 발하며 말했다.
“집안일이라 하지 않았더냐. 녀석도 장자로서 할 말이 있었겠지.”
노친네다운 발언이었다.
그 말에 호구별성이 인상을 썼다.
하기야 사라는 처음부터 장성한 적장자를 두고 핏덩이 말자가 가업을 이은 꼴이라고 했었다.
그러니 어쩌면 저 구닥다리 신은 그 말을 했을 때부터 혼자 예감했을지 몰랐다.
둘 다 염라의 자식인 이상 한 번은 부딪쳐야 했다고.
“……그런가.”
문득 드는 생각에 호구별성은 강림을 돌아봤다.
“따지고 보면 이 핏덩이는 나와 다르지.”
혼잣말처럼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 새로운 염라는…… 나도, 사라도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강림 너와 같겠지.”
신의 탄생은 둘로 나뉜다.
서쪽에서 온 신, 호구별성이나 사라수대왕은 태초부터 신이었다.
신의 사명을 갖고 태어나, 아무런 조건 없이 인세를 다스리는 신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이 땅에는 그렇지 않은 신도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고된 영웅의 길을 걸어, 비로소 신의 계단을 오른 자들.
그들은 태초부터 신이었던 호구별성이나 사라수대왕과는 달랐다.
어느 쪽이 더 뛰어나다고 고를 수는 없다.
미천한 인간이 신에 이르렀으니 더 위대하다 할 수 있고.
처음부터 신의 피를 갖고 자랐으니 더 고귀하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이 신의 계단을 오를 때는 반드시 시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
목숨의 위협을 피해 아버지를 찾아 나섰던 할락궁이가 그러했고.
부모를 살리기 위해 저승의 강을 건넜던 바리공주가 그러했으며.
왕의 명을 따르기 위해 염라를 찾아왔던 강림도령이 그러했다.
“강림차사, 네가 직접 그 시험이 될 생각이로구나.”
호구별성은 그의 뜻을 이해했다.
신은 그저 신이되, 인간이 신의 세계에 발을 내디디려면 당연히 거쳐야 할 시험이 있는 법이니.
“내 신화는 불공정한 명령에 복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천 년을 살아온 차사가 말했다.
“저승의 차사가 된 것조차 내 의지는 아니었지. 더 지혜롭고 강한 왕을 섬기게 되었을 뿐.”
먼 옛날, 강림의 배포가 마음에 들었던 염라는 그를 저승으로 보냈던 사또에게 제안했다.
-이승의 왕도, 저승의 왕도 녀석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 그렇다면 우리가 사이좋게 녀석을 나누어 갖는 게 어떻겠소?
그렇게 아둔한 사또는 강림의 몸을, 영명한 염라는 강림의 혼을 골랐으니.
그리하여 영웅은 저승의 왕에게 거둬져 신이 되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더 현명하고 강한 왕을 따를 뿐이다.”
천이백 년 전 염라의 시험을 거쳐 신의 계단을 오른 강림차사가.
그의 왕이 이끌었던 신의 계단 위에서, 이제는 새로운 왕을 모실 준비를 했다.
“녀석이 깨어나면 전해라. 이번에도 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왕좌에 오를 일은 없을 거라고.”
그 말에 호구별성은 가만히 강림을 바라봤다.
놈은 특유의 서늘한 눈으로 피투성이가 된 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그 눈은 분명 하늘 꼭대기에서 시험을 내리는 신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저 눈에 담긴 것이 정말로 그것뿐일까.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이 중에서 핏덩이 왕의 성장을 가장 바라는 것은 저놈일 것이며, 새 왕의 안위를 가장 염려하는 것도 결국 저놈일 것이라고.
‘……그래, 그런 거였나.’
그녀는 또 사라에게 왕을 건네던 놈의 거친 손길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 손이 떨치려고 했던 것은 왕이 아니라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저 핏덩이가 정말로 왕이 되어 돌아온다면, 변해야 하는 것은 핏덩이 막냇동생만이 아닐 테니까.
새로이 아우를 맞이한 형도 마땅히 제 위치를 찾아가야 할 테니까.
그렇다면 결국 지금 시험받는 것은 새 왕만이 아닐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때가 될 때까지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시험이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쌓아 왔던 형제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변할 터였다.
“계속 지켜보고 있을 거냐, 너?”
호구별성이 불쑥 강림에게 물었다.
그제야 강림이 새 왕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그녀를 바라봤다.
목석처럼 차가운 얼굴.
그러나 그것을 마주하고도 그녀는 되레 웃음이 났다.
“왜, 아주 애 깰 때까지 돗자리 깔고 눕지?”
짓궂은 목소리에 그 뜻을 알아챈 강림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
그러나 그뿐, 그는 돌아서며 말했다.
“이곳에 이미 산 자는 없다. 게다가 벌써 땅 전체가 무너지는 중이지.”
왕에 관해서는 작은 농도 받지 않겠다는 태도.
고지식한 뒷모습이 새삼 저놈다웠다.
“아집에 휩싸인 망자를 어떻게 가야 할 곳으로, 우리의 나라로 이끌 것인지…… 녀석은 그 답을 찾아야 해.”
놈은 후일을 당부하고 발걸음을 뗐다.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그저 제가 가야 할 곳으로 먼저 성큼 나아갔다.
“스스로 확신하는, 징악과 권선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뒷모습을 응시하며, 그녀는 그가 이 순간을 꽤 오래전부터 그려 왔으리라 짐작했다.
***
벌써 반백 년 가까이 지난 기억이다.
처음 저승에 떨어졌을 때.
나는 죄인을 참혹하게 고문하는 지옥의 모습에 끔찍함부터 느꼈다.
아무리 세상이 뒤집혔다 한들 내가 태어난 시대는 현대였다.
죄인에게마저 인권을 논하던 시대에 태어난 나에게, 고대의 형벌을 그대로 간직한 지옥의 모습은 곧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랬던 내게 저승의 판관 염라는 말했다.
-그래, 네가 태어난 세상은 죄인에게조차 이런 게 허락되지 않겠지.
그는 ‘지옥의 신화’에 대한 나의 두려움을 이해했다.
-내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지옥의 꼭대기에서 징악의 신으로 군림하였음에도, 그는 신화와 분리된 인간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환생을 거듭해, 끊임없이 혼을 갈고 닦아…… 그래, 이천 년 전 어느 성인의 말처럼.
그는 ‘인간의 역사’를 ‘영혼의 진보’로 여기고 있었다.
-너희는 마침내 원수도 사랑하게 된 거야.
박애, 감화, 인권.
현대 사회가 빚어낸 감수성으로 지옥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나는 그런 나를 따스하게 바라보던 어느 오래된 신의 순수한 눈을 기억한다.
-……길었던 보복의 세월을 지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시대가 왔구나.
순수하다.
그때 나는 그를 그렇게 느꼈다.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록 온갖 파렴치한 악인을 징벌해 왔음에도.
인간 전체의 영혼이 아름답게 변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을.
-그렇다면 말해다오, 나의 마지막 아들아.
염라는 징악의 폭력을 두려워하는 내게 물었다.
-폭력이 더 이상 선을 이룰 수 없다면 과연 무엇이 선을 이룰 수 있을까?
이제 와서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나는 눈앞의 염라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과거의 어느 한 장면처럼, 이제 내 곁에 없는 나의 두 번째 아버지는 그저 따스하게 웃고 있다.
-말해다오, 아들아. 우리가 선을 이룰 방법을.
그런데 그때.
-네 정녕 권선과 징악의 신이 되겠다면 너의 가장 큰 적은 악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의 모습 위로 형의 목소리가 겹쳤고.
-너의 가장 큰 적은 악이 아니라 선일 것이다.
-네가 왕좌에 오를 때 너의 가장 큰 적은, 너와 다른 곳을 바라보는 선일 것이다.
얼음장 같은 형의 목소리 위로 또 다른 신들의 목소리가 겹쳤다.
-왕이시여, 세상의 다리가 된 수많은 선인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세상, 징악과 권선의 신화가.
-세상의 선한 자들에게 다시 한번 미래를 주십시오.
“……아.”
눈을 뜨자 무너져 가는 저승이 보였다.
“괜찮냐, 전하!”
“정신이 드느냐.”
다음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두 신의 얼굴이 보였다.
정신을 잃은 사이 그들이 나를 찾아 보호한 모양이었다.
“상했던 몸은 치료해 두었다. 아직 통증이 남았느냐?”
손끝에 하얀 신성을 발한 사라가 나를 살폈다.
“……괜찮, 습니다.”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곳곳이 욱신거렸지만 몸이 상해 아픈 것과는 달랐다.
신성의 문제였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나의 신성이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
나는 잠시 꿈을 곱씹었다.
나의 아버지, 염라.
내게 가르침을 내리던 강림 형.
깨달음을 남긴 현의옹과 탈의파.
-내가 틀렸습니까?
또한 내게 맞서던 진광.
-그럼 그들 모두가 아무 죄 없이 삶을 빼앗기게 내버려 둬야 했습니까?
죽은 자를 권능으로라도 붙잡아 두는 게 선이라 말하던 목소리.
-진광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어.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염라를 치겠다던 송제였다.
가족처럼 진광을 꼭 닮은 그녀는 진광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까.
그녀도 진광의 선에 동의했을까.
“…….”
생각이 정리되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일행에게 말했다.
“한빙지옥으로 가야겠습니다.”
어떻게든 이 공간을 벗어나야 했다.
이곳의 망자들과 함께.
12장. 네가 왕좌에 오른다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