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신이 깨어난 자리(2)
어둠 속에서 빛이 일렁였다.
소녀가 든 손전등 때문이었지만, 어쩐지 그 작은 등보다는 아이가 품은 신성이 주변을 밝히는 것 같았다.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평범한 여자아이.
차별점이 있다면 예스럽게 땋은 머리에 흰 한복 차림이라는 것뿐.
자세히 보니 다른 소복 남녀들과 달리 아이가 입은 것은 치마가 짧게 개량된 한복이었다.
화려한 호구별성과는 반대로 아이의 한복은 그저 희었다.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에, 머리에 꽃은 꽃핀마저 빛이 바래 마치 흰 꽃을 단 것만 같아서 아이는 한없이 무채색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 연령대 아이와 달리 무척이나 금욕적인 차림새.
그래도 마을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독특한 행색은 아니었다.
한데.
“……너는, 대체.”
대체 뭐 하는 아이이기에 그런 존재감을 보이는 걸까.
정체도 속내도 짐작할 수 없어 말꼬리를 흐리는데,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죄부터 드릴게요.”
뜻밖에도 갑자기 납작 엎드리면서.
“제가 그자에게…… 오늘 대왕님께서 오실 거라고 말했으니까.”
이어진 말은 더욱 놀라웠다.
내가 올 것을 먼저 알았다고?
설마 미래를 봤단 건가?
“제가 당신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자는 끝까지 당신께서 누구신지 몰랐을 거예요. 그자의 역량으로는 그런 큰 것은 보지 못해요.”
엎드린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저는, 할미가 알려줘서 볼 수 있었어요.”
할미라.
무속에서 여신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그럼 이 애가 모시는 신이 내가 올 것을 알려준 걸까?
“이야, 그런 걸 직접 알려줬다고?”
호구별성이 재밌다는 듯 말했다.
“어떤 할미려나?”
‘별성 할미’도 아이가 모신 ‘할미’가 궁금한지.
“어떤 할미가, 어떤 영문으로 직접 귀띔까지 해줬을까?”
혹은 ‘할미’가 직접 계시를 내리는 이 아이가 궁금한지.
“…….”
그러나 소녀는 할미가 누구냐는 물음에는 끝내 침묵하더니.
“……열흘 전, 할미께 치성을 드렸어요.”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제 가족을 구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땅을 짚은 손이 어느새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할미는…… 대왕님께 힘을 빌려야 한다고 했고.”
“내가 힘을 빌려준다고?”
듣다가 말을 끊었다.
“……잡혔는데?”
솔직하게.
이 상태로 전설급 필드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건 우주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과정일 뿐이에요.”
그런데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받았다.
“권선과 징악의 신께서…… 악인을 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고초.”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놈을 잡아야 해서 내가 먼저 잡혔다는, 그런 언어도단이었다.
벌어진 사건의 인과를 뒤바꿔 말하는.
“전하, 그냥 들어보지 그래?”
그때 호구별성이 말을 보탰다.
내가 미심쩍어하는 걸 느낀 듯이.
“저만한 무당이 천기를 헛되게 읽을 리가 없다.”
나와 달리 그녀는 벌써 소녀의 능력을 확신한 모양이었다.
하긴 무당이야 나보다 호구별성이 더 잘 알 테지만.
“그자가 두 분을 붙잡은 건 굿판 때문이에요.”
소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곳은 전설급 필드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어요. 굿판을 성공시키는 게 정해진 값이니까요.”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다.
다만 ‘전설급 필드’는 무용담이나 영웅담과 달리 좀 더 복잡한 조건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니 이대로 굿판을 저지하는 것…… 그게, 이 필드의 해체 조건이에요.”
“……그렇구나.”
반대로 우리를 이용해 굿을 성공하면.
우리까지 법칙에 포함된 ‘전설급 필드’가 완성되는 건가.
“그자에게 핵을 심은 진짜 ‘전설의 주인’은 아직 그자에게 큰 관심이 없어요. 다른 핵과 달리 신앙도 나누어주지 않았죠.”
전설급 실력자라면 ‘법칙의 핵’을 여럿 심는 게 가능한 모양이었다.
마치 신이 화신을 만드는 것처럼.
“그래서 그자가 가진 카르마 포인트도 고작 100 정도밖에 없던 거예요. 나머지는 전설의 주인에게 바쳤으니.”
……그래, 그런 이유였나.
귀불로 꽤 많은 헌터를 죽였을 텐데도 해체 포인트가 100에 불과한 건 좀 의아했지.
“그러니 대왕님께서도 당장은 그자만 쓰러트리시면 돼요.”
아이가 일러준 결론.
‘전설급 각성자’와 부딪칠 일 없이, 박수만 쓰러트리면 이 필드를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한테는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자시(子時)가 되면 굿이 시작될 거예요.”
소녀가 말을 이었다.
“그자는 이미 많은 것을 깨웠고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것마저 욕심을 부리고 있어요. 하지만 자시의 굿판은 결국 실패할 거예요.”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제가 지금부터 대왕님의 수족이 될 테니까요.”
앳된 얼굴과 달리 검은 두 눈은 심연처럼 깊다.
“그러니 제발, 제 가족을 구해주세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는 결국 가족 때문에 나를 찾았다고, 그렇게 파악하고 있을 때.
“저도 대왕님께 원하시는 것을 바칠 테니.”
뜻밖에도 소녀는 더한 말을 꺼냈다.
“백억.”
“……!”
나와 호구별성…… 그리고 우주강도단 밖에 모르는 사정을.
어째서인지 이 아이가 먼저.
“동이 트기 전에 원하시는 것을 손에 넣으실 거예요.”
여기까지 오니, 나도 천기를 읽는다는 아이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동이 트기 전에 백억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은 물론 터무니없지만.
……적어도 과거와 현재만큼은 정확히 보지 않는가.
이제는 정말 미래까지 보는지만 남았다.
“새로운 왕이시여, 저의 이름은.”
고개를 든 소녀가 잔잔히 말을 이었다.
“바리입니다.”
이승과 저승을 이어준다는 위대한 신의 이름을.
***
날이 흐리다.
달은 벌써 구름에 숨었다.
어둠 속에서 방울 소리, 가위질 소리, 악기 소리, 여럿이서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제 자시인가.”
사방으로는 향내가 진동했다.
‘바리’가 나간 뒤, 이 정체불명의 향 때문에 또 한 번 의식이 끊겼다.
아마 평범한 향이 아니겠지.
“전하, 정신 차렸냐.”
몽롱한 와중에 호구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여기 밑에 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 혼자 제단 위였다.
몸을 감싼 까끌까끌한 감촉이 불편했다.
팔다리는 여전히 묶인 채였는데, 어떻게든 꿈틀꿈틀 밑을 볼 수는 있었다.
“누나 괜찮아요?”
그녀는 제단 아래에 널브러진 채였다.
그런데 바닥에는 그녀뿐 아니라, 사슴이며 돼지, 소머리, 쥐 떼 같은 온갖 죽은 것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마을의 서낭당이 왜 그런 모습이었는지 이해되는 꼴이었다.
“아니, 여기 냄새가 지독해.”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겁할 광경이었으나 마마께서는 그저 동물들이 썩는 냄새를 불평했다.
“얘네 진짜 뭔 일 치려나 보다.”
그러고는 바로 굿판에 말을 얹었다.
“아마 핵심 제물은 너고.”
그런 것 같았다.
동물 사체만 해도 그냥 평범한 굿판은 아니었다.
거기에 굳이 나만 정성스레 제단에 올려놓은 것도 이상하고.
내 옷까지 갈아입힌 것도 그 때문이겠지.
하긴, 애초에 전설급 필드의 조건이 평범한 굿판일 리가 없지만.
“대충 나랑 얘들이 나물이면, 전하 너는 제삿밥인 거지.”
뭔가 기분이 좀 이상한 비유였지만, 대충 이해할 수는 있었다.
“주술은 어때? 놈들이 다시 건드린 것 같냐?”
몸에서 탈출하지 못하게 막는 주술.
살펴보니 부적도 오랏줄도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 ‘바리’가 만져둔 그대로였다.
-이 주술, 제가 풀어드릴 수 있어요. 제가 만든 주술이니까.
정확히는 조건이 충족되면 벗어날 수 있는 주박이라고 했다.
주술은 결국 인과를 주고받는 것이라, 한 번 묶이는 주술이 성립된 이상 그냥은 풀 수 없기 때문이라나.
정체 모를 이 까끌까끌 기분 나쁜 옷은 바리가 손댈 게 아니라고 했고.
“누나.”
바리에 대해 곱씹다가 말을 꺼냈다.
“바리가 저를 본 게 열흘 전이랬죠.”
처음 들었을 때부터 찝찝했던 것을.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열흘 전이라면, 나는 모기가 되기를 결심하고 저승을 청소할 때였다.
나조차도 내가 염라가 될 것이라 상상도 못했던 때에, 소녀는 어떻게 모든 것을 본 것일까.
……그때 이미 모든 게 정해진 것처럼.
“그게 뭐?”
그런데 호구별성은 전혀 이상하지 않나 보다.
“무당이 앞날 좀 본 게 뭐가 어때서?”
아무렇지 않게 되묻는 걸 보면.
“…….”
그 말에 새삼 그녀와 나의 차이를 실감했다.
호구별성이 처음부터 신이었다면, 나는 본래 인간이었으니까.
정해진 미래에 대한 신과 인간의 태도.
차사 시절부터 이미 수도 없이 느껴왔던 괴리.
저승차사로서 ‘운명에 따라’ 죽음을 집행할 때마다 나는 생각했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정해졌다면 삶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런 내 단상을, 처음부터 신이었던 호구별성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신은 시간을 초월한 존재니까.
영원을 사는 그들은, 인간처럼 미래를 고뇌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것에도 신은 결코 의심이 없다.
“……뭐, 그것도 그렇네요.”
그래서 곧바로 말을 접었다.
어차피 저승에서조차 누구와도 나누지 못했던 생각이었으니까.
내가 그 세계를 사랑하게 된 것과는 별개로.
“그만한 무당이 미래를 보는데, 딱히 이상할 건 없죠.”
속마음을 숨기고 말을 받았더니, 호구별성도 더 묻지 않았다.
“저기 봐라. 슬슬 판이 다 짜였다.”
방울 소리, 악기 소리, 웅얼대는 소리.
낮에 봤던 소복 남녀가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생소한 광경에 눈길이 가는데, 돌연 호구별성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런데 가락이 아주 엉망이야.”
귀가 썩는다는 듯 인상까지 썼다.
내 눈에는 신기해도 마마 기준으로는 영 아닌 모양이었다.
“결국 저 소복들은 그냥 들러리야. 진짜 판을 벌이는 놈은 따로 있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나는 박수무당 쪽을 돌아봤다.
짤깡짤깡, 치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가위질 소리가 요란했다.
소복남녀가 둘러싼 가운데.
화려한 오방색 옷을 입은 박수가 가위며 방울을 흔들면서 작두를 탔다.
“저놈 가위 보이지?”
마마께서 마저 설명했다.
“저 가위로 널 찌르면 끝이야. 대충 제삿밥에 숟갈 꼽는 거지.”
여전히 기분은 이상해도 한 큐에 알아먹게 되는 비유였다.
“……그런데 이상한 게.”
그녀가 문득 말꼬리를 흐렸다.
“암만 봐도 내림굿 같은데, 이거.”
뭔가 의문스럽다는 듯이.
“……대체 누구한테 내리는 거지?”
그래, 듣고 보니 이상했다.
내림굿이라면 응당 신을 받는 그릇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굿판에는 정작 신을 받을 무당이 보이지 않앗다.
신을 내리는 내림굿인데 받을 그릇이 없다니.
그럼 대체…… 어디에 신을 내리겠다는 거지?
쿠웅!
그때였다.
뒤쪽에서 무언가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돌아봤다가 경악했다.
“가짜 몸?”
눈코입 없이 진흙으로 대충 빚은 사람의 형상.
분명 우주질서보존회가 유통하는 가짜 몸과 똑같은 물건이었다.
그러나 내가 쓰던 가짜 몸과는 어딘가 많이 달랐다.
“저렇게…… 크다고?”
모양은 같되 크기가 훨씬 더 컸다.
처음부터 인간과 비슷했던 내 몸과 달리 저 몸은 적어도 3m는 되어 보였다.
만약 저 몸에도 현신이 가능하다면 분명 말도 안 되는 거인이 될 것이다.
“대체 저게 뭐야?”
호구별성도 덩달아 소리쳤다.
“저기다 신을 내린다고?”
분명 이건 내림굿이었다.
다만 평범한 그릇에 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저 커다란 몸에 내리는 것이다.
이루지 못할 것에 욕심을 낸다더니.
박수는 염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뭔가를 깨우려는 게 분명했다.
그게 이 전설 필드의 완성 조건이고.
둥둥둥!
둥둥둥둥!
굿판 가득히 커다란 북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소복 남녀들이 한층 더 격렬하게 무구를 흔들었다.
놈들이 중얼대던 치성 또한 더욱 고조되었다.
굿판이 최고조에 달한 것이다.
“모인다!”
작두 위에서 춤을 추던 박수가 별안간 소리쳤다.
“기운이 모여들었다!”
콰아앙! 콰아앙!
박수의 말과 동시에 검은 하늘에서 벼락이 쳤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불길한 기운에 나는 가짜 몸을 노려봤다.
정확히는, 가짜 몸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저게…… 뭐야.”
진흙을 빚은 듯한 얼굴에 뻥뻥 구멍이 뚫리더니, 마치 눈코입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꿈틀꿈틀.
뭉쳐 있던 사지는 손이며 발이며 더욱 정교하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저 거인이 당장이라도 신이 돼서 깨어날 것처럼.
“뭐야, 대체 뭔데…… 이렇게 불안하지.”
그런데 그것을 자세히 보려는 순간 귓속에서 날카롭게 이명이 울었다.
숨을 삼켰다.
귀를 찢는 이명에 순식간에 속까지 메스꺼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감.
아니, 불쾌라기보다는 차라리 공포에 가까운 지독한 불안이 나를 덮쳤다.
“……아윽.”
몸을 덮치는 불안에 작게 신음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불안은 저것이 보내는 경고였다.
놈의 형상을 갖춰갈수록 이명도, 메스꺼움도 더 끔찍하게 나를 죄었다.
단지 이곳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저것은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안 돼.
저건 깨어나면 안 돼.
저게 대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절대 깨어나선 안 돼!
“……마지막으로!”
이명을 가르고 박수의 목소리가 흉흉하게 고막을 찔렀다.
“마지막으로, 이 혼을 바치겠나이다!”
작두에서 내려온 박수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하면 모인 기가 결코 흩어지지 않을지니!”
손에는 날이 선 가위를 든 채였다.
박수와 눈이 마주치고 직감했다.
저 가위로 날 찌르면 내림굿은 완성되고, 저 거인은 완전히 깨어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막아야 한다.
지금 당장!
“아니……!”
박수의 가위 끝이 가슴께에 닿는 찰나, 나는 가짜 몸에서 벗어났다.
몸을 묶었던 주술에 다른 주술이 충돌하면서, 바리가 미리 처리해둔 대로 현신을 푸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대왕님!”
그렇게 몸에서 벗어나 영체가 되었을 때.
“제게 빙의하세요!”
조용히 숨어있던 바리가 소리쳤다.
“제 몸이라면 그 몸보다 더 위대한 권능을 담으실 수 있을 거예요!”
이미 말을 나눴던 터라, 망설일 것 없이 아이에게 빙의했다.
그리고.
“……?!”
바리 몸에 접신한 순간, 예상치 못한 막대한 신성이 나를 덮쳤다.
“잠깐, 설마……?”
경악할 수밖에 없는 신성.
그렇게 나는, 아이가 모신 ‘할미’와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