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몸 위에 올라탄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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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몸 위에 올라탄 채로
2022.12.05.
얼떨결에 정원을 걷게 되었으나, 라크하와 함께여서 그런지 즐거웠다.
종종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하며, 남몰래 데이트하는 기분이 들기도 해 좋았다.
그리고 라크하가 날 위해 걸음을 맞춰주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라크하와 한밤에 여유롭게 정원을 걸은 게 얼마 만이지?’
우리가 생각보다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긴 했구나.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서운하기보다는 씁쓸했다. 녹스로 인해 라크하도 바빠진 거였으니까.
그래서일까. 녹스 얘기는 조금만 더 뒤로 미루더라도 지금의 여유와 설렘을 더 느끼고 싶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물론이죠. 날씨도 선선하고, 바람도 딱 좋고, 정원의 꽃도 예쁘게 핀 데다가…….”
나는 라크하를 힐끔 바라보았다. 라크하는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이 모든 걸 라크하와 함께 누리고 있으니까요.”
라크하가 있기에 이 모든 게 좋았다. 나를 바라보던 라크하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도 그래.”
당연한 이치를 얘기하듯 라크하의 입에서 대답이 곧장 튀어나왔다. 늘 서슴없이 제 마음을 말해주는 라크하가 고마웠다.
덕분에 지금까지 라크하의 마음을 의심할 일은 없었으니까.
“그대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하고 좋아. 감히 이 행복을 누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라크하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로 내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라크하의 시선이 한 갈래로 땋은 내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나는 불규칙적으로 땋여 있는 내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라크하를 기다리는 동안 심심해서 혼자 아무렇게나 땋은 거라…… 조금 어설프죠?”
“아니, 잘 어울려. 그런데 나를 기다렸다니?”
“음…… 아무래도 낮에는 라크하가 바쁜 것 같아서요.”
문득 낮에 집무실을 찾아갔다가 그냥 돌아왔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
전혀 서운해할 일이 아닌데 괜히 기분이 떨떠름해서 나는 붕붕 고개를 내저었다.
마침 말이 나온 김에 지금 얘기를 꺼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늘 낮에 데미안과 녹스의 대화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테리투스 님의 예언이 떠오르더라고요.”
사실 원작 내용이 떠오른 거였지만, 라크하가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대체 어느 누가 여기가 책 속 세상이라는 걸 믿겠는가. 차라리 테리투스의 예언이라고 하는 게 더 말이 됐다.
물론, 이런 식으로 테리투스를 이용하기엔 양심이 콕콕 찔리긴 하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마물 떼가 황실을 피로 물들일 거라고 했어요.”
“……녹스가 마물들을 끌고 와 황실을 습격할 확률이 높다는 거군.”
내 말을 듣고 놀랄 줄 알았으나, 라크하는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이미 마물과 관련해서 들은 소식이라도 있는 거라도 있는 걸까? 생각이 많아 보이는 듯한 얼굴이었다.
“네, 미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분명 그 전에 징조가 있을 테니까요.”
“결국, 그렇게 되는 건가…….”
“네?”
라크하의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아 되물었다. 하지만 라크하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시롬과 파트라슈에게 일러둘 테니 그대는 몸조리를 잘 하도록 해.”
그런데 이상하게도 라크하의 미소가 씁쓸해 보였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의아한 마음에 물었으나 라크하의 대답은 단번에 나오지 않았다.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두려워졌다.
‘별거 아닌 일에 라크하가 이렇게 머뭇거릴 리가 없는데…….’
문득 좋았던 순간들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라크하와 함께 걷던 순간이, 그리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던 순간이 잠깐의 행복일 뿐인 것처럼.
그 순간이었다. 쏴아아. 바람이 세게 불며 하얀 꽃잎이 흩날렸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흩날리는 하얀 꽃잎은 눈이 내리는 광경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어쩐지 마냥 즐겁게 바라볼 수가 없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다르아 꽃이야.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다르아 나무에 꽃이 만개하겠군.”
라크하가 고개를 들어 바로 옆에 있던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는 라크하를 따라 나무를 살펴보았다. 나뭇잎 사이사이마다 하얀 꽃봉오리들이 맺혀 있었다.
하얀 꽃봉오리 중에서 몇 개는 이미 펴 있었다.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 같더니 다르아 꽃나무에서 났던 향기였던 모양이다.
“아이샤가 다르아 나무에 피는 꽃을 유독 좋아하지.”
“……신기하네요. 아이샤가 유독 좋아하는 꽃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의외였다. 꽃이라면 우열을 가리지 않고 전부 좋아하는 줄 알았으니까.
“어릴 적, 선대 공작의 눈을 피해 다르아 꽃나무 아래에서 아이샤와 몰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 같더군.”
옛 추억이 떠오르는지 라크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아마 다르아 나무의 꽃이 만개하면, 아이샤가 여기서 꽃을 구경하며 식사하자고 고집을 부릴 거야. 매년 그랬거든.”
“이번에는 넷이서 함께하겠네요. 아이샤랑 델카인, 저랑 그리고 라크하. 이렇게요.”
생각만 해도 즐겁고 설레서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몽글몽글한 기분도 잠시였다.
“난 이번에는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
“많이 바쁘신 거예요?”
“…….”
별안간 다시 정적이 흘렀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을 때와 비슷한 침묵이었다.
나는 초조하게 라크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조금 뒤, 라크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황실에서 소환장이 왔어. 이틀 뒤에 입궁해서 선대 공작 부부의 실종 건과 관련해서 조사를 받으라더군.”
황궁에서 아무 이유 없이 5년이나 지난 일로 부를 리가 없었다.
문득 녹스가 습격했던 그 시각, 라크하는 제4 기사단을 상대하고 있었다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4기사단이 북쪽 숲을 수색한 건가요?”
“녹스와 데미안 때문에 병력이 분산된 틈을 타 수색한 모양이야.”
나는 짧게 숨을 삼켰다.
“라크하가 흑마법을 쓴 것까지 알아냈을까요?”
“아마도. 황제 직속의 기사단에는 신전 출신의 기사도 섞여 있으니 흑마법의 흔적을 읽었을 거야.”
입가에 비소를 머금은 라크하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이 일을 빌미로 황제는 나를 끌어내려고 할 테지. 황가는 아인티아 가문에 더 이상 흑마법이 계승되지 않길 바랄 테니까.”
아닐 거라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부정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키네스가 아인티아에 대한 큰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걸 나 역시 알고 있었으니까.
흑마법은 시전자를 삼킬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 마법이었다.
게다가 신력이 불안정해진 상황에서 키네스는 분명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아인티아 가문의 흑마법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희생양이 라크하인 건지.
“어째서 라크하가…….”
울컥하는 마음에 목소리가 떨렸다. 오히려 라크하는 아인티아에 흑마법이 이어지지 않길 원했다.
흑마법에 집착하던 사람은 선대 공작 부부였다. 그 때문에 라크하와 쌍둥이들은 고통스러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라크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아직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까이서 라크하를 지켜 봐온 나로서는 라크하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알고 있었다.
“라크하도 흑마법 때문에 많이 힘들었잖아요.”
“그렇다고 내가 저지른 일이 없던 게 되진 않으니까.”
라크하가 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쩜 안 좋은 일이 연속으로 닥치는 건지.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현실에 무력감이 들어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라크하와 쌍둥이들의 운명을 바꾸고 싶어서 곁에 있기로 한 건데.
마치 원작의 결말대로 아인티아는 행복하면 안 된다. 라고 낙인이라도 찍혀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방법이 없진 않아. 언제 돌아올 거라고 확답은 못 하겠지만, 꼭 돌아올 거야.”
내가 울면 라크하가 곤란해할 테니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참고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라크하라면, 나와 쌍둥이들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돌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마음과 달리 눈물은 계속해서 쏟아졌다.
고개를 숙인 라크하가 내 눈가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선대 공작 부부도, 녹스도 전부 해결하고 돌아올 테니 그대는 아무런 걱정하지 마.”
그날 밤, 나는 라크하를 꽉 안은 채 목이 쉬도록 펑펑 눈물을 흘렸다.
속으로 부디 우리의 끝에 행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면서.
***
내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과 다정한 목소리에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누가 울지 말라고 달래주면 더 눈물이 난다더니 정말이었다. 내가 진정될 때까지 라크하는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나를 달래주었다.
결국, 그토록 즐겁고 설렜던 산책은 눈물바다로 끝났다.
“여기, 목 좀 축여.”
침실로 돌아오자, 라크하가 내게 물잔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어어?”
물잔을 건네받으려는데, 손이 미끄러지며 물잔이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트리기 전에 라크하가 빠르게 잡아챈 덕분에 잔을 깨트리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결국 물을 쏟고야 말았다.
물잔에 있던 물은 기어코 흘러나와 내가 입고 있던 잠옷을 적시고 말았다.
나는 축축하다 못해 찝찝하게 느껴지는 잠옷을 살짝 잡아 올렸다.
계속해서 몸에 달라붙는 차가운 감각 때문에 불쾌한 나머지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메이아, 괜찮아?”
내 상태를 살피던 라크하가 별안간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내 눈을 피하는 행동이었다.
뭔가 문제가 있나 싶어 그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쭉 내밀자, 창밖으로 들어온 달빛에 얼핏 붉어진 라크하의 얼굴이 보였다.
“라크하, 얼굴이 빨개요. 왜 그러는 거예요?”
“조, 조금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
라크하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나에게서 슬쩍 몸을 뒤로 뺐다.
갑작스러운 거리 두기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에게 더욱 몸을 바짝 들이밀었다.
“갑자기 왜 저를 피하시는 거예요?”
“……얼른 하녀를 부르는 게 좋겠군.”
하지만 그럴수록 라크하는 더욱 몸을 뒤로 물렸다.
“왜 그러냐니까요?”
“자, 잠시만……!”
내가 몸을 더 붙이려던 그때, 계속해서 몸을 뒤로 빼던 라크하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나는 어떻게든 라크하가 다치는 건 막기 위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윽!”
“악!”
나와 라크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걸터앉아 있던 침대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라크하의 몸 위에 올라탄 채로.